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卷4冊 : 四周雙邊 半郭 23.3 x15.7 cm, 有界, 10行22字. 內向2葉花紋魚尾 ; 30.5 x20.2 cm.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박지서의 시문집이다. 박수경(朴受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진주 강씨로 강협(姜綊)의 딸이다. 다섯 살 때 할아버지박정원(朴挺元) 밑에서 수학하다가 종숙 박맹기 (朴孟夔)로부터 배웠다. 21세부터실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을 스승으로 섬겼고, 당시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살고 있던 퇴계학파의학자들과도 많은 교유를 하였다. 6대조인 능허 박민으로부터 내려오는 가학인 남명학을 일찍 체득하고 여기에다순암의 실학 정신과 퇴계 학파의 학문 방법을 두루 섭렵한 것이다. 그의 학문 폭이 얼마나 넓은지 짐작할수 있다.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 “무릇 학문하는 것은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고공을 쌓아 오래 되도록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눌암이 퇴계 선생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학문하는 데는 마음을가라앉히고 공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대개학문이란 것은, 가까운 것을 말하자면 일상생활 속에 있고, 먼것을 이야기하자면 천지의 바깥에까지 극도로 뻗어나간다. 하학(下學)한 뒤에 반드시 상달 (上達)할수 있다. 아래로부터 시작해야 높은 곳에 이를 수 있다.”라고하면서 자기 몸을 바르게 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성리학 탐구 등 높은 학문 경지에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옛날 선비들의 학문 성취는 독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눌암의 학문역시독서를 통해 완성되 었다고 할 수 있다. “독서의 방법은 정밀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잡된 것을 귀하게여기지 않고, 요약하는 것에 힘을 써야지 넓은 것에 힘을 쓰지 말아야 한다. 한 편의 문장 안에서 먼저 그 맥락을 살펴서 구두의 사이에서 그 의미를 깊이 탐구해야 한다.
성현의 천언만어가 내 마음과 서로 호응해서 융회․관통하여 내 마음과 책이 한 덩이가 되어 한 글자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없게된 그런 때에 가서야 득력하는 곳이 있게 된다.” 눌암은 책과 마음이 일치가 될 때 진정으로 학문을성취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탐내고 얻기에 힘쓰고 지름길을 취하여 빨리 가려는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눌암은 학문의 방법을 주자와 퇴계에게서 찾았고,아울러 남명학파의 전통인 실천도 중시하였다. 곧 “아는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남명의 교훈을 가슴깊이 새기고 당시 지역의 유림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눌암은 남명선생의 학문을 기리는 현창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강우지역 사림들의 논의를 모아 남명의 문묘종사운동(文廟從祀運動)을전개한 것이다. 두 차례의 승무소를 직접 지었고, 대궐에두 차례 가서 상소하였다. 당시 임금인 정조에게 30여 차례나있어온 남명의 승무 청원을 윤허하여 어진 이를 높이는 정성을 펴고 착한 일을 권장하는 정치를 하라고 눌암은 역설하였다. 그러나 끝내 윤허를 얻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다.
눌암은 남명 제자, 사숙인들의 현창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고할 수 있다. 먼저 남명의 제자 수우당 최영경의 유허가 100여년 동안 매몰되어 있었는데, 그 방손들과 협력하여 유허비를 세웠다. 겸재하홍도가 강학하던 모한재(慕寒齋)의 중건을 주도했다. 또 남명 제자와 사숙인의 문집 간행을 주도했다.
각재 하항의 『각재집(覺齋集)』, 송정 하수일의 『송정집(松亭集)』, 부사 성여신의 『부사집(浮査 集)』, 창주 허돈의 『창주집(滄洲集)』등을 교정하여 출간해 내었다. 우리나라 선현들의 행적을 수집하여 『동현영적(東賢零蹟)』 4책을 편집하였고, 선현들의 수묵을 수집하여 10권의 책을 편찬하였다. 눌암은 자기 선조 19세 동안의 보첩, 행장, 묘갈명, 외가의세계 및 가훈, 만사, 제문 등을 모아 『무첨록』이라는 책을편집하여 집안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원고상태 로 있던 6대조와증조부의 문집인 『능허집(凌虛集)』과 『서계집(西溪集)』을 간행하였고, 10대이하의 산소와 후손 없는 방조의 산소에 묘갈을 세웠고, 이를 종이에 탁본하여 「순성세갈 (蓴城世碣)」이라고 이름하여 정리하였다. 당시 도학의 종유와 문장의 거장들이 서계와 창수한 시문을 모아 엮은 「서계제영(西溪題詠)」이 화재로 소실되었는데,눌암이 원작자의 후손가에서 그 원시를 얻어 그 책을 복구하였다. 당시 진주 향교는 옥봉의산 중턱에 있어 너무 높아 불편하였다. 이에 좀 낮은 봉곡동으로 옮겼더니, 터가 낮고 좁았다. 이때문에 다시 옛날 터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진주 원로들의 숙원이었는데, 눌암이 원로들의 뜻을 받들어 1811년부터힘을 다하여 지도하여 일을 처리하여 그 다음 해 말끔하게 중건하였다. 이때 눌암은 이때 「대성전개기축문(大成殿開基祝文)」․「대성전이건상량문(大成殿移建上樑文)」과 「대성전이건사적 비명(大成殿移建事蹟碑銘)」을 지었다. 당시 정강서원이 쇠퇴하여 유지해 나가기 어려웠는데, 눌암이 맡아 서원 재산을 넉넉하게 만들고, 묘우(廟宇)를 중수하고, 제기를새로 만들고, 또 『정강서원지(鼎岡書院誌)』를 출간해 내었다. 이 서원에 향사된 선현들의 전기 자료를 눌암은철저히 수집하여 이 책 속에 수록하였다.
눌암은 조선 영․정조 때 경상우도에서활약했던 학자로 일생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했다. 특히 그는 남명학을가학으로 하는 태안 박씨 가문에서 태어 나 6대조 능허 박민과 증조부 박태무의 정신을 이어 강우지역에서비중 있는 역할을 하는 학자로서 여러 가지 큰 유림사업을 해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살았던 당대에는 이 지역에서제일 이름난 학자였건만 불과 2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집은 1908년 증손 일형(一衡) 등이편집․간행하였다. 책머리에 곽종석(郭鍾錫)의서문과 책 끝에 증손 박주형(朴周衡)의 후서와 박일형의 발문이있다. 권1∼4에 시111수, 소 4편, 서(書) 153편, 잡저 2편, 서(序) 5편, 기 5편, 발 10편, 권5∼7에 상량문 2편, 애사 (哀辭) 3편, 축문 2편, 제문 4편, 비명 5편, 묘지명 18편, 묘표 2편, 묘갈명 23편, 행장 12편, 유사 1편, 전(傳) 4편, 권8에 부록으로가장․사장(事狀)․묘갈명 각 1편과 애사 2편, 만사 23수, 제문 7편, 봉안문(奉安文)․축문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 가운데 「청남명 조선생종사문묘소(請南冥曺先生從祀文廟疏)」는 조식(曺植)의 문묘배향을건의한 상소문으로 조식의 학문과 업적을 아성(亞聖)과 동일하게보아 높이 찬양한 내용이다.
「의청학봉김선생서원소(擬請鶴峯金先生書院疏)」는 김성일(金誠一)의문장과 도덕, 임진왜란 때의 전공 등을 높이 찬양해 서원을 세워 김성일을 추모하고 교육의 도장으로 삼게해줄 것을 건의한 상소문이다. 잡저의 「격도내사우문(檄道內士友文)」은 1811(순조 11)년홍경래 (洪景來)의 난을 당해 경상도내 유림들에게 의병에가담할 것을 호소한 격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인좌(李麟佐)의 난 등으로 인해 국난에 처했을 때 선비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일을 들어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글이다. 「산가설변(山家說辨)」에서는옛날 중국 주나라의 태왕(太王)․무왕(武王)․주공(周公) 등의 고사를 예로 들어 경험론적으로 풍수지리설을 지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