22卷11冊 : 四周雙邊 半郭 20 x16.4 cm, 有界, 11行22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2 x 21.4 cm.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광정의 시문집이다. 문과도사 이시암(李時馣)의 손자로 아버지는 이후 룡(李後龍)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이다. 백부이선룡(李先龍)의 양자로 갔다. 증조부 이택(李 澤)이광해군의 폭정을 피해 봉화로 내려오면서부터 살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정통 유학서 뿐만 아니라, 『장자(莊子)』․『초사(楚辭)』․『사기(史記)』․『좌씨 춘추(左氏春秋)』와 같은 책을 탐독하여 고문에 능하였으며 훌륭한 문장을많이 지었다.
1699(숙종25)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생부모와 양부모 상(喪)을 연이어 당하자,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태백산 자락 소천산(小川山)으로 들어가 젊은이를 가르치면서 문장가로서의 일생을 보냈다. 만년에 조현명(趙顯命)이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방의 학문과 교화를 일으키고자 많은 선비를 뽑았는데, 이때 이광정을 스승으로 모셔 안동부도훈장(安東府訓都長)으로 삼았다. 조정에서 효렴(孝廉)을 천거하라 하였을 때에도 문학과 행의(行誼)가 산남(山南)의 제일이라고하여 천거되었다. 이후에 김재로(金在魯)가 영백(嶺伯)으로서 조정에들어갔을 때에도 천거하 여 후릉(厚陵) 참봉을 제수 받았는데, 서경덕과 성수침이 그 자리를 사양하였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그뒤에도 장릉(莊陵) 참봉을 제수 받았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당시 재상이 던 조영국(趙榮國)은이광정이 문장과 학술에 중망이 있었음에도 여러 차례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고 산림에 묻혀 후학을 교수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6품직 하사를 건의하여 왕의 허락 을 얻었다. 이와 같이 이광정은영남 문원(文苑)의 모범이며, 세교(世敎)를 떨쳤던인물로 알려 졌다. 퇴계학풍이 지배적인 안동지방에서 제자인 문장가 권만(權萬)과 도학자 이상정 간에 문학사상 논쟁이 벌어졌을 때, “문학과 도학 중 어느 것이 중하다 가볍다 할 수 없다.”고 하여문학의 자율적 가치를 옹호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문집은 그의 장례에 모인 향중사림(鄕中士林)이 발기하여 유문을 편집하고 각기 갹출하여 1808(순조 8)년에 간행했다. 시에는 강산여자가(江山女子歌), 향랑요(薌娘謠), 우전가(禹篆歌), 포독동요(抱犢洞謠), 만장(挽章) 등이며 산수와 자연을 즐기는 시가 대부분이다. 「노파의 다섯 가지즐거움」을 비롯한 21편의 우언(寓言)이 담긴 『망양록(亡羊錄)』과「강상여자가」․「향랑요」 등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다. 서(書)는 학자들과 학문에 관한 문답이 대부분이고 안부와 시정 에 대한 내용이 더러 있다. 잡저에는 서경(書經) 재촌편(梓村編)과 시경(詩經) 진풍무의장(秦 風無衣章)에대해 논했으며 의위공자무기청한단주(擬魏公子無忌請邯鄲奏), 의곽광견임입정(擬 霍光遣任立政) 등, 초이릉서(招李陵書), 부나설(復儺說), 호격(虎檄) 등을 논했으며육경(六經)에 대해 문답한 것이 있다. 기(記)들은 재(齋), 정(亭), 암(庵) 등에 관한기(記)와 산수의 풍경을 서술한 기(記)이며, 발(跋)은 서책(書冊)에 붙인 발문 등이 있다. 잠(箴)은 제가십잠(齊家十箴 ; 사부모(事父母), 우형제(友兄弟),정가실(正家室), 근제사(謹祭祀), 접빈우(接賓友), 교자손(敎子 孫) 등)에 대해서술했다. 전(傳)에는임열부향낭전(林烈婦薌娘傳), 두곡선생전(杜谷先生傳), 칠공자전(七公子傳 ; 太宗의 측실현손(側室玄孫))과그의 아들 6형제), 김순부전(金淳夫傳), 권씨충효전(權氏忠孝傳), 이승전(二勝傳), 정효자전(鄭孝子傳) 등이며 이들에 대한 많은 일화를 수록했다. 만록(謾錄)의 망양록(亡羊錄)은 당시의 과거제도가 문사기사지재(文詞騎射之才)에만 치중함을 지적했고 전국시(戰國時)의 각국을 6수(獸)인 서(鼠), 묘(猫), 구(狗), 호(虎), 표(豹), 상(象)에 비유하여 그들의 상극지리(相剋之理)를 논한 것 등 금수조충(禽獸鳥蟲)등에 비유 하여 세정(世情)을 풍자하고 있다. 절익론(折翼論)에는 진사기(晋史記)에 실린 도사행(陶士行)의 꿈 등을 인용한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