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향약후(書鄕約後)」는 경상도(慶尙道) 의성현(義城縣)에서 신원록(申元祿 : 1516~1576)이 향약을 제정하고 작성한 서후(書後)이다. 그는 스승이황(李滉)이 1556년에제정한예안향약(禮安鄕約)을 모방하여 1560년에의성현에서 실시할 향약을 제정하였다. 이때 제정된 향약의 말미에 수록하기 위해 작성된 서후에는 향약제정 과정과 그 의의가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의의〕
조선 중기향촌에 사회 경제적 기반을 둔 사림은 중앙 정부와 관권의 지나친 통제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향촌 사회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지향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향약이 등장하였다. 16세기 중반예안향약의 성립 이후, 그영향으로 경상도 지역에서 향약이 확산되었다. 이황이 향약을 제정한 후 그의 문인들이 이를 다시 각 고을의 실정에 맞게 수정하여 여러지역에서 시행하였다. 신원록이 제정한 향약의 전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서향약후」를 통해 16세기중반 영남 지역의 향약 시행 양상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미 향약을 도입하였으나, 기존의 향약이 무력화되었던 의성현 지역에서 이를 계기로 새롭게 향약이 제정되어 향촌의 자치 규약이 기능하게되는 사례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자료이다.
[내용 및 특징]
경상도의성현(慶尙道義城縣)의 유학자신원록(申元祿)이 의성에서 실시하기 위해 향약을 제정하고 작성한 서후(書後)이다. 「서향약후書鄕約後」에는신원록이 향약을 제정하게 되는 과정과 그 의의가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고, 정확한 작성 연도는 연보(年譜)를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그의 연보에 따르면도산(陶山)에 기거하고 있던퇴계(退溪)를 뵌 후 1559년 의성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봄유희잠(柳希潛)과 의논하여퇴계가 손수 편찬한 향약을 바탕으로 새롭게 규약을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당시유희잠(柳希潛)은의성현에 유배와 있던 유학자였는데, 이를 미루어 보아 서후(書後)의 작성연대는의성현에서의향약을 제정한 1560년임을 알 수 있다.
본 서후(書後)는 당시 제정된 약조의 말미에 수록된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 규약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서후(書後)에서는 먼저의성에 향약이 오래전부터 실시되고 있었지만, 다년 간 중단된 상황이라 하였다. 구체적인 형식은 알 수 없지만 1560년 이전에 이미의성현에서 향약이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의내용은 연보와 동일하다. 陶山의퇴계를찾아 뵌 후 손수 편찬한 향약을류희잠과 의논하여 새롭게 제정했다는 내용이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의 4조(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를 강(綱)으로 삼고, 퇴계의 벌목(罰目)을그 아래에 부기했는데 죄질에 따라 3등으로 나누어 조목(條目)으로 삼았으니, 대략 30여 조가 된다고 하였다. 말미에는의성현의 여러 인사들에게 향약의 독실한 수행을 당부하였고, 모두에게수락을 받았으며 그 전말을 쓰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신원록이류희잠과 의논하여 제정한 향약은퇴계(退溪)가 자신의 고향인경상도예안현(慶尙道禮安縣)에서 실시하기 위해서 1556년제정하였던 예안향약이다. 흔히 퇴계향약이라 불려 지는데 『퇴계집 退溪集』에 「향입약조서 鄕立約條序」란제목으로 서문과 규약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며, 모두 과실에 대한 조목(條目)으로 이루어져 있다. 퇴계가향약을 제정한 후 그의 문인들이 이를 다시 첨삭하여 경상도 각 고을에서 실시되었는데, 퇴계의문인이었던신원록역시 한동안 중단되었던향약을퇴계가 제정한 향약으로 새롭게 정비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16세기 중반 영남 지역의 향약 시행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16세기 중반 영남의대표적인 유학자인退溪는 1556년 성리학적 생활규범이반영된 향약을 고을의 자치 규정인 향규(鄕規)에 접목시킴으로써, 향촌 내 재지사족들의 자기 규제와 교화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퇴계향약또는 예안향약이라 불리는퇴계의 향약은 곧 그의 문인들에 의해 영남 각 고을로 확산되었다. 당시퇴계의 향약은 벌목(罰目), 즉 과실에 대한 처벌 규정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퇴계의학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고을의 사족들은 퇴계향약을 모범으로 하여 조선후기까지 향약이나 동약(洞約), 족계(族契) 등 각종향약 조직의 규정에 접목시켜 시행해 나갔다. 16세기 중반의성현에서도신원록에 의해퇴계의 향약이 시행되었으며, 이후의성현에서 시행되는 여러 향약의 모범으로서 많은 영향력을끼쳤던 것이다.
주1) 유희잠(柳希潛) (1596~1671) 증 가선대부호조참판. 안동 지방에 살고 있는전주류씨는모두 류복기 후손들이다. 류복기는 류유잠, 류득잠, 류지잠, 류수잠, 류의잠, 류희잠 등6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의 후손이 임동면 수곡리(무실)을 근거지로 임동면 박곡리·마령리·고천리, 삼산동 등에 취락을 이루고 세거하게 되면서부터 자손이 번창하고인물이 이어져서문과 출신 10여명, 생원 진사 30여명, 문집 출간 100여명에퇴계학통을 계승한 도학(道學)과예학(禮學)의 대가가 배출되고 행실과 문학으로 이름 있는 선비가 끊이지않아 이 지역의손꼽히는 명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나주목사를 지낸 류정휘, 밀양부사를 지낸 괴애 류지, 청백리에 오른 함벽당 류경시, 공조참의 용와 류승현, 형조참의 양파 류관현 대사헌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 등은 밝은 치적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또 백종암 류직, 호곡 류범휴, 대야 류건휴, 노애류도원, 호고와 류휘문, 수정재 류정문 등은 사림의 존경을받았다. 또 상변통고 22권 등 많은 저서를 남긴 동암 류장원과 50여 권의 문집을 남긴 정재(定齋)류치명(柳致明)은 영남 유학의 거봉으로 퇴계학맥의대표적인 학자이다.
주2) 여시향악 : 1076년 산시 성[陝西城]의 학자인 여대균·대충·대방·대림 4형제가 향약을조직하고 그 규약을 기술한 것이다. 원래 〈향약〉 1권,〈향의 鄕儀〉 1권이었는데, 남송의주희가 내용을 수정하여 〈주자증손여씨향약 朱子增損呂氏鄕約〉을 완성했다. 주된 강목 '좋은 일은 서로 권장한다,는 잘못은 서로 고쳐준다, 사람을 사귈 때는 서로 예의를 지킨다,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 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518년(중종 13)에 김안국이 이를 언해하여 〈여씨향약언해〉를 간행한 바있다.
申元祿의 문집인 『悔堂集』 卷2 雜著 九에「書鄕約後」란 제목으로 수록
『退溪集』, 李滉,
『悔堂集』, 申元祿,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義城郡誌』, 義城郡, 義城郡誌 編纂委員會, 1998
[원문 텍스트]
書鄕約後
韶之有鄕約古也不幸中廢多年風俗日渝思與鄕人同志復修條約古今異宜鄭重而未及
焉往歲在陶山見先生手定鄕約立條本意謹嚴有節度不待設教而教在其中眞厲世之藥
石也余竊忻慕于心歸而告柳公希潜議修鄕約取呂氏四條爲之綱以陶山所編罰目附其
下凡罰有三等等各有目總三十餘條約旣成余告于衆曰此法似疎而實密至道寓焉惟我
同約之人奉之若神明信之若金石行之永久而無替則將見風淳而俗美三代之化自可馴
致亦無所事罰矣其各勉之哉咸曰諾遂次爲之說以備鄕中故事云爾
문소(聞昭: 의성의 옛 명칭)는 향약(鄕約)이 있은 지 오래이나 불행히도 중도 에 폐한지가 여러 해 되어 풍속이 날로 야박해지니,고을의 동지들과 함께 향약의조목(條目)을 다시 손보려고 했지만 고금의 숭상한 바가 달라서정중히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지난 해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 이황(李滉)선생이 손수 만드신 향약의 조목을 보니,근본이 되는 취지가 근엄하고 절도가 있어서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그 속에 가르침이 있는지라,참으로세상을 면려(勉勵)하는 약석지언(藥石之言)이었다. 나는간절히 마음으로 흠모하여 돌아와서 유희잠(柳希潛)에게 말하고, 향약의 조목을 의논하여 정하면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의 네 조목 곧 덕업상권(德業相勸:좋은일을 서로 권장한다) • 과실상규(過失相規:잘못을 서로 고쳐준다) • 예속상교(禮俗相交:서로 사귐에 있어 예의 지킨다) • 환난상휼(患難相恤: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을 강령으로 삼고 퇴계 선생이 정한 벌칙 세부조목을 첨가하였다 벌칙은 3개의등급이 있고, 각 등급은 하부조목이 있는데 총 30여 조로 된 향약을 완성하였다(현재 전해지지 않음)
나는 고을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이규약은 엉성한 듯해도 사실은 치밀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지극한 도리가 들어 있소이다. 우리와 계를 같이하는모든 사람들이 신명(神明)처럼 받들고 철석(鐵石)같이 믿어서 영구히 행하기를 변치 않는다면,풍속이 순박하고 아름다워져삼대(三代:중국의 이상 적인 정치가 행해진 시기)의 교화가 절로 이루어질 것이고 또한 죄줄 일이 없어질 것이외다 각기 힘쓰십시다”고 말하니,모두들 좋다고 했다. 마침내 이에 글을 써서 고을의 옛사례로 갖추어 놓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