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는 손홍량 유허비에서 동쪽으로 400m 떨 어진 산아래에 있는데 단칸 맞배지붕 비각 안에 2개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1724년 남시윤(南時潤)의처 아주 신씨는 남편이 어린 나이에 과거 보러 가서 사람들 틈에 밟혀 죽자 노비와 함께 앞내에 빠져 죽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에 나라에서 열 녀비를 세우게 하였고, 종의 비도 옆에 작게 세웠다.
아주신씨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2003년 태풍매미의 피해로 비각이 전파된 것을 2006년 안동시와 후손이 증건했다
영조 갑진 2월 1724년용궁부(지금 예천 용궁)에서 과거시험 향시(지방에서 시행하는 백일장)가 있었는데 남시윤은 14세의 나이로 참석하였으나 군중에 밟혀 그만 죽고 말았다
14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결혼한 상태였고 뜻도 펴보지 못하고 애석하게 죽자 부인 신씨는 대성통곡하여 피눈물을 흘렸으며 장례를 치른 후 남편의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시부모에발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느 날 신씨는 이웃 동네에 있는 친정 형님 집에갔다 온다고 시종과 같이 나가 앞 냇가에 투신하여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시종도 같이 따라 죽었다.
며칠 후 시체를 찾으니 신씨는 죽은 사람이 입는 수의를 입고 있었다
그 후 현종 갑진 4월1844년 나라에서 열녀비를 세우게 하여 유림에서 비각과 비석을 세웠으며 비석 옆에 조그만 표지 비석이 또 하나 있는데 주인을 따라같이 죽어 주인을 섬기는 시종의 충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정조실록≫ 8년 3월 2일 자 기록에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안동 선비 남시윤이 과거 시험장에서 죽었는데, 그의 처 신씨가 장례를 치른 뒤에 치마로 낯을 가리고 물에 뛰어들어 죽자, 그의계집종도 동시에 물에 뛰어들어 죽었으므로 하루 동안에 절개가 쌍으로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