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1875∼1951) 선생은 일제강점기, 거제도 유림을 대표했던 유학자(儒學者)이자, 한문학 문집을 남긴 문사(文士)였고,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록(門下錄)에 제자로기록되어 있는 거제도 출신으로는 유일한 분이며, 거제도 성리학의 정통(正統)을 계승한마지막 한학자(漢學者)였다.
●한시(漢詩)란 글자그대로 말하면 한문으로 쓰여 진 운문(韻文) 형식의 글이지만, 중국의 것 뿐 아니라 주변한자문화권에서 쓰여 진 한문의 시(詩) 전체를 뜻한다. 한시(漢詩)의 본질(本質)은 본질적으로 성정(性情,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서나 정감)을 읊조린 것이며, 사물에 접해서 감흥(感興)되고 고양된 정감(情感)을 표현한 형식을 뜻한다. 시(詩)는 뜻(志)을 말하는것이며, 노래는 말을 읊조리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를 빌어서표현한 시(詩)라 하더라도 한어문법(漢語文法)에 맞는 한어(漢語)와 한시형식(漢詩形式)을 갖추어 쓰지 아니한 시는 한시가 아니다. 또한시(詩)란 시인(詩人)의 자아(自我)와 사물(事物)의 대상(對象)이 서로 엇갈림(交錯)에서 이루어진 심상(心像)을 운어(韻語)로써 읊조리고, 형상화(形象化)하여 표현(表現)한 것이다.
명계(明溪) 선생은 유학자(儒學者)이자 한문학(漢文學)을 남긴거제도의 문인(文人)이다. 나라를 잃은 일제강점기에 사람들의 염치(廉恥)와 도의(道義)가 사라지고미증유의 난국 속에서도 성현의 도(道)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이 땅 거제도의 석학(碩學)이었다. 면우(俛宇) 곽(郭) 선생의 성리학적인학문세계에 입문하여 성리설(性理說)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한 거제도 마지막 정통 유학자(儒學者)이기도 했다. 또한 그가 남긴 『명계유고(明溪遺稿)』에 실린총 464편 중에, 선생의 글이 446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한시(漢詩)가 265편 실려 있고 나머지 서간문(書簡文) 83편, 제문(祭文) 47편 등 산문(散文)이 약 180편 정도가 실려 있다. 특히 한시(漢詩)는 5언시(五言詩)가 10편이고 나머지 255편은 전부 7언시(七言詩)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총 265편 시(詩) 중에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시(輓詩)가 106편을 차지한다.
명계 선생은 젊은 시절에송나라 시대 문인(文人)인 소식(蘇軾, 蘇東坡)의 문학을 동경하였다. 소식(蘇軾)은 황주에서부인이 양잠을 했고, 그는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그는 이땅을 '동파(東坡)'라고 이름 붙이고 자신을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칭했다. 명계 선생도 이러한 이유로 소식(蘇軾)을 닮고 싶었고, 조용한 명상리 마을에서 부인과함께 오순도순 살아가길 원했다. 그러나 당대 거제도 최고의 유학자가 은거(隱居)하며 살수 있도록 주위에서 그냥 내버려 두질 않았다. 먼저 집안의 족보나 계통 등을 수정 정리하기 위한 인물로는그 밖에 없었고, 또한 거제를 대표해 경상도 일원으로 나아가 유사(儒事)를 처리할 수 있는 유림(儒林) 중에 한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중국 산문의 대가이며 탁월한 시인이었던 한문공(韓文公, 韓愈 768~824)의 사설(師說) 문장을 생애동안 읽었다. 성리학의 기초를 놓았고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던 그를 동경하였다.
1915년 41세 늦은 나이로, 면우 스승의 제자로 입문하여 가르침을 받고부터 그는 삶의 방식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전까지는 뜸했던 글쓰기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금유고집에 전하는 글 대부분이 이때부터 쓴 글들이다. 그리고 경상도 여러 유명 유학자와 교류가 시작되어, 안목과 견식이 넓어지고 높아졌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유교철학에대한 이해의 폭이 크게 증가된 점도 괄목할 만하다. 선생의 한문학은 유학자로서 ‘문(文)을 통하여도(道)에 들어간다(因文入道)는 하나의 방법론에 그 의미를 두었다. 그래서인지회한(悔恨)과 성찰(省察)은 물론 학문적인 요소(要素)가 강하게 스며들어 있다.
명계 선생의 글을 찬찬히읽어보면, 그는 문학의 본질이 옛날 선현들의 저명한 문장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도덕을 닦고 확충하는 차원에서 드러나는 표현일 뿐이며, 아울러실용성을 갖추지 않고 현란한 수사적 미사여구(美辭麗句)만 늘어놓는 바를 심히 경계를 하였다. 그래서그런지, 선생의 한시는 하고픈 말을 담백하게 표현하다보니, 곁가지와온갖 기예(技藝) 없이 구성되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시문(詩文)은 마음의성음(聲音)이니 그 사(辭)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문장(文章)이란 천지의정화(精華)이고 인심(人心)의 성기(聲氣)“라는 면우 스승의 말에 충실히 따른 것이기도 하다. 문(文)은 효용의가치가 있는 것이라야 진정한 문학이라고 본 것이다. 학문의 깊은 온축(蘊蓄)에 힘써야 할 유학자가, 시문을 통해 겉으로만화려(華麗)한 수식어만 늘어놓고 마음을 방탕하게 하는 도구로 전략할 수 있다면서, 재주를뽐내고 허황된 습관에 빠져 아까운 정력을 낭비하는 것을 무척이나 경계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질빈빈(文質彬彬)이나 수사입성(修辭立誠)을 바탕으로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하며(知人論世), 존양성찰(存養省察)할 수 있다면, 세련된 수사(修辭)와 내면의충만한 도덕(道德)으로, 잘 이루어진 문장을 추구하는 것이 문학이 추구해야할 본질적인지향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학자가 문장에만 빠져 본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지론(持論)이고, 사회참여적인 실용성을 가진 시문이야말로 문학이 추구해야할 참 가치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의 글을 깊이 탐색(探索)해 보면, 면우 스승에게 입문하여 직접 가르침을 받은 영향이 아주 컸다. 그런고로‘말과 글은 꽃(華)이고 학문을 실천함은 그 열매(實)다’라는 교훈을 평생 실천하였고 그 꽃(華)이 의미 있는 열매로 결실을 맺을 때야만 빛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시편이 학문의 깊은 온축(蘊蓄)에 바탕을 두고 반드시 실용성을 가져야한다면서, 자신을성찰하였고, 더불어 암울한 시국을 걱정하며 탄식과 한탄이 쏟아지고 있다. 이에 그 내용에서 인간 삶의 교훈을 직설적으로 읊고 있는 특징을 띠고 있다.때론 염세주의에서 허무주의로, 그리고 식민지 현실과 궁핍한 가정형편, 거기다가 다리가 붓는 고질적인 병으로 말미암아, 회의주의적 성향을짙게 드리우기도 한다. 그렇지만 선생의 글은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식견의 올바름과 실천의전일함이 깃들어 있다. 자신의 마음을 집중하고 의리를 실천하려는 사명을 띠고 있으며, 실(實)을 추구하고 구도(求道)의 과정을 읊고 있다.
선생의 시편 대부분이 7언시(七言詩)로 구성되어 있다. 7언시(七言詩)를 더 즐겨썼던 이유는, 창작의 과정에서 결국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내면의 도덕을 확충하는 존심(存心)의 공부이지, 기예를 좇는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장에 나타난 말이나외견(外見)이 좋고 내용이 충실(充實)하여 잘 조화를 이룬 상태와 더불어, 말을잘 갈고 다듬어서 자신의 정성을 나타내어 자기가 뜻한 일을 이룬다는 점을 중시했고, 또한 선생은 ‘사달이문성(辭達而文成)’ 즉, 말은 그 뜻이 상대(相對)에게 전달(傳達)되도록 문장을 이루기에는, 5언시 보다 7언시가 더 적합했던 이유였다. 게다가 만시(輓詩)가 106편이나 되는 것은, 거제지역의 유명한 유학자로서 관혼상제 등에꼭 초대되어가, 전통예법을 일러주었던 이유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외 의성 김씨 문중 일로 출타하거나 동문들을 만나려고 가는 중에, 잠시 머문 고장에서 적은 시편과, 각종 시사(詩社)에 참석하여 지은 시(詩), 그리고 거처인 명동리(明洞里)에서 감흥과 소회를 읊은 시편은 물론, 거제도여러 곳에서 문우(文友)들과 어울러 지은 한시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명계유고에는 운문(韻文)인 한시(漢詩)가 265편이 있고, 기타 산문(散文)이 181편이 있는데, 그 중에 서간문(書簡文) 총 83편은 모두 일제강점기 시절에 쓴 글이다. 편지글의 대상은 당대의 이름난 유학자와 독립운동가, 그리고 문중종친과 거제도 지인들이었다. 그 중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성와(省窩) 이인재(李寅梓), 김세동(金世東),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회숙(晦叔) 송원구(宋元求), 겸와(謙窩) 곽대연(郭大淵), 중재(重齋) 김황(金榥) 등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당대의 석학들이었다. 명계선생은 수신자 주변의 안부를 묻거나, 자신의 주변 소식과 근황, 그리고자신의 의견을 전달했고 또한 학문적 의견을 질문하거나, 서로 교환하기도 했으며, 몇 편의 편지에는 논설적인 글도 있다. 한마디로 선생이 타자(他者)와의 학문적사적 소통의 매개체로 활용한 수단이 서간문이었다.
○ 선생의 시편 내용을간략히 살펴보자. 선생이 봄날의 흥치에 못 이겨 표현한 ‘춘흥[春興]’에서, “태양이 햇볕을 실어와 천지에 봄이가득하고 가는 곳마다 두견화 만발하니 나비가 향기를 훔친다. 비를 머금은 복숭아꽃 활짝 피니 붉은 시냇물흐르고 바람에 춤추는 버들가지가 담장을 스치니 푸른빛 더하네.“(春滿乾坤日載陽鵑花處處蝶偸香笑桃含雨紅流水舞柳逢風翠拂墻)라며, 연초면 명동리 산골짜기의 아름다운 봄을노래했고, 해방 후에 이념 대결의 장이 되어버린 조국의 시국을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나라를 건국함에 허명(虛名)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백성은 와글와글 시끄럽고 정(情)을 결정하지 못하네. 사해(四海)의 풍조(風潮)가 천고(千古)에 사나운데언제쯤 하늘의 태양이 만방을 밝히려나.“(建邦無實有虛名百姓嗷嗷未定情四海風潮千古甚幾時天日萬方明)라며 탄식하기도 했다. 또한 우국(憂國)의 선비로써유구한 이 땅의 유학자로써, 그리고 먼저 가신 스승의 제자로써 충절의 기개를 한껏 읊었다. ”고상한 봉황은 주림을 참을지언정 어찌 곡식을 쪼겠는가? 외로운소나무는 차라리 꺾일지언정 서리를 걱정하진 않는다.“(高鳳雖飢焉啄粟孤松寧折不憂霜) 문(文)도 학문도 도덕도 사라진 암흑세상을 투시하며 절망적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더하여, ”철새가 어지럽고 떠들썩한 봄을 따라가지 못하는데 새 것은옛 것과 어긋나니 자재인(自在人)으로 살아야한다(不隨候鳥亂噪春守舊違新自在人)“ 연일 어지러운 시국을 돌아보며, 모든 경계에휘둘리지 말고 서로 양보할 줄도 알아야 자신의 신념도 지킬 수도 있다며 ‘자재인(自在人)’이 되길 바랐다. 그의 시편 내용은 대부분성리학의 교훈적인 글귀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이에, 처음공부를 시작하는 제자에게 시(詩)를 통해서, ”평생 분수를 지키면 세속의 시비가 멀어진다(守分平生遠是非).” 그리고“배움의 길도 속성(速成)으로 하려 하지 말고 차근차근 닦아 나가야 한다(盈科而後進).“고 당부하였다.
곧 명계 선생은 일상적인인간관계 속에서 떠오른 정서를 시(詩)를 통해 토로하고, 학문을 실천함은 물론,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고, 지역민과의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했음을 알수 있다. 문학의 본질이 특정한 시대의 저명한 문장가의 글쓰기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도덕을 닦고 확충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며, 또한그 시대 국가의 치란(治亂)과 인간 도(道)의 득실(得失)과 사회문화나 분위기를 알게 해주는 치세(治世)의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상의인물을 평가하고 세사(世事)의 득실을 논하며, 풍속을 더 낫게 고쳐서 세상을 좋게 하는 기능을담당할 수 있어야 진정한 문학이라고 여긴 것 같다. 즉 말을 다듬어서 정성을 이룬다는 수사입성(修辭立誠)이 문학의본질로 본 것이다. 그런고로 그의 시(詩)는 청절(淸節)하고 운치(韻致)가 있어서 세속에 찌들지 않았고 그의 문(文)은 순정(醇正)하여 속되지 않고 담박(淡泊)하게 늘어놓았다.
명계(明溪) 선생은 거제도한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의 『동록문집(東麓文集)』과, 중부 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던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 1764~1845)의 『곡구집(谷口集)』, 그리고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1875∼1951) 선생이 남긴『명계유고(明溪遺稿)』는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하는 거제도 한문집이며, 동록(東麓) 곡구(谷口) 명계(明溪) 세 분은‘거제3대 한문학(漢文學) 문사(文士)’이자 유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