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 1) 거제도 칠원 윤씨 이야기2) 거제도 의령 옥씨 이야기 3) 거제도 칠원 제씨 이야기4) 하청면사환(巳還), 한내(汗內) 이야기 5) 거제시 연초면 연사리 이야기 6) 거제 반씨(潘氏), 신(申)씨, 빈씨(賓氏) 7) 거제도 의성 김씨 이야기
1) 거제도 칠원 윤씨 이야기[世居說]
윤씨는 큰 고을의 큰 가문이다. 옛날 휘(諱)가 달(達)인 분이진사(進士)로써 바다를 건너왔다고 전하며, 5세가 휘(諱) 윤승보(尹承輔)인데 임진난당시 윤승보 두 아들 윤영상(尹榮祥) 윤흥량(尹興良) 모두, 당시 난(亂)에 공을 세워 녹권(錄券)을 받았다. 윤승보의 동생 휘(諱)가 개(玠)인데, 그 당시 족보를 손질하면서 보(輔) 자(字)를 더하여 윤개보(尹玠輔)가 되었고윤승보의 동생은 형을 위해 연초면 다공리(茶貢里)에 사우(祠宇)를 건립했다 전하는데 어느 해에 창건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의 큰할아버지 은옹(隱翁) 부군(府君)은 임술년(1922년) 일기 중에 윤씨 사당을 건설했다고 전하며 자손들이 재물과 제문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년의 나이일 때 향원(鄕員)의 동아리에서널리 의논하여 장차 유림이 제사를 봉사(奉祀)하고자 했는데 곁에 옥씨(玉氏)와 함께 권고하였다. 옥씨 또한 공경하고 주체할수 없는 장수이니 선조(先祖)로서 헤아린 일이었다. 모든 마을에다 두루두루따로 설치하자는 계안(契案)이 있었고 의연금(義捐金)을 받자고했는데 몇 천여 금(幾千餘金)에 이르렀다. 혹은 토지로 바꾸고 혹은 재물을불리어 이익(利益)을 늘리기도 했다. 윤씨 중에 한 사람이 맡아있던 것을 승낙(承諾) 없이 마음대로 써버려 수천금(數千金)을 도둑맞았다. 이에 윤개보(尹玠輔)의 자손또한 사당을 나누어야겠다는 뜻을 가지고 별도로 하청리에 세웠다. 그래서 윤개보(尹玠輔)의 위패를 옮겨서 받들게 되었다.
◯ 하청리세거인 참봉(參奉) 윤도흠(尹道欽)씨가 그서자(庶子)의 족속(族屬)을 기록한내력을 보내와 나에게 청하였다. 재삼 보여주길 원하며 한번 왔다가면서 안부를 묻는 연고이다. 참봉이 말하길, 다공리에 창건한 사당의 일은 심히 불공평한 점이많다. 이런 이유는 우리 종파가 받는 땅은 입향 선조 진사공(進士公)을 주(主)되는 지위(地位)에 위패를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당시 임진난 선조의 배향하는 뜻은 종중(宗中)의 여론으로정히 결정한 것이다. 그대가 가부(可否)를 논(論)하여 어찌하였건, 공의 마음을 말 한마디로정해주기 바란다. 나는 묵묵히 오랫동안 좋게 말했다. 당초수문장이었던 윤개보(尹玠輔)공은 가히 제사를 올리는 게 도리이지만, 진사공에게제사를 올리는 것은 이로부터 4~5세 선조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마땅히제사를 지내는 도리라고 할 수 없으니 고로 제사를 올리지 않는 것은 틀린 것이다. 설사 오늘 나라를위해 바친 공이 있다할지라도 위(上)의 조정으로부터 증질(贈秩)받고 시호를하사 받아야하고 사림(士林)을 위하고, 공공의 대의(大義)를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서서, 거룩하게 여겨떠받듦이 있어야한다. 하필 자손들의 사사로운 일이 많아 겨를이 없기도 하지만, 비등한 하나의 증명도 없고, 지난날에 받들어 섬기었던, 이미 정해진 직위에 올랐던 것, 사실은 감히 알지 못한다(그렇지 않다). 참봉이 말하길, 공이말을 전해 듣기로 사물의 이치(理致)나 일의 도리(道理)가 매우명백하다하니 대저 이러이러하여 의논을 마친다.
◯ 수일 후에나는 죽전리를 지나가다가 도로 변에서 윤봉여(尹鳳汝)씨가 나를 맞아주었고 그집에 들어갔다. 지금 나의 담배를 금하더니 맛좋은 담배 서너 개를 묶어 나에게 건네주며 말하길, “이것은 나의 동생 윤태여(尹泰汝)가 보내준것이다.” 연이어 말하길, “지난번 규상(奎祥)이 그대에게 보낸 것인데 만나지 못해 가지고 있다가 되돌려주는 것이다.”하였다. 그리고 “우리 집안에서 다공리에 사우(祠宇)를 중수했고 신주를 다른 곳에서 옮겨오면서 기문(記文)을 그대에게맡겼었다.” 그런즉 큰 의논을 할 수 있었는데 모두가 말하길, “그대에게물어서 결정했다”고 한다. 우리는 거제 선조 진사(進士)공이 처음입도(入島)했고 5세에 이르러 첨정공(僉正公) 형제 영상(榮祥) 흥랑(興良)공이 떳떳하게 임진난을 임하여 윤승보(尹承輔) 위패와 더불어다공리 사당에 모셔졌다. 그리하여 윤개보(尹玠輔, 윤승보의동생)의 두 아들도 배향되었다. 윤개보는 지금 하청으로 옮겨모시고 있으며 종중(宗中)의 사방 여론을 고려해 진사공(進士公)도 봉안(奉安)하기로 계획했다. “목패(木牌)를 몸소 만들어 그대의 뜻을 넣었으니 어떠한가?”나는 처음에 대답하지 못했으나 봉장(鳳丈)과의 깊은 인연으로 전날 하청의 일을 이에 서술하며, 말을해준 것을 또 말하면서 이러저러한 서술한 것들을 끝마친다.
옥씨(玉氏) 사당이 죽토리(竹土里) 양지촌(陽地村)에 있는데자신들도 어느 때 세운건지 알지 못했다. 죽토리에 건설한 옥씨들이 하는 말, 선대 옥찬헌(玉瓚獻 1694-1756)이 건설했다고다른 사람이 말하기도 하고 중년(中年)에 계중(季重)씨가 건설했다고도한다. 중년(中年)의 윤씨가의연금을 내어 사당에 제사를 올린 이후에 옥씨 또한 다수의 땅을 매입했고 또한 더하여 한 분의 신위를 배향했다.처음에는 유림(儒林)과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일을 의논했었다. 윤봉여씨가말하길, 구타를 당하여 횡사한 사람이었는데 어찌 유림이 제사로 받들 수 있는가? 대략 옥씨 선조로서 휘(諱) 신변(信卞)은 당시 임진난 때 의령에서, 왜인을 따라왜국으로 들어갔다가 절개를 지켰고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거제도에 도착해 죽토리(연초면)에 거주했다. 호(號)가 죽천(竹泉)이라 전한다. 그 자손들이 의심하여 사사로이말하기를, 다른 집안의 문자(文字)에서는 볼수 없었다고 한다. 횡사(橫死)한 사람은바로 옥삼헌씨였다.
옥씨 사당을 해마다 수리한 후에 죽천재(竹泉齋)에 현판을높이 거는 것을 중단했다. 죽계(竹溪) 강당에 걸은사람은 옥원로(玉元老)였고 또 옥계 강당을 정리한 사람은 옥세장(玉世章)씨였다. 어떤 사람이 말 하는 바, 죽계(竹溪)라는 것은죽토(竹土) 옥씨 종파의 조상 옥찬헌(玉瓚獻)씨 호(號)라고도 하고 또한 스스로 지어낸 사당 이름이라 하기도 하며 이에 그 자손의 이야기일 뿐이라고도한다. 심히 의아할 뿐이다. 당초에는 3위 신변(信卞) 찬헌(瓚獻) 삼헌(三獻)을 배향했는데죽계공(竹溪公)이 사당을 스스로 만들고 생전에 제향했다. 지금은무헌(武獻)씨가 추가로 향사되는 것을 배척했으나 온당치 않는 일이다. 혹시 다른 사람의 공통된 의견으로, “계중(季重)씨가 건설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 삼충사(三忠祠) 삼충사(三忠祠)는 임진난때 윤영상(尹榮祥) 신응수(辛應壽) 김희진(金希璡) 3장군을 모신 곳이다. 임진란 때 공을 세웠다. 어떤 공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두 녹권(錄券)이 있다하여 지난 때에 삼충사(三忠祠)를 지었다. 무엇인지 몰라서 나라에서 금하였다. 사적인 감실(龕室)에 각각의 조상의 위패를 받들어 모시는 것을 금하였다.동시에 김후석(金厚錫)은 고을을 지켰고 8년 동안 좌수(座首)였다고 전하는데 과연 그러했는지 (알 수 없지만) 고을 원과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직접 문자(文字)로써 정소(呈訴)하였다.
◯ 옥씨 한종족이 둔덕으로 이거했고, 임진난 때 오비리(烏飛里)에는 옥계성(玉桂成)이 금군(禁軍)으로 있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벼슬을 하던 옥고(玉沽 1382∼1436)는 자(字)가 대가(待價, 待售), 호(號)가 응계(凝溪)인데 대구판관(判官)으로써 안동 통판(通判)으로 옮겨청백리로 기록되어 묵계정사(默溪精舍)에 배향되었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 실기(實記) 중에, 옥사온(玉斯溫) 옥사미(玉斯美) 형제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한 가지가 분가되어 바다 섬에 흘러들어 왔다고 전한다. 오비 마을의 옥씨는 이에 그(옥계성) 자손이라 한다. 이때에 이르러 옥계성(玉桂成)이 망우당 곽재우를 도와 공훈을 세웠다고 전하며 오비리에 사당을 건립하고 조상의 제사를받들었다한다. [玉氏又有一種自屯德移居烏飛里壬亂時有玉桂成者禁軍也按麗末國初有玉沽字待價號凝溪以大邱判官轉安東通判錄淸白吏默溪精舍配享寶白堂金係行其實記中玉斯溫斯美兄弟而一枝流入海島中云而烏飛玉氏乃其子孫也至是以桂成隨忘憂堂立功云而建祠于烏飛而奉祀焉]
◯ 학동리에는진씨(陳氏)가 세거하고 있다. 오랜 옛날 진(陳) 도독(都督), 휘(諱)가 극일(克一)이라는 사람이, 성공의 자취가 있었던 연고로 사당을 세우고 봉안했다한다. 그 자세한사항은 알지 못한다. [鶴洞里有陳氏世居而古昔有陳都督諱克一者有成功之蹟故建祠奉安焉其詳未聞]
3) 거제도 칠원 제씨 이야기[世居說]
제씨(諸氏)의 본관(籍)은 칠원이고 거제도에서 거주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임진난때 칠원인(漆原人) 제말(諸沫 1552∼1593, 고성(固城) 출신)이 수문장(守門將)이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천거해 성주 군수에 올랐다가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 정조(正祖) 임금 때에이르러 황단(皇壇)에서 태양을 향해 하늘의 뜻을 홀연히 느꼈는데 그 자손이 방문했었다. 그리고 관아(官衙) 사이에 조선팔도로 공문(公文)을 보낸 것 중에, 고성군(固城郡)은 본디 제홍록(諸弘祿)이 당시임진난 때 전사한 일이 있었는데 제말의 조카이니, 임금이 이를 듣고,제말에게는 병조판서(兵判)을, 제홍록에게는 병조참판(兵參)을 추증하였다. 고성(固城) 제씨는 성주와 진주에서 인덕(仁德)을 갖춘사실이 명백히 밝혀짐으로 인하여 그 땅에 비석을 세웠고, 성주충렬사(忠烈祠)에 제말이주위(主位)로써 이사룡(李士龍)과 함께배향되었다. 나라에서 중지하라고 한 후에도 거제도 제씨는 하청리에 사당을 세웠고 제말(諸沫)이 주위(主位)로 향배했고제무상(諸武祥) 제홍록(諸弘祿)을 합하여, 제씨 옛 행적 3위를 살피게 되었다. 제홍록은 당시 임진난 때 여기 거제사람이 아니었다. 우연히 이름의글자가 같을 뿐이다. 고성군의 제홍록은 충무공전서에 여러 차례 보인다.여기(거제도) 홍록(弘祿)은 기해년(己亥年 1599년)에 태어났는데 임진난 때에는 더욱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 다음 글은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거제도 최고의 유학자였던,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1875∼1951)선생이 하청면에들러서 여러 이야기를 듣고 적은 것 중에 한 부분이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의 제자로는 거제도에서 유일한 분이셨다. 하청면 사환 마을은 김해 김씨가 대대로 거주하다가, 병수공(屛樹公)이 고향을 떠났다가 을사년(乙巳年 1605년)에 다시 돌아왔던 연유로 마을 이름을 ‘사환(巳還)’이 되었다고전한다. 또한 연초면 한내(汗內)는 옛 지명이한해(捍海)인데, 달성 서씨가 선조 경산공(耕山公) 이래로 쭉 거주해 왔다한다. 한내(汗內)의 한자어 뜻은, “땀(汗)을 흘러서 지켜낸 내해(內海)”이고, ‘한해(捍海)’는 “바다를 방어하던곳(지키던 곳)”이라는 뜻을 품고 있는데 고현성이 거제읍치였던조선초기에 붙여진 지명이다.
[ 하청면 실전리사환(巳還) 마을에 김해 김씨가 대대로 거주하고 있고, 그선조는 병수공(屛樹公)이라 전한다. 사당을 세워 집안에서 제사를지내는데 몇 개의 위패가 있다. 또 말하길, 임진난 전에고향을 떠났다가 을사년(乙巳年1605년)에 다시 돌아왔던연유로 마을 이름을 사환(巳還)이 되었다고 전하는데 실로 의심할 바가 아니다. 속명(俗名)은 사환(巳患)이고 언문으로는‘배암고지’(뱀이 많다는 의미, 배암구덕>배암구지>배암고지)인데지금까지 전해온다. 어찌하여 실전(實田) 즉 구읍지(舊邑誌)에 ‘실 바깥 포구(絲外浦)’ ‘실밧개’로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금 불리는 실전(實田)도 이에그 지명 유래를 추정할 수 있다. 한내(汗內)는 예로부터바다를 방어하는 곳이었다(땀을 흘러서 지켜낸 곳). 서씨(徐氏)가 거주하는데 지난해에 편지로 초청을 했다. 그선조 경산공(耕山公) 이래로 4~5대가 살아왔다고 전한다. 나는 처음 듣고 처음 보았는데 뜻밖의 일로 가서 보게 되었다. 사당을세우고 재실을 건립하여 5위를 봉안했고 옥국촌(玉菊村) 원로(元老)의 지도(指導)를 받았다. ]
실전(實田)마을은 본래‘실밭개‘ 즉 사외포(絲外浦)라 하였는데 실밭이 사전(絲田), 실전(實田)으로 바뀌어졌다하며 밭들이 많아 면화(綿花)와 대마(大麻)를 재배하였다는 곳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선무원종이등공신여막동(宣武原從二等功臣余莫同)이 마을을이룩하였다는 구전(口傳)이 있다.
사환(巳還)마을 하청의북쪽 용등산(龍登山) 밑에 위치하여 본래 뱀곶이 사곶(巳串) 또는 배암고지라하였는데 임진왜란을 끝내고 선무원종이등공신 김옥춘(宣武原從二等功臣金玉春)이 을사년(乙巳年 1605년)에 돌아 왔으니 사환(巳還)으로 불렀다.
◯ 사등면지석리(支石里)는 김해 김씨가 본디부터 부민(富民)이었다. 조상의 사당을 건립하여 거룩하게 떠받들고 있다고 들린다. 그 뜻이무언지 상세히 알지 못한다. [沙等面支石里金海金氏本富民也聞以何祖建祠崇奉耶未詳其意]
5) 거제시 연초면 연사리 이야기
◯ 정해년(丁亥年1947년) 초봄에 마당으로내려오다가 다친 우환으로 몸이 아파서 누웠을 때 연사리에 거주하는 손자 김치명(金致明)이 와서말하길, 그 문중에서 바야흐로 사당을 세우고 재실(齋室)을 지었다. 그 봉안한 이유를 듣고 알고 싶어 그래서 갔다. 나는 “그대 집안선조 중에 마음에 뼈저리게 느끼는 분 중에, 가히 불후의 행적을 가진,어떤 분이 계셨습니까? 문서로써 비길만한 것이 있습니까?”라고물었다고 한다. 손자 김치명(金致明)이 말하길, “다른 근거가 없지 않느냐” 제 스스로 지어낸 것일 뿐이다. 내(김계윤)가 말하길, “일찍이그 집안의 계보(系譜)를 보았는데 생원(生員)을 지낸분도 없었고 공(公)도 없었다고 인정했었다.” 지금 병이 없다면나의 집에 함께 가서 상세히 살펴보고 가르쳐주길 바라지만, 이와 같이 와병 중이라 감히 강하게 말하진못했다. 그 후에 손자가 며칠이 흐른 뒤, 그 일로 글을가지고 와서 말했다. 근년에 손자가 와서 이에 첨씨(瞻氏)라는 인물이었다고한다. 신체는 장대하고 음성은 웅장했다하며, 증손 양찬(亮贊)에게 함께 사당에 제사를 모시자고 했다한다. 여하간에 내가 말하길, 타인(他人)에게 어찌불가함을 말로 다 형용할 수 있겠느냐. 나도 알지 못하는 일이다. 여하간에 창성한 글로 적은 패(牌)를 생각하며 내가 말하길, 만약에 생원공(生員公)을 제사를 올리기로 하고 혹은 국자생원(國子生員)이 맞다하더라도글을 쓸 수는 없다. 기타 호(號)도 없고가칭 관리로써 남긴 이름도 없고 불후의 행적도 없다. 타인이 어찌 입을 함부로 놀리겠느냐? 다른 어느 날에 말없이 따라 가보니 옥문초(玉文初)라고 하며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사사로이 봉안한다고 하는데 어찌하랴.
◯ 7월 연사리 윤익소(尹益素)군과 나는매우 친분이 가까웠다. 소상일(小祥日 만1년 첫 제사)에 간다기에, 밤에 신주칠(辛周七)의 집에서유숙했고 다음날 아침 신주칠의 집에서 나와서 신씨 문중이 건립한 사당을 보았다. 사실 신씨 문중의 신응수(辛應壽)는 임진난 때 거제도 3장사 중에 한분으로삼충사(三忠祠)에 모셔져 있는데 다시 거제 땅을 회복코자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는 못하였다. 그밖에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말하길, 집집마다 모조리 자손들이 스스로 한 일이다. 타인이 하기 싫은 것에간섭하듯 하면 자손이 망령된 짓을 하게 되니, 혹시라도 조상을 욕되지 않게 하라. 또한 상량문을 보았는데, 더구나 신주병(辛周柄1910년대 하청면장)의글씨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 크게 한바탕의 우스개에 부칠 만도 하였다.
◯ 이 고장에는거제(巨濟)가 관향인 반씨(潘氏)의 오래된집안이 있다. 고려의종이 방폐(放廢)되었을 때, 반(潘)씨 신(申)씨 빈(賓)씨 삼정승(三政承)이 따라왔다고 가요(歌謠)와 이언(俚諺)으로 대대로 전하고 있다. 그 근거는 아직보지 못하였지만 틀림없다 한다. 국사봉(國士峯)에는 반시중의묘가 있고 고려 중기에 세운 비(碑)에 시중(侍中)이라는 정승(政承)이라 적혀있다. 반우향(潘佑享) 반부(潘阜) 모두 거제반씨 집안의 이름난 분들이다. 이와 같이 이름도 없는 다른 집안과 비할 바 아니니, 나라의 큰 공훈을 세운 뛰어난 집안의 부조묘(不祧廟) 사당을 세우길논하였다. {거제도 문절사(文節祠) 건립}
◯신(申)씨는 아주(鵝洲)가 관향이다.지금의 아주촌인데민간의 구전으로 전한다. 신씨(申氏)의 묘가있는데 비석이 뽑혀 있다. 다른 사람이 장사를 지냈던 연고이다. 신씨를잘 알지 못해 누차 찾아보았다. 지금의 청송 의성 등지를 두루 다녔다.신씨는 과거에 합격해서 끊임없이 성대하게 살았던 가문이다.(거제도에는 아주 신씨 집안이남아 있지 않다) 나는 일찍이 의성(아주 신씨 세거지)에 갔을 때 신씨를 만났다. 그리고 그 사실을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다. 또한 모른다고 말하며, 어찌 관향에 대해 뚜렷한 증거도 없이 구전으로 말할 수 있겠느냐 했다.
◯ 빈씨(賓氏)는 (유적이나 후손)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여러해 전에 지석리(사등면)에 빈씨 한 분이 살고 있었다고 전하나 그 진위를 알 수가 없다.[此賓氏無聞而年前支石里有賓氏一人云者亦未知其眞也] (현재 2017년 거제도에 몇 집이 거주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연도에 있는벗에게 부침[寄友人在燕都]>거제 반씨 시조 반부(潘阜 1230∼?) 몽고 사신으로 갔을 때 고향을 그리며 지은 칠언절구 임. 黃楡塞外但回頭 황유새 밖에서 다만 머리 돌리나니 不覺飄然兩鬢秋 두 귀 밑에 가을이 드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네 速返庭闈長獻壽 빨리 정위로 돌아와 길이 축수 드려라 相逢不惜萬金裘 서로 만나면 만금 갖옷도 아끼지 않으리 [주1] 황유새(黃楡塞) : 중국 동북방에 느릅나무가많이 자생함으로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북쪽 변방을 뜻한다. [주2] 정위(庭闈) : 부모가 거처하는 방이라는뜻으로, 여기서는 고려의 고향에 사는 부모.
[주3] 반부(潘阜 1230∼?)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거제(巨濟) 반씨(潘氏)의 시조. 자는 군수(君秀), 호는 해려재(海旅齋).1267년(원종 8)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이장용(李藏用)이 고려에 왔던 몽고의 사신 흑적(黑的)에게 글을보내 일본과 통화(通和)하지 말 것을 청한 것이 문제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그 때 그것을 고하지 않은 죄로 채운도(彩雲島)로 유배당할뻔했는데 흑적의 만류로 무사하였다. 그리고 그 해 고려원종 9년(1268),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기거사인(起居舍人 종5품)으로 일본에 통화를 요구하는 몽고의 국서와 고려의 국서를 가지고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몽고의 국서 내용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반 년 이상 억류되었다가 답서를 받지 못하고이듬해 돌아왔다. 이에 몽고는 일본이 통화를 거절하는 것을 의심하고 다시 추진을 촉구하였다.
따라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신사전(申思佺), 시랑 진자후(陳子厚) 등과 함께몽고 사신 흑적·은홍(殷弘) 등을 인도해 일본에 갔으나, 대마도에 이르러입국하지 못하고 왜인 2명을 사로잡아 이듬 해 돌아와서 몽고에 보냈다.
1270년 비서승(祕書丞)이 된 그는 강화창(江華倉)을 풀어군신(群臣)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274년에는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서해도(西海道)에 가서전함을 만들 공장(工匠)과 역도(役徒)를 징집했는데, 마침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함 300척을 만들 것을 심히독촉하던 중이었다. 그 해 지병마사(知兵馬事) 나유(羅裕)와 박보(朴保)의 부사(副使)가 되어 제1차 일본정벌에 참전해 이키섬을함락하고 북구주(北九州)를 치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많이 부서져 되돌아왔다.1280년에는 궁궐에서 왕과 더불어 시를 짓기도 했다.
1281년(충렬왕 7) 좌사의(左司議 정4품)로왕명을 받아 제2차 일본정벌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원나라의 원수 흔도(忻都)와 홍다구(洪茶丘)·범문호(范文虎) 등을 위로하였다. 1282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원(試員)이 되어시부(詩賦)로 38인,십운시(十韻詩)로 51인,명경(明經) 2인을 뽑았다. 그리고 1284년에는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승보시(升補試)의 시원이 되어 시부와 경의(經義)로 33인을 뽑았다. 경상남도 거제의 문절사(文節祠)에 제향되었다.
◯ 거제 반곡서원은바로 송우암 시열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인데 그의 문인인 김(죽천) 진규가연이어 귀양 왔을 때에 사원건립을 계획하였다. 서원 건립의 사업은 한양에 맡겨져 있었고 본향(거제)에서는 김일채, 윤도원, 옥삼헌 세 사람이 이 고을의 별유사로 있었을 뿐, 내가 일찍이 살펴보건데, 우암이 을미년(1679년)에 귀양 와서 경신년(1680년)4월에 이르려 사면되어 돌아갔으니 아마도 경신옥사(1680년) 때인데 그렇다면 류대장, 이판서,윤찬성이 죄 없이 억울하게 옥에 갇힌 때 인듯하다.
김일채의 후손은 지금 알 수 없고 윤, 옥두 분의 후손은 별유사의 후손으로 노당(노론)에 몸을 맡기고있으며, 대구 남산의 서씨 낙재 사원의 후손인 재진이 일찍이나에게들려 함께 유숙하며 말하기를, "그의 종선조 승태가 거제수령으로 있었을 때 승석당을 지어서강학하는 일이 있었으니 아마도 우암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 칠천도대곡리에 최씨가 살고 있다. 그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여하간에 살림 형편이 넉넉하다. (그의 선조는) 임진년 계사년(임진왜란 1592~1593년) 사이에 하동군(河東郡)에서 최고운(崔孤雲)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일이 있었다. 이후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내려왔을때 거제로 이주했고, 이종란의 유서(遺書)로 대곡리로향해 와서, 최영제는 부자로 명성을 이루었다. 면암(勉庵)의 문하생 최영제는 자(字)가 성유(性攸)이다. 면암(勉庵 최익현)을 찾아가 뵙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면암의 문인(門人)이 된 것이다. 처음 만나 서로 허물없이 친하게 되었고 배움이 더 진전되었다. 어찌경사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호(號)가 방당(方塘)인, 그 아들 용기(容基)는 갑오식(甲午式) 갑술과(甲戌科)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었다. 세자와 동연배 진사였다고 한다. [七川島大谷里有崔氏居之未知其來歷之如何而家勢饒富壬辰癸巳間河東郡崔孤雲影幀奉安事崔勉庵益鉉下來時自巨濟移居之李鍾蘭遺書于大谷里崔富人榮綈以致名于勉庵榮綈字性攸往見勉庵而因爲門人原原相從而學益進焉蓋慶崔也號方塘其子容基以甲午式甲戌科榜得進士焉世子同年事進士云]
7) 거제도 의성 김씨
저의 문소(聞韶, 경북 의성)씨 김류락(金流落)은 거제에서 또한 오래된 집안이다. 일운면망치 와현에 거주하는 친족이 두 군데 있다고 의심된다. 나의 8대조부는 공주(公州)로부터 집안의 재앙으로 인해 잇달아 옮겨와 거제에 이르렀다. 혹은 이르기를, 이씨(李氏) 할머니 무덤을고령(高靈)으로부터 옮겨 왔다고 전하나 알 수 없다. 어남부군(御南府君)은 13세 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이다. 망치에서 글방을 열어 붙어살다가 모두 죽었다. 그래서 계모 아래에서견디지 못하여 명동리로 옮겨왔다. 고씨(高氏) 집에서 처가살이하며살아갔다. 그런즉 계모 슬하의 아우들은 망치 등지에 있을꺼라 생각된다.다음으로 가경4년(1799년) 망치에 김취방(金就芳) 집이 제법살림이 넉넉했는데, 어린아이들을 족보에 올리지 못하다가 그 후에 호적에 올리고자 와서 빌었다. 나는 종증손(從曾孫) 대부(大父) 휘(諱) 김윤중(金允重)씨를 김취방(金就芳)과 함께그 족보를 빌려와서 올려주기로 허락하였다. 서울에 있던 각 영문(營門)에서 임금의전교를 받아낸 연유로 수교()의 초두(初頭)에 김윤중(金允重)씨가 대표가 되었다. 덕포(德浦) 망치(望峙) 와현(臥峴)의 친척들은 그 전에는 없었던 족보에 비로소 올리게 되었다. 별도로 만든 족보를 의논해서 만들었고 한 책 중에 나의 7대조 휘(諱) 김함의(金銜依)가 그 집의호적이 되었다. 또한 그 전에 나를 붙들어 머물게 하던 중에, 혹은유숙하던 중에, 망치 와현 사람들이, 한손(漢孫) 한발(漢發) 집안이 아니었나생각했다고 한다. 행여나 여기 한발(漢發)이 어남공(御南公)의 아우였다 하더라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에족보를 고칠 때 빛나는 집안으로, 앞서 김우서(金禹瑞)를 별도의족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에 성씨에 형통하여 전과같이 시행했고 어남공의 아들이 기특하게 밝혔다. 망치 와현은 조상의 한 갈래였다. 나는 일찍이 어남공(御南公)이 응한 여기 생자(生子)가 의심스러워, 망치에 거주하는 종친에게 보낸 일은 귀에 익숙한 삼종현(三從兄) 김사안(金士安)씨가 처리했다. 이씨 손씨가 강행을 한 시어머니와며느리의 묘를 서로 판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러 대에 걸쳐 의아해하면서 산소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다가, 여러 친족이 억지로 제사를 지낸 연유로 인해 부득이하게도 단표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논하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마땅히 옳다 여겨진다.
(번역) 아주(鵝洲)는 거제(巨濟)의 속현이다. 지금거제부(巨濟府) 아주현(鵝洲縣)에 여전히 많은 신씨들이 있다고 한다. 혹자가 이르기를 ‘한산(韓山)의 옛 이름이아주(鵝州)이니 신씨의 선조는 아마 한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한다. 그러나 ‘주(州)’ 자와 ‘주(洲)’ 자는 진실로 같지 않다.
살피건대, 퇴계 이황 선생이 일찍이 참봉 신춘년(申椿年) 어른의 묘갈명을 지으면서 “공은 거제(巨濟) 사람”이라고 하였고우리 할아버지 고송(孤松) 부군의 사마방안(司馬榜眼) 인쇄본에 “본은거제(巨濟)”라고 적혀 있으니, 아주(鵝洲)가 거제 지역임은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옛 전적을 보면 혹 거제(巨濟)로 적거나 혹 아주(鵝洲)로적어서 번갈아 쓰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종친[闔族]들이 혹 본을 거제로 적는 이가 없고 아주(鵝洲)로만 칭하여 마치서로 상의한 듯하니, 이것이 어느 세대부터 시작되었는지모르겠다. 또 선배가 손수 쓴 시전(詩牋), 제명(題名)과 같은첩(帖)들을 보면 더러 ‘매성후인(梅城後人)’이라고 칭하였으니, 혹 거제현이 일명 매성(梅城)으로불렸는지 이 또한 모르겠다.
살피건대,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부인이 바로 아주 신씨(鵝洲申氏)인데 ‘주(洲)’ 자가 더러는 ‘주(州)’로 적혀 있다. 포은집(圃隱集) 에 실려 있는 「포은문과방목(圃隱文科榜目)」에 “신인보(申仁甫)가 병과(丙科) 1인으로 발탁되었으니, 그 관향은 아주(鵝州)이다.”라고 되어있는데, ‘주(州)’자또한 물 수[水]를 쓰지 않았다.
알 수 없으나 이 또한 거제(巨濟)의 아주(鵝洲)인데, ‘주(洲)’ 자와 ‘주(州)’는 음이 같고 글자가 서로 비슷하므로 이내 잘못 쓴 것을 면치 못한 듯하다.아니면 별도로 하나의 신(申)씨가 한산(韓山)에서 나온 것이 있는데, 저대로한산의 옛 이름으로 관향을 삼은 듯하다.
혹자는 “아주(鵝洲) 성씨는 본래평산(平山)에서 나뉘어져 나온 것으로, 모두 장절공(壯節公, 평산신씨 신숭겸)의 후손이다.”라고 하는데, 그 말이 또한 이상할 것은 없으나 근거할 만한 믿음직한 전적이 없다. 마땅히박아(愽雅)한 군자를 함께 기다려 다시질정해야 할 것이다.
신해년(1791)에 아주 후인 신체인(申體仁, 1731~1812)이 병들고 죽을 나이에 근본과 시조를 미루어 생각하여 세계(世系) 한 통을 만들고, 사실과 관련된 글을 대략 덧붙여 본관과 고을을궁구하여 논하고 후인들에게 고칠 수 있도록 하노라.
*오후에 거칠게 번역하면서더 다듬지 못하고 올린 점 양해 부탁드리며 간단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신체인 선생은 아주(鵝洲)는 거제의 속현이며 ‘주(州)’ 자와 ‘주(洲)’자가 분명히 다른 것이라 하여,한산(韓山)의 아주(鵝州)와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습니다.역대 전적에서 간혹 아주(鵝州)라고 쓴 것이있는데 이는 혼용해 것으로 추정하였고, 본관 아주의 한자는 물 수와 주 자가 붙은[氵+州] 아주(鵝洲)로 쓰는 것을바람직하게 여긴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세종지리지 를 찾아보니 역시 아주현(鵝洲縣)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끝으로 ‘아주(鵝洲) 성씨가 평산(平山)에서 나뉘어져 나왔다’는혹자의 말에 대해서는 신체인 선생은 ‘가능성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는뜻을 내비치며 적극적인 단정은 보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