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암실적』은 신지효(申之孝 ; 1561~1592)의실적이다. 신지효의 자는 달부(達夫), 호는 응암(鷹巖), 본관은아주(鵝洲)이다.1592(宣祖 壬辰)에 난리를 피하다가 적을 만나 죽었다.임진왜란이 급할 때 선생의 아우 오봉(梧峰) 지제(之悌)는 선성현령(宣城縣令)으로 있고 선생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집에 있다가 바위틈에숨어 있더니 왜적(倭賊)이 쫓아와서 칼로 선생의 왼쪽배를쳐서 피가 흔건히 흐르는 지라 선생이 목숨이 끊어질 때 칡을 입으로 씹어 붓을만들어 가지고 血書로 옷소매에 써서 梧峰에게 주기를 ″나의 몸가짐이 주밀(綢密)하지못하고 효성이 없음이 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는가?, 늙은 부모는 여러 아우들이 있어 모시고 있거니와君은 이미 몸을 王室에 맡긴 지라, 職守가 있는 터이니 마땅히 亂에 임하여 임금의 命을 바뜰어 矢石을무릅쓰고 죽음에 나갈 것이며, 내 시체를 찾지 못할까 걱정하여 다행히 발바닥에 宣城 두 자를 써서 알도록하였노라″ 하였다. 조선때의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出典 : 嶺南人物考, 1978」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지역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달부(達夫). 호는응암(鷹巖). 아버지는 증 좌승지(贈左承旨) 신몽득(申夢得),어머니는 증 공조 참의(工曹 參議) 박민수(朴敏樹)의 딸인증 숙부인(贈淑夫人) 월성 박씨(月城 朴氏), 할아버지는 참봉(參奉)을역임한 신응규(申應奎), 증조할아버지는부장(部將)을 역임한 신한(申翰), 부인은 습독(習讀)을역임한김준창(金俊昌)의 딸 함창 김씨(咸昌 金氏)로 알려져 있다. 신지효는 7형제 중 장남이다. 중제(仲弟) 신지제(申之悌)가 문과급제하며현달하였다.
신지효(申之孝)[1561~1592]는 1561년(명종 16) 출생하였으며, 경상도 의성현 신례동(新禮洞)[현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풍 리리]에 거주하였다. 어려서부터용모가 수려하고 효우가 있었다고 한다. 18세 때 교임(校任)이되었으며, 25세 때 고을 사람들이 교장(校長)으로 추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5월 왜병을 피해 어머니 고창 오씨(高敞 吳氏)[아버지 신몽득의 후처]를모시고응동(鷹洞)[또는 천동(泉洞), 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 암혈(巖穴)에 피신하였다. 그러나쫓아온 왜병에게 발각되어 왼쪽 어깨를 칼로 베이고 말았다. 피를흘리며 죽기 직전 신지효는 칡을 입으로씹어 붓을 만들었다. 이어 예안 현감(禮安 縣監)을 지내고 있던 중제(仲弟) 신지제에게주기 위한 혈서(血書)를쓰고 난 뒤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혈서에는 “나의 몸가짐이 조밀하지못하고 효성이 없음이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는가? 늙은 부모는 여러 아우들이 있어 받들어 모시고 있거니와, 군(君)은 이미 몸을왕실에맞긴지라. 직수(職守)가있는 터이니 마땅히 난에 임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고 실석(失石)을무릅쓰고 죽음에 나갈 것이며, 내 시체를 찾지 못할까 걱정하여다행히 발바닥에 ‘선성(宣城)[예안의 다른이름]’ 두 글자를 써서 알도록 하였노라!
(吾之藏身 不密不孝 孰甚焉 老親則有諸弟奉侍 君旣委身王室 有職守 當臨亂 授命而失石 赴死之日恐無以尋屍幸於足掌 書宣城二字 俾識之)]”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학문과저술
중제(仲弟) 신지제와 더불어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수학하며, 퇴계학맥을 계승하였다. 별도로 남긴 유고는 없으며, 유문으로 『응암실적(鷹巖實蹟)』이있는데, 1817년 편찬한 1책 44장의목판본과 1933년에 편찬된 1책 72장의 석인본이 전하고 있다.『응암실적』에 수록된 「혈서습록(血書拾錄)」은신지제의 후손 신체인(申體仁)이 작성한 것으로 신지효의 ‘혈서’가작성된 경위와 그것을 기리는 의의 등이 언급되어 있다.
금산 서원(錦山書院)[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에 위치]에 중제(仲弟) 신지제(申之悌), 신지제의 후손 신체인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금산 서원은 신체인이강학을위해 1782년 건립한 금연 정사를 1977년 중건하고, 1981년 서원으로 변경한 것이다. 신지효의 위패는 2005년 추향된 것이다. 추향 당시 봉안문은 류용훈(柳龍勳)이 작성하였다. 한편신지효가왜군에 의해 죽은 응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에는재실인응암재(鷹巖齋)와 유허비(遺墟碑)가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