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2011년 6월 11일 경북대 퇴계연구소가 주관한 韓 ·中 國際學術大會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하여 작성한 것이다.
**육군3사관학교전쟁사학과 전임강사
1.머리말
2.임진왜란 개전 초기 경상 좌도의 상황과조선군의 동향
3.경상 좌도 조선군의 재편 과정과 반격양상
4.맺음말
1.머리말
16세기 말에 발발하였던 임진왜란은 조선․일본․명 등 삼국이 참전하였는데, 이전에겪어 보지 못했던 대규모 국제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화약무기가 전투에서 전면적으로 사용되어전쟁의 양상이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아울러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대규모 국가간 전쟁의 경험으로인해참전국들은 향후 예상되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 재정, 상공업 등 사회 체제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나타내었다.1) 이러한중요성으로 인하여 한국의 군사사 연구 가운데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2)
임진왜란 극복의 요인은 대표적으로조선 수군의 활약과 의병의 활동, 그리고 명군의 참전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중 의병의 활동이 전쟁 극복의 주요한 요인이었다는 인식은 현재까지 한국 사학계에서 주류를 이루고있다. 왜냐하면 개전 초기 일본군의 빠른 진격에 조선군 지휘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와해되면서각 지역의 수령과 장수들이 피난함에 따라 국가 통제력이 상실하였다는 사실에 기인하며, 이를대신하여 의병이 육상 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의병의 주된 구성원에 대해서는사족의 주도 하에 향촌의 주민과 천민 등 하층민으로 인식한 경향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개전초기 허약한 관군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당시 조선의 무기력한 전쟁 수행 능력을 보여주는 부정적인 근거의 하나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 관련 연구에서는 의병에 대한 성과3)가풍부한 반면에 전쟁 극복의 주요한 주체인 관군의 활동에 대한 연구4)는 상대적으로 부진하였으며, 관군의 기여도를초기 전투보다 1593년 이후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5)기존의 의병연구는 주로 의병과 관군을 분절적 혹은 양자간의 상대적 우위를 주장하였거나, 의병의 준 관군적인측면을 주로 의병장의 관직 제수에 따른 의병 성격 의 변질에서 찾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6)
1)노영구, ‘군사혁명론’과 17∼18세기 조선의 군사적 변화 , 서양사연구 36,2007,36쪽.
2)지금까지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국내외적으로상당히 축적되어 있어,일일이 제시하기 에 어려움이 있다.따라서임진왜란의 연구사를 전반적으로 정리한 성과만 소개한다. 이장희, 倭亂과 胡亂 , 한국역사입문-제2판 ,지식산업사,1987;河宇鳳, 사대교린관 계와 양란 , 한국역사입문 2,한국역사연구회,1995;오종록, 壬辰倭亂~丙子胡亂期 軍事史 硏究의 現況과課題 , 軍史 38,1999;조원래, 壬辰倭亂史 硏究의 推移와 課題 , 조선후기사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 비평사,2000;박재광, 壬辰倭亂 硏究 의 現況과 課題 , 임진왜란과한일관계 ,경인문화사,2005.
3)임진왜란 당시 의병에 대한 연구 현황에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 김강식, 壬辰時義兵戰爭 ,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2005. 계승범, 임진의병의 연구 동향과 군사사적의의 , 임진의병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적 가 치 ,고려대학교한국사연구소,2009.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점차 임진왜란에대한 기존 인식의 재검토가 제기 되면서 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시도되고 있다. 먼저 관군의동향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개전 초기 조선군의 대응과 동원체제는 적절히 작동하였으나 전술적취약성으로 인해 패배가 불가피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7) 이러한 입장은 개전 초기 경상도 지역에서의군사체제가 작동되는 과정을 분석한 연구를 통해 재확인되고 있다.8) 또한 임란 초기 전라도관군의 동향을 분석한 연구9)와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을 통해 경상 좌도 관군의 활동을 구명한 성과10)가 나오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의 임란 초기 관군의 부정적 이미지와 역할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극복하면서, 이들의 전쟁 기여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임란 당시 지방 수령의 도망으로인한 통치력 부재에 대한 기존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 이전에 중앙과 지방이 예전부터 구축했었던행정 체계가 전쟁 중에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기에 각 지역의 수령들이 대처할 수 있었다는 연구가 나타났다.11) 이러한시각은 전쟁 당시 지방 수령들의 대응 양상을 전쟁의 시기별, 지역별로 새롭게 살펴볼 수 있다는것과 나아가 지휘부의 와해에도 군현별 행정 운용은 물론 지역 방어 체계도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7)노영구, 壬辰倭亂 초기 양상에 대한 기존 인식의 재검토 , 韓國文化 31,2003.
8)이호준,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지역 전투와 군사체제 , 軍史 77,2010.
9)하태규,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관군의 동향과 호남방어 , 한일관계사연구 26,2007.
10)장준호, 임진왜란시 朴毅長의 경상좌도 방위활동 , 軍史 76,2010.
11)李仙喜, 임진왜란 시기 咸陽 수령의 전란대처 - 孤臺日錄을 중심으로 -, 진단학보 110,2010.
마지막으로 의병의 구성과 성격에 대한이해이다. 의병의 구성이 향촌민이아닌낙오된 관군인 이른바 ‘산졸(散卒)’이 주력이었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이를 화원현(花園縣) 의병장인 우배선 부대의 구성을 통해 확인한 연구가 나타났다.12) 또한경상우도 의병의 성립과 활동에 대한 연구에서는 이 지역 의병의 주력이 산졸들로 편성되었으며, 기본적으로준 관군적(準官軍的)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였다.13)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임란 초기경상좌도 전쟁 양상에 대한 연구는 지역 의병의 활동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의병의 입장에서그 성립과 전투 양상 등에 대한 상세한 검토가 이루어졌다.14) 그러나 이 지역의 의병장에대한 문중 사료를 중점적으로 분석한 나머지 의병의 주요 구성원이 단순히 충의에 바탕을 둔 창의군으로 이해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의병의 시각에서 전투 양상을 다룬 결과, 상대적으로관군의 대응 양상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15)
그러나 경상도 관찰사의 서리였던 이탁영(李擢英)의 정만록(征蠻錄)과 의성의병장이었던 신흘(申仡)의 난적휘찬(亂蹟彙撰)16) 등에서는 지방 수령 및 관군의 동향에 대한세부
12)이수건, 월곡 우배선의 임진왜란 의병활동 , 민족문화논총 13,영남대 민족문화연구 소,1992.
13)노영구,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도 의병의 성립과 활동 영역 , 역사와현실 64,2007.
14)문수홍, 壬亂 중 慶尙左道地方의 義兵活動-壬辰年 永川․慶州城 收復戰을 中心으로-, 소헌남도영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84;최효식, 임진왜란기경주전투 , 경주사학 10,1991; 경주부의임란항쟁사 ,경주시문화원,1993; 임진왜란중 영천성 탈환전 투의 고찰 , 대구사학 47,1994; 임란초 경주 의병활동 연구 , 경주사학 16,1997; 경주부의 임란의병기록에 관한 연구 , 신라문화 19,2001; 임란기 경상좌도 의 의병항쟁 ,국학자료원,2004.
15)물론 앞서 언급하였던 朴毅長에 대한연구(장준호,앞의 글,2010.)는경상좌도 관군의 동향을 어느 정도 밝혀냈지만,그의 문집인 觀感錄 과 경주성 수복전투 등을 중심으로 다루다보니경상좌도의 전쟁 상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16)신흘(1550~1614)은 본관이 鵝洲로 의성에서 출생하였다.임란 발발후 국왕의 몽진으로 형 申伈과함께 의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당시 의병활동을 하던 김해,유종개,정세아 등과 함께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하기도 하였다.이후 1603년에임란 당시의 경상도 내 사적을 지어 보내라는 조정의 명으로 난중사적 을 저술하였다.이 기록이 轉寫되어난중휘찬 이라는 서명으로 아주 신씨 가문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하태규, 성은 신흘 의 생애와 난중휘찬 , 역주난적휘찬 ,역락,2010,pp.215~217).이 사료는 임진왜란 당시의 문헌들을 참고하고 보고 들은 바를 보완하여 기록한 것으로서 임란 초기 경상도의 상황을 새로이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라 할 수 있겠다.
적인 내용이 보인다. 이를살펴보면 개전 초기 경상 좌도의 주요 지역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한 상황에도 일부 관군 장수들은 임지에서 守城에 임하고 있었으며, 지방관들의 공백이 있는 지역에서는 권응수(權應銖) 등의 의병장들이 산졸들을 수습하면서 항전을 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좌도의 지휘부가 와해된 상태에서 이 지역의 조선군은 조직적인 반격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밀양 부사 박진(朴晉)이 6월에경상 좌병사로 임명된 이후 좌도의 조선군은 신속한 재편이 가능하였고, 이는 일본군에 대한 전면적인반격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조선군은 영천성과 경주성 등 주요 읍성들을 수복하였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박진의 전공은 당시 선조를비롯하여 대부분의 중앙 관료들이 이순신의 공과 다름이 없다고 하여 인정하고 있었으며,17) 영남의민심도 그가 없었다면 이 지역이 일본군의 소굴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18) 그러나 그동안의연구에서는 박진의 활동과 그 역할에 대해서 소홀히 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개전 초기부터 6월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에 대한 저항 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경상 좌병사 박진에 의해 이 지역의군사 활동이 활기를 띄었다는 것19)과 영천성 수복을 위해 그가 각 陳의 부대들 에게 명령을 하달하면서기일을 약정하였다는 사실20) 등을 살펴볼 때, 당시박진의 활약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21)
이상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 논문에서는최근의 연구에서 관군이 전쟁 극복의 주요한 한 주체였다는 것과 의병 부대가 ‘散卒’로 편성된준관군 적인 부대였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이를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대응 양상을 통해 구체적으로확인하는것을 목적으로 한다.이를 위해 관군과 의병의 연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지역인 경상 좌도, 그 중에 서도 경상 좌병사 박진과 권응수의 활동을 중심으로이지역 조선군의 대응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이를 위해 기존의 연구를 토대로 하여 白雲齋實紀, 觀感錄, 征蠻錄 등 의병장 및 관군 장수의 문집과亂中雜錄, 壬辰日記 등의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하되, 임란당시 경상도 사적을 종합한 亂蹟彙撰을 함께 활용하겠다.
17) 선조실록 ,권30,25년 9월 14일 辛未.
18) 선조실록 ,권27,25년 6월 28일 丙辰.
19)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壬辰倭亂史 ,1987,114쪽.
20)申仡, 譯註 亂蹟彙撰 ,역락,55쪽.
21)박진은 임란 당시 관군 장수 중 지대한전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스스로의 문 집이 남아 있지 않아 宣祖實錄 과 같은 正史 및 燃藜室記述 등의 野史와 白雲齋實 紀 , 亂蹟彙撰 등의 기록을 통해서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다. 한편, 박진의 행적을 대 체적으로 다룬 연구는 다음의 논문이 유일하다. 金康植, 임진왜란 시기 密陽地域의 義兵抗爭과 의미 , 釜大史學 28ㆍ29,2005.
2.임진왜란 개전 초기 경상 좌도의 상황과조선군의 동향
1)임진왜란 개전 초기 경상좌도의 상황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진포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 1번대는이튿날 부산진성을, 이어 다대포성을 공략하여 점령 하였으며 15일에는동래성에 진입하였다. 당시 진주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던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晬)는 일본군의 침공 소식을 접수하고 곧바로 경상도 지역 군사의최초 동원을 명령하였다.22) 경상 좌병사 이각도 급히 좌병영의 군사를 이끌고 동래성으로 들어와있었으며, 양산 군수 조영규와 울산 군수 이언성 등이 이끄는 군사들도 이미 집결해 있었다. 또한 밀양 부사 박진과 경주 판관 박의장 등도 군사들을 인솔하여 동래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울산의 좌병영을 중심으로 13읍의 군사들이집결하는 등 조선군의 초기 대응은 일단 작동되었지만, 전력의 현격한 격차와 좌병사의 도망으로인해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이후일본군은 4월 16일에 경상좌수사 박홍이 이탈한 좌수영에진입하면서, 기장과 양산을 차례로 함락시킨 후 밀양으로 진격하였다.
22) 征蠻錄乾,임진년 4월 15일․16일.
일본군 1번대에 이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일본군 2번대는 18일부산포에 상륙하여 다음날에는 양산을 경유하여 언양에 진입하였다. 이후 이들은 울산의 좌병영을향해 계속해서 진격하였다. 당시 좌병영의 상황은 좌병사 관할지역내 13읍 군사들이 모두 도착하여 수성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동래를이탈한 적이 있었던 이각은 또다시 본영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결국 경상 좌도를 총지휘하는 이각(主將)의 도망으로 혼란에 휩싸인 좌병영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20일에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 함락되면서,23) 경상좌도의 방어체계는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한편 동래로 이동하고 있었던 경주판관 박의장은 좌병사 이각의 명령에 따라 다시 경주성으로 돌아왔다.24) 당시 경주성은 경주부의군사 외에 장기현의 군사와 함께 병영군 5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경주 부윤 윤인함은 경상도 순찰사 김수에 의해 포망장(捕亡將)에 임명되었는데, 박의장이 경주성으로 돌아올 때까지 성을지키고 있다가 그가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좌병사 소속의 병영군 500명을 소속시키고 포망장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갔다.
한편 박의장은 경주성에 도착하면서장기 현감 이수일과 함께 모든 장수와 군사들에게 명령해 농성전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탐정군의 이탈로 인해 박의장 등은 적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경주성을 일본군에게내주고 말았다.25) 이는 경상 좌병영의 함락에 따른 지휘체계 와해로 사기가 극도로 떨어진경주의 조선군이 일본군의 압도적인 공세를 감당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경주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틀후인 24일에 영천성 마저 함락시 켰다. 당시영천군수 김윤국은 새로 축성된 영천읍성에서 제대로 싸워
23) 亂中雜錄 ,임진년 4월 21일.
24) 觀感錄 권1, 家傳 ,임진년 4월.
25) 觀感錄 권1, 家傳 ,임진년 4월. 8 軍史 第84號(2012.9)
보지도 않고 충청도로 도망치게 되면서,26) 이지역의 관군과 백성들도 흩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군을 연이어 격파해 나가던 일본군은 한성을향해 신속히 북상하였다. 즉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1번대는 좌수영 -기장 -양산 -밀양 -대구 -인동 -상주 -조령 -충주로 진격하였고,가 토 기요마사의 2번대는 양산 -언양 -경주 -영천 방면으로 진공하였다. 4월 18일에는 일본군 3번대와 4번대가 경상남도 김해에 상륙하였고, 5월에 들어서 후속부대를 상륙시켜 경주, 영천, 밀양, 대구, 성주, 현풍, 선산, 개령, 금산, 상주 등 경상도 주요 지역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점령 지역마다 진영을 설치하였다.27) 따라서 임진왜란 초기 경상 좌도의 군현 중에서 일본 군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인 영천(榮川), 풍기, 봉화, 진보, 청송, 영덕, 청하, 흥해 등 안동진과 경주진의 일부 지역을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이 일본군에게 유린당했다.28)
이렇게 임란 초기 일본군의 신속한진공과 조선군의 계속되는 패배로 인해 일부 지역의 수령과 장수는 산악지대나 다른 지역 등으로 피신하였으며, 대부분의군졸들도 각지로 흩어지는 등 군사력이 와해되었다. 이에 따라 5월이후 경상도의 주요 길목에 소규모의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으며, 이들과 함께주변 지리에 익숙한 倭賊化된 농민들이 노략질을 일삼으므로 그 피해는 매우 컸다.29)
26)영천 군수 김윤국이 도망친 행적에대해서는 사료마다 내용이 상이하다. 영천 의병장 정대임의 昌臺實紀 에서는 기룡산에 있는 묘각사로도주하였다는 내용이 나오고(정대임, 창대실기 권2, 행장), 신흘의 亂蹟彙撰 에서는 충청도로 도망쳤다는기록이 나온다 (申仡,譯註亂蹟彙撰 , 역락, 2010, 55쪽). 경상도 안집사 김륵의 장계에서는 김윤국이 충주로 도망쳤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그가 충청도로 도망쳤다는 행적을 뒷받침해 준다(金玏, 栢巖集 권5, 條陣慶尙道軍情賊勢狀啓).
27)北島萬次(기타지마 만지), 豊臣秀吉 朝鮮侵略 ,吉川弘文館,1994(김유성,이민웅 번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경인문화사,2008,47쪽).
28) 宣祖實錄 ,권27,25년 6월 28일 丙辰 ;申仡, 譯註亂蹟彙撰 ,역락,2010,61쪽.
29)조정, 임진일기 ,임진년 5월 2일.
2)경상좌도 관군의 항전과 의병의 활동
전쟁 초기 일본군의 신속한 진공과현격한 열세로 패배를 거듭하였던 경상 좌도의 조선군은 그 지휘체계와 군사력이 와해되고 말았다. 이러한경상 좌병영의 지휘권 부재와 군사력 약화에도 불구하고 경상 좌도 진관30)에 소속된 각 군현별 장수들은일본군의 침입에 맞서 싸우면서 자신의 本營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이탁영의 정만록 중 경상감사의 장계에서는 이러한 조선군의 대응 동향이 잘 나타나고 있다.31)
먼저 경주진의 상황을 살펴보면, 부윤과 판관을 비롯하여 흥해 군수와 장기 현감, 영일현감, 청하 현감 등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책임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특히 경주 판관박 의장은 죽장 현에 주둔하면서 흩어진 백성과 군사들을 수습하고 대장간을 설치하여 화 살 등의 무기를 제작하는 한편, 정예병을 선발하여 가장 중요한 지점에 복병을 배치시켜 일본군의 길목을 차단하거나 배후를 공격하기도하였다.또 한 밤에는 산 위에서 봉화를 피우고 낮에는 성 밖에서 돌격전을 감행하는 등 일본군을 상대로주야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32) 그리고 경주 부윤
윤인함은 기계현에 주둔하면서 의병장 박인국 등을 領將에 임명하는 등 군사들을모았고, 4월 24일에는 仙桃山에서 차출한 의병들을南川, 鷄林 등 요지에 우선적으로 배치하였다. 한편으로그는 피난민 중에서 1,000여 명의 군사들을 모으는 등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었다.33)
여기서 이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죽장현과기계현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경주부에는 4倉이있었는데, 신광창․기계창․죽장창․안강창 등이 있었다.34) 박의장과윤인함이 4개의 창고가 위치해 있던 지역 중 죽장현과 기계현에 각각 주둔한 이유는 두 가지로파악할 수 있는데, 하나는 경주성을 수복하기 위한 군량미와 병장기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리적으로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으로 경상 좌도 지역에서 피난한 군사와 백성들이은둔한 지역으로서 군사 징발이 용이하였다는 점이다.35) 따라서 박의장 등이 지휘하는 경주의관군은 창고가 위치한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지속적인 항전을 벌일 수 있었던데 비해, 상대적으로현지에서 보급을 해결해야 하는 일본군에게는 매우 불리하였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안동진에서는 비록 부사와판관이 이탈하였지만, 영해 부사와 청송 부사, 영천군수,의성 현령, 봉화 현감, 진보 현감, 군위 현감, 예안 현감, 영덕 현령, 용궁 현감 등이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각기 책임 지역을 지키고 있었다. 이로 인해 안동 전체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는데, 예를들어 예안 현감 신지제의 경우 6월까지 임지를 지키면서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36)과 용궁 현감 우복룡도 고을을 지키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공로로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는 점37)을 들 수 있다.
일본군 주력의 침공 경로로 이용되었던대구진은 부사를 비롯하여 청도 군수와 경산 현령, 인동 현감, 현풍현감, 영산 현감 등도 일본군의 침입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이중 현풍 현감은 근왕군으로 종군하다가 병사하였고, 영산 현감은 전사하였다. 경상 좌수영의 경우 칠포 만호와 축산포 만호 등도 각자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경상 좌병영의 장수들은 지휘부가와해되었음에도 각자의 책임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던 반면, 지방관들이 이탈한 지역에서는 전직군관이나 士族 등이 이들을 대신하여 의병을 일으키면서 적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이들 중 대구진과경주진 일대의 의병들을 총지휘하였던 의병대장이 권응수이다. 권응수는 본관이 안동으로 신녕현추곡리에서 출생하였다.그는 1582년(선조 12)별시 무과에 합격하고, 의주에서 국경수비에 종사하다가 1591년에는 경상좌수사박홍의 밑에서 복무하였던 군관이었다.38) 전쟁이 발발하여 박홍이 좌수영을 이탈함에 따라 권응수도다른 군사들과 마찬가 지로 흩어지면서, 고향인 신녕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신녕 현감 한척이 일본군의 침입을 피해 산속으로 피신하여39) 이지역이 일본군의 침입에 노출되었다. 이에 권응수는 4월 27일 고을을 지키기 위해 동생 권응전․권응평과 家僮 4~5인, 保人 이온수 등을 거느리고 군사들을 수습하면서 거병하였다.40) 권응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상좌도 지역의 의병 부대는 앞서 언급했듯이 전직군관이나 각지의 사족 등을 중심으로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영천에서는정세아와 정대임이, 하양에서는 신해가, 자인에서는최문병이, 경산에서는 최대기가, 경주에서는김호 등이 각 지역 기반에 따라 독자적으로 의병 부대를 이끌었다. 이렇게 조직된 여러 의병부대의 초창기 주요 활동은 향촌 지역 내에서 노략질을 하였던 일본군과 이들과 결탁한 조선인을 격퇴하는 것이었는데, 같은진내에서 접경 을 이루고 있었던 경주진의 영천 의병부대와 대구진의 신녕 의병부대가부분적으로제휴가 이루어졌다.
38) 白雲齋實紀 권1, 年譜 만력 19년.
39)申仡, 譯註 亂蹟彙撰 ,역락,2011,55쪽.
40) 白雲齋實紀 권1, 啓 3면.12 軍史 第84號(2012.9)
당시 영천 官奴 희손 등의 수백 명의무리들이 지역 일대에서 노략질을 하면서 일본군과 내통하고 있었는데,41) 권응수는 정대임 등과연합하여 이들을 토벌한 것을 시작으로 大洞과 신녕 동쪽의 漢川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여 義城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42)
이때 권응수 등이 지휘하였던 의병의구성원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농민과 향촌민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는 것과 달리 주로 낙오된 관군 출신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경상도 지역 전역에는 다수의 낙오된 군병이 거주하는 각 군현 주변의 산간 계곡 사이에 흩어져있었던 상황이었다.43) 이는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인해 지방 수령 등 이들을지휘할 조선군의 지휘부는 상당히 와해되었지만, 대부분의 군졸들은 실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지않은 것에서 기인한다.44)
다음의 사료들은 영천을 비롯한 경상좌도 지역의 의병이 모집되어 부대가 편성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A훈련봉사 권응수가 군사를 일으켜 賊(일본군)을 토벌하였는데, 그의관할 하에 응모한 자들은 모두 한때 무사들로서 영천에 사는 정대임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니, 사로잡거나참한 자가 자못 많았다.45)
B영천군에 가까운 면의 군인 100여명이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모였거늘 같은 군에 거주하는 의병장 정대임이 병사를 모아 거듭하여 서로통하였습니다.46)
C영천 복병장 정대임과 하양 신해와의흥 복병장 홍천뢰와 경주 임내와 자인현 복병장 등이 있는 곳에 군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47)
D (8월 1일)경상도 영천진사 정세아, 신녕 봉사 권응수, 하양 봉사 신해, 고성 봉사 최강이 모두 募兵해서적(일본군)을 토벌하다. 세아의나이 67세이다. 적이 막 본성에 據하고있었는데, 세아가 좌수 유몽서, 생원 조희익등과 더불어 散軍들을 招集하여 적을 捕斬한 것이 매우 많았다.48)
41) 白雲齋實紀 권1, 年譜 만력 20년 5월.
42) 白雲齋實紀 권2, 永川復城記 9면.
43)李魯, 譯註 龍蛇日記 ,한일문화연구소,57쪽 ;조정, 임진일기 ,임진년 4월 24일.
사료 A는 권응수가 최초 의병 부대를 편성하였을 때 주된 구성원이 한때 무사들이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들은 하급 군관들로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여 권응수 부대가 급속히 편성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는것 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그가 일찍이 무관으로 복무하면서 군사 지휘경험이 있었기에 신속한재편이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사료 B~D는 영천 을 비롯한 좌도 지역 의병장들에 의해 해당지역의 흩어진 군사들이 모여 들었다는 것으로서, 이들이 의병 부대의 주된 구성원이었음을 보여주고있다. 이처럼 많은 군졸들이 지휘체계의 붕괴에 따라 흩어져 있었고, 이는 의 병 부대의 급격한 증강과 관군의 재편을 가능하도록 하는 배경이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중 최초로 기병한 경상 우도의 곽재우 의병 부대도 전쟁 초기 각지에 방황하고 있었던捕將, 散卒을 효과적으로 수용하여 전투 병력화한 사례49)가이를 방증한다. 이처럼 경상좌도 의병 부대는 전쟁 초기 관군 지휘부가 와해되면서 일부 지방관이나장수들이 도망쳤을 때 정대임, 정세아 등 지방 유력 사족 등을 중심으로 한시적으로 흩어져 있던관군이 편성되었다. 이들은 군사 지휘경험을 가진 군관 권응수의 지휘하에 연합하여 전투를 수행한변형된 형태의 準官軍的인 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전쟁 초기 경상 좌도 조선군의대응 양상을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표면적으로는 관군이 거의 붕괴되고 의병이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그 내막을 좀 더 면밀히 보면 앞서 살펴 본 바대로 적지 않은 관군 장수들이 아직까지도 해당 지역에서 수성에 임하고 있었으며,이른바 의병으로 알려진 군병들도 대개 흩어진 관군들이 다시 모여 편성한 병력임을 알수 있다. 이는 전쟁 당시 조선 관군의 대응이 거의무능하였으며 결국 의병이 이를 대신하여 육상 전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그동안 의 인식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파악할 수있다..
3.경상 좌도조선군의 재편 과정과 반격 양상
1)경상 좌도조선군의 군사력 재편과 대응 과정
개전 초기경상 좌도의 조선군은 일본군의 신속한 진공과 전력의 열세로 패배를 거듭하였지만 각 군현별 장수들은 임지에서 수성하면서 일본군의 침입에 항전하고있었고, 지방관들의 공백이 있는 지역에서는 전직 군관과 사족 등의 의병장들이 이를 대신하여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면서 독자적인 군사 행동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상 좌도내 관군장수들과 의병장들의 끈질긴 항전에도 불구하고, 이 방면의 조선군은 주요 지역을 수복 하기 위한통합된 반격 작전을 감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개전 초기 일본군의 침공에 대해경상 좌병사 이각이 도망함으로써 조선군의 지휘부가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경상 좌도는도내의 군사기관이나 행정관서의 명령체계가 확립될 수 없었으며, 6월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에 대한 저항태세가갖추어지지 못했다.50) 그런데 5월 경상도근왕군으로 종군하고 있었던 밀양 부사 박진이 온양에서 경상 좌병사로 임명을 받았다.51) 이는좌도의 조선군 지휘체계를 복구하면서 전면적인 반격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50)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壬辰倭亂史, 1987, 114쪽.
51) 선조수정실록권26,25년 5월 1일 庚申 ; 征蠻錄乾,임진년 5월 25일 ;申仡, 譯 註 亂蹟彙撰 , 역락,30쪽.
박진은 1560년(명종 15)에출생하였으며 본관은 밀양, 자는 明甫였다. 1589년(선조 22)沈守慶의 천거로 불차 채용되어 宣傳官과 訓鍊副正을거쳐 밀양 부사가 되었다.52) 1592년 전쟁이 발발하자 박진은 4월 15일 동래 북쪽 蘇山驛과 17일 밀양의 작원관에서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연이어 패배를 당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군의 침입에 맞서 끈질기게 항전하였으며, 이후종4품인 밀양 부사에서 파격적으로 종2품인 경상 좌병사로승급이 되었다. 이는 박진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국왕 선조를 비롯한 중앙관료들로부터 많은주목을 받았으며, 그가 경상 좌도의 악화된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국왕의 기대가 반영된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전쟁 초반에 와해된 경상 좌도의 지휘체계 복구와 군사력을 재편한다는것은 그에게 있어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6월 15일경 박진은 군관 이사언 등 30여명과 함께 고령에서 밤에 낙동강을 건너면서, 우선 조치로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위해 안동 등지로이동 할 것이니 각 수령들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伏兵을 운용할 것과 해당 지역의 전황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각 읍에 하달하였다.그리고 현풍과 밀양을 경유하여 풍각현에 당도한 그는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들였는데, 과거 밀양 부사를 역임했던 박진에게 500여 명이모여들 수 있었다.53) 이후 박진은 청송 등 안동 방향으로 이동하였는데,54) 여기서 그가 안동으로 방향을 돌린 이유는 우선 이 지역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안동 지역은 앞장에서 언급했지만 전쟁초기 일본군의 침입이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의 장수들이 각자 본영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5월에 慶尙道安集使 金玏이이 지역에부임하여 招募 활동을 통한 사족 중심의 의병 부대를 편성하면서 흐트러진 군정 체계를 바로 잡고자 하였던 상황이었다.55) 따라서 그가 안동으로 향했다는 것은 경상 좌도의 군사력 재편이필요한상황에서 이 지역을 거점으로 좌병영을 재 설치하고 군사력을 장악 함으로써,궁극적으로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던주요 읍성들을 수복하겠다 는 의도로 볼 수 있다.
52) 燃藜室記述권17,宣朝朝故事本末 ; 선조실록 권23,22년 1월 21일己巳.
53)申仡, 譯註 亂蹟彙撰 ,임진년 6월 15일 ; 亂中雜錄 ,임진년 7월 5일 ; 征蠻錄 坤, 임진년 7월 25일.
54) 亂中雜錄 ,임진년 7월 5일 ;申仡, 譯註 亂蹟彙撰 ,역락,30쪽.
55)노영구, 임진왜란 초기 近始齋 金垓의 의병 활동 , 군자리그 문화사적 성격 ,토우, 2001,186~188쪽.
밀양 일대에서군사들을 수습한 박진은 6월 22일 경상좌도로 넘어오게 되었는데,56) 이때에 일본군이 안동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감행하고 있어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6월 5일 일본군이용궁과 예천에 난입하였는데,57) 관군만으로 제압하기 어려울 만큼 그 규모가 강대하였다.58) 15일에는 안집사 김륵이 예안 현감 신지제와 용궁 현감 우복룡에게 명을 내려 多仁과 義城의 일본군을 공격하게하였으나, 조선군은 오히려 크게 패배하여 그 손실이 막대하였다.59) 조선군을 패배시킨 일본군은 그 여세를 몰아 22일에는안동을 함락시키고, 7월 1일에는 예안에 들어와많은 피해를 입혔다.60) 또한 영해 부사 한효순이 장기 현감 이수일,영일 현감 홍창세, 흥해 군수 최보신, 청하 현감 정응성, 영덕 현령 안진 등과 더불어일본군을 맞아 공격하기로 하였는데,강원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의 침입으로 역시 패배함으로써61) 안동진은 물론 경상 좌도 전역이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신녕에도착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접하게 된 박진은 영천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권응수를 助戰將(助防將)으로 삼아 수하에 두었고,청송․안덕을 경유하여 7월 5일에는 진보에 당도하였다.62) 이후 그는 이일대에 서 군사력을 확보하면서 안동과 예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축출하고자 하였다.63) 그러나박진이 지휘권 장악과 군사력 수습에 상당한 어려움을겪었는데,64) 전임자이각이 과거 병영을 이탈하면서 印信을 잃어버린 것으로 인해 각 관아에서는 박진의 傳令을 잘못 전달된 것으로 여기고 번번이 의심하였기 때문이다.65) 하지만 영해 부사 한효순이 청송에 도착하여 그를 직접 만나 일단 자신의 인신으로 명령을 대신하도록하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박진은 청송과 진보 등지에서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으자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군사들이 증가하여 점차 그 규모를 갖추 게 되었고,66) 안동 일대에주둔하였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반격을 어느 정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박진을수행하던 조방장 권응수가 7월 9일에 신녕으로되돌아간 일이 발생하였다.67)기존 연구에서는 박진이 그를 견제하고 싫어하여 되돌 아가게 한 것으로보고 있지만,68)권응수의 이러한 행보는 군영 이탈에 해당되는 중죄로서 좌병사 박진으로서는 용납할 수없는 일이었다.그러나 그가 권응수의 이탈을 제지하거나 군율로 처단하고자 하였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권응수가 되돌아갔던 신녕은 영천에서 군위-의성으로 연결되며, 또한 북쪽으로 노귀재를 넘어 청송-진보로 연결되는 길목의요지였다. 만일 군위와 경주․영천 일대의 일본군들이 이 경로를 경유하여 청송 방향으로 공격한다면, 안동 지역의 적을 몰아내기 위해 군사력을 집중해야 하는 박진으로서는 상당한 군사적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추정하건대, 박진은 이러한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 권응수로 하여금 신녕과 영천 지역에 대한 작전을 일임한 것으로보인 그 예로 신녕으로 돌아간 권응수가 군사들을 모으면서 迲林院 大路邊과 군위 지역의 경계인 여음동의 요해처에 복병장과 군사들을 배치시켰고,69)하양과 영천의 의병 부 대와 연계하여 영천으로부터 封庫御史라 칭하고 신녕으로 향하던 일본군을朴淵70)에서 격퇴시킴으로써71) 청송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였던 전투 동향을 들 수 있다. 이는두 사람이 상호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알 수 있는 근거로白雲齋實紀 중 권응수의 장계에서 그가 박진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72)과 훗날 영천성 수복전투에서박진이 대개 권응수의 책략을 받아들였다는 것73)에서 확인할 수 있다.물론일부 사료에서는 박진과 권응수 등의 의병장들의 관계가 대립적이었다고 기록하였지만,이들은 일본군을 몰아낸다는대의를 위해 대립 관계를 뒤로하고 상호 긴밀하게 협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청송과진보 등지에서 군사력을 확보한 박진은 안동부에 주둔하였 던 일본군을 퇴각시키면서74) 안집사김륵과 만나게 되는데,그의 권유를 받아 안동부에 군영을 설치하게 되었다.75)그리하여 그는 7월 19일에안동에 입성하여 김륵으로부터 안동진의 군정을 넘겨받았다.76) 이때 안동에서 축출된 일본군들은풍산현 龜潭으로 이동하여 10여 일간 이 지역에서 노략질을 하였다. 이에 박진이 구담의 일본군을 격멸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지만, 이일대가 험준한 지형이었기에 그는 대신 정예병들로 하여금 밤을 틈타 진천뢰포를 쏘도록 하면서77) 안동으로의재침입을 차단하였다.이를 통해 박진의 군사들이 진천뢰포와 같은 화약 무기를 상당수 보유하였다는 것을파악할 수 있는데, 이전 안동 수복전에서도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으로짐작된다.이는 일본군의 점령이 미치지 못했던 청송과 진보등지에 위치해 있던 軍器庫에서 이러한 무기가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었고, 좌병사에 의해서 재편된관군들이 이를 보유함으로써 그 전투력이 한층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78) 안동 등지에 주둔하고있었던 일본군을 퇴각시킨 박진은 강 원도에서의 일본군 침입을 막기 위해 요소마다 장수와 군사들을 배치하면 서 길목을 차단하였다.79) 이처럼 박진이 안동진의 군정을 장악함으로써, 이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고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예를 들어 7월좌도 순찰사로 임명된 영해 부사 한효순이 각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성대한 행차를 하였는데 성 위의 일본군이 내려다보아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그러한 관원의 威儀에 백성들이 기뻐했을 정도였다는 사례80)가 이를뒷받침한다.
74)申仡, 譯註 亂蹟彙撰 ,역락,46쪽. 栢巖集 과 鄕兵日記 에 따르면 조선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7월 9일에 예안에서( 鄕兵 日記 임진년 7월 9일),18일에안동에서 물러난 것으로 되어있다( 栢巖集 권5, 條陣慶尙道軍情賊勢狀啓 ,7면).
75) 栢巖集 권5, 條陣慶尙道軍情賊勢狀啓 .“左兵使朴晉 來此近邑臣與之相見 勸令留鎭安東”
76) 栢巖集 年譜 ,萬曆 20년 7월. 안동으로 입성한 그는 의병장 배용길로부터 200여명의 군사들을 넘겨 받았다(金垓, 鄕 兵日記 ,임진년 7월 19일).
77)申仡, 譯註 亂蹟彙撰 ,역락,46~47쪽.
78)허선도는 임란 초기 일본군의 점령 형태가 완전한 全面占領이 아닌 중요 郡邑과 郡邑을 잇는 침공로의 주변에서 벗어나지못한,이른바 點線占領에 불과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므로전라도의 경우 주요 營鎭 및 郡邑을 비롯해서 사실상 일본군의 점령이 미치지 못한 후방 각지의 군기고에는 화약무기가 어느 정도 온존하였을 가능성이충분히 있었다 고 주장했다.이러한 무기는 전쟁초기 삼남지방의 의병들이 우선적으로 갖고 있었으며, 이는 다시 대오를 재정비하기 시작한 관군의 전투력으로 나타났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 았다(許善道, 제3장韓國火器의 裝放法과 形態考 , 朝鮮時代 火藥兵器史硏究 ,일조각, 1994,273쪽).따라서 박진의 군사들도 이러한 사례와 마찬가지로 진천뢰포 등의 화약무 기를 보유하였을 것이다.
79)申仡, 譯註 亂蹟彙撰 ,역락,46~47쪽.
80)申仡,譯註 亂蹟彙撰 ,역락,51쪽.20 軍史 第84號(2012.9)
마침내 경상좌병사 박진은 안동진을 좌 병영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경상 좌도의 군 지휘체계를 확립하고 군사력을 재편함으로써,도내의군사 활동을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또한 경주진과 대구진 일대의 관군과 의병들 을 지휘하여 일본군의침입을 격퇴하고 길목을 차단하였던 권응수의 활약도 박진의 이러한 군사 활동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경상 좌도의 조선군의 전투 양상은 그 동안 지역 단위의 거점 방어에서 주요 읍성의 수복과 일본군 요격이라는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반격 작전으로 전환하게되었다.
2)경상 좌도조선군의 반격과 주요 읍성의 수복
1592년 5월에 경상 좌병사로 임명이 된 박진은 두달 만에 안동과 신녕 일대를 장악하면서 주요 읍성을 수복하기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권응수를 비롯한 대구진과 경주진 지역 의병장들도 이를 위한 자체적인계획 을 마련하고 있었다.81)
그런데 6월 15일부터 19일사이에 副總兵 祖承訓 등이 이끄는 명의 군사 들이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남진하면서, 전쟁은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를 호기로 삼은 조정에서는 7월 중에 하삼도의 조선군 부대에게 명군의 출전을 알리고 각지의 일본군을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82) 한편 안동에 주둔하고 있었던 경상 좌병사 박진은 의병대장으로 임명된 권응수에게 명을 전달하여擧事하도록 하였다.83) 이는 조정의 요격 명령이 경상 좌병사를 통해 의병대장에게 하달된 것으로판단 된다.84)
경상 좌병사박진과 의병대장 권응수가 경상좌도에 대한 반격 작전을 위해 영천성 수복을 우선적인 작전목표로 결정하였다.여기서이들이 영천성 을 주요 읍성 수복의 우선 순위로 삼은 이유를 설명하자면, 영천성의 지형적 특성에따른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당시 영천성은 동쪽으로는 안강을 거쳐 영일과 경주로, 남쪽으로는 경산을 거쳐 청도와 대구 방면으로,서쪽으로는신녕을 거쳐 상주 방면으로,또 신녕에서 의흥과 안동 방면으로,북쪽으로는청송에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교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을 확보한다면 차후 경상 좌도의 거진중 하나인 경주부를 탈환하기 위한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 분단되었던 안동진과대구진, 경주진의 관군․의병의 연합부대를 연결할 수 있는 주요한 요충지였다. 또한 영천성은 전쟁 초기 일본군의 후방 보급로 역할을 하였는데,경주나 안강으로부터 의흥과 상주로 이어져 있어 그 지역적 중요성이 매우 컸었 다.85) 만약 조선군이 이지역을 수복한다면, 경상 좌도를 통한 일본군의 보급로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수 있었다.따라서 박진과 권응수는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반격작전의우선 순위로 영천성 탈환을 선정한 것 으로 판단된다.
81) 亂中雜錄 ,임진년 8월 1일.
82) 선조실록 ,권28,25년 7월 19일 丙子.“傳曰 天兵已爲前進平壤 師期豫爲下書于下三道 使之或徼擊或尾擊餘賊若由水路而去 則嶺南水使 以舟師追擊事 分明遣宣傳官速爲通諭”
83)申仡, 譯註 亂蹟彙撰 ,역락, p.158.“時晉在安東傳令應銖擧事”
84)경상 우도의경우 조정의 명령이 경기도 순찰사를 통해 의병 도대장(義兵都大將) 김면의의병부대에게 전달되었던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鄭慶雲, 孤臺日錄권1,임진년 7월 13일).
85)당시 경상우도의병들은 낙동강으로 군량․군기 등의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일본군의 선 박을 격파하여 그들의 보급선을 차단하였다.이로인해 일본군은 경상 좌도로 몰리게 되면서 이 일대는 중요한 후방기지 내지 병참보급지로 바뀌게 되었다(경상북도․영남대, 경북의병사 ,1990,218쪽).
7월 23일 영천성 수복을 위해 의병대장 권응수는 瓦村에서 신녕과 영천․하양․자인․의흥 등의 의병 부대를 ‘倡義精勇軍’으로 통합하여 편성하였다.86) 그 성격은 각 군현 단위의의병 부대에서 이제는 보다 단일한 체제의 부대라는 성격을 띄고 있었다. 이 무렵 죽장현에서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던 경주 판관 박의장의 관군 부대가 권응수 부대와 합류하였는데, 경상 좌병사박진의 명에 따라 영천성 수복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투에 참가하였던 조선군의규모는 총 3,560~3,970명87)으로 신녕과 경주의 군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88) 이는영천성 수복 전투에 참가한 조선군의 주력이 권응수와 박의장의 부대였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외에도울산, 영일, 장기, 흥해, 양산, 언양, 자인 등의 지역 의병 부대와 관군도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89)24일권응수 등의 조선군은 영천성 남쪽 楸坪에서 지형과 지세를 고려한 작전 계획을 논의하면서 전투를 준비하였다.
86) 백운재실기에서는 영천 군수 김윤국이 창의정용군의 별장으로 영천성 수복 전투에 참 가하였다는 내용이 나타난다.하지만신흘의 난적휘찬 에서는 김윤국이 충청도에 도망 갔다가 영천 전투가 이미 끝난 상황에서 임지로 돌아왔다고 하면서,실제참전하지 않았는데 공신의 반열에 들었다는 내용이 보인다(申仡, 譯註 亂蹟彙撰 ,역락,55쪽). 따라서그 진위여부에 대한 명확한 사료 비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때 경상좌병사 박진은 안강에 주둔하면서 군관 변응규로 하여금 화약과 군기(병장기)등을 지급함으로써,90) 권응수 등의 조선군이 화공전을 감행할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를 통해 권응수 부대가 본격적으로 화약무기를 보유함으로써 그 전력이상당히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박진이 안강현에 좌병영을 설치한 이유를 설명한다면 안강이경주부 4倉 중 하나로 물자가 풍부하였다는 것과 이곳이 영천에서 불과 40리 떨어진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형산강의 한 지류에 위치한 七坪川을 끼고 경주와 영천을 연결 짓는교통의 요지였다는 것이다.91) 따라서 박진이 안강에좌병영을설치한 이유는 영천성 전투에 대한 작전을 총지휘하면서 권응수 부대가 전투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군수 물자를 지원하는 한편, 경주성의 일본군이 영천성에 대한 증원을 직접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경상 좌병사 박진의 작전 지휘하에 의병대장 권응수와 경주 판관 박의장이 주장이 된 조선군이영천성 수복 전투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7월 26일 새벽에 조선군은 영천성을 공격하였고, 28일 성을 완전히 수복하면서,일본군 500명의 수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92) 이렇게조선군이 영천성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관출신으로 전투 경 험이 풍부하였던 권응수의 활약이 있었다.그러나무엇보다도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각 陳의 부대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면서 기일을 약정하는 등 작전을 총지휘한 경상 좌병사 박진의 역할93)도 간과할 수 없다.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일본군은 경주-영천-안동을 잇는 보급로가 차단되어 상주로 철수하면서 그 세력이 급속도로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경상 좌도의 수십 읍이 보존하게 되었고 이 지역 백성들 또한 생기를되찾았으며,94) 이 일대가 다시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편경상 우도 내 의령, 삼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곽재우 부대도 8월 초 현풍, 창녕, 영산 등 경상좌도의 일부 지역을 수복하면서,95) 전황은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90) 白雲齋實紀권2, 永川復城記 .
91)최효식,앞의 책,1993,68쪽.
92)영천성 수복전투에 대해서는 이형석, 임진전란사 ,1977,423~426쪽에 자세하다.
93)申仡, 譯註 亂蹟彙撰 ,역락,55쪽.
94)경상북도․영남대, 경북의병사 ,1990,218쪽.
95)이장희, 곽재우연구, 양영각,1983,167~171쪽.
이때 영천성을수복하였던 조선군은 자인현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을 연이어 격파하고,96) 그 기세를 몰아 8월 20일 박진이 안강에서 권응수와 박의장을 선봉으로삼아 직접 16읍의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야간에 경주성을 수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조선군은언양 방면으로부터 증원된 일본군의 배후 공격을 받게 되었고, 급기야 경주성의 일본군으로부터협공을 받아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고 다시 안강으로 철수하였다.97) 그럼에도 경주성 탈환의의지를 거두지 않았던 박진은 안강에 주둔하면서 야간을 틈타 포를 쏘도록 하였고, 중요한 길목에복병을 두어98) 일본군의 증원을 차단 하면서 경주성을 고립시키는 전술로 전환하였다. 또한 그는 박의장에게 결사대 1,000여 명을지휘하게 하여 경주성을 주야로 공격하도록 하였다.99) 마침내 9월 8일 일본군이 경주성에서 울산 방향으로 퇴각함으로써, 조선군은 경주성을 탈환하였다.이때 조선군은 경주성 창고에보관되어 있는 4만 여 석의 군량을 획득함으로써, 경주이남의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한 군사 적 거점을 확보하였다.
영천성과경주성에서 퇴각했던 일본군은 경상 좌도의 주요 요충지를 상실 하여 부산에서 한성까지의 보급로 유지에 더욱 어려움을 겪는 등100) 차후 활동에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반면, 조선군은 언양과 울산으로 통하는 길 목을 막고 울산에서 부산으로 다니는 길을 차단시키면서101)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임진왜란개전 당시 경상 좌도의 조선군은 대규모 일본군의 신속한 침공 과 지휘관인 좌병사 이각의 도망으로 인해 연이어 패배를 거듭하면서 그 지휘체계와 군사력이와해되었고,대부분의 지역이 유린을 당했다.이러한 상황에도불구하고 좌도 내 일부 관군 장수들은 군현 별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고 자신의 책임 지역을 지키면서 일본군에 대한 지속적인 항전을 하고 있었다. 또한 지방관들의 공백이 있는 고을에서는 권응수와 같은 전직 무관과 사족 등의 의병장들이 ‘散卒’ 즉 흩어진 관군들을 수습하여 의병을 일으키면서독자적인 군사 행동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이른바 의병으로 알려진 군병들은 대개 흩어진관군들이 다시 모여 편성한 병력이었으며, 준 관군적인 부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끈질긴 항전에도 불구하고, 경상 좌도의 조선군은 개전 초기 지휘부의 와해로 인해 각 관아에대한 명령체계가 확립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군에 대한 조직적인 반격 태세를 갖추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5월경 밀양 부사 박진이 경상 좌병사로 임명을 받으면서, 좌도의조선군은 지휘체계 복구와 군사력 재편은 물론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반격을 감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경상 좌도로 넘어오면서 일본군의 침입이 상대적으로 적은 안동진에서 좌병영을 설치하려고 하였다. 이지역을 거점으로 그는 장차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주요 읍성들을 수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박진은 권응수의 군사적 지원으로 안동진에서 경상 좌도의 지휘체계를 복구하면서 군사력을 재정비하였다. 이로써조선군은 주요 읍성의 수복이라는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반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7월경 명군의 참전 소식과함께 조정의 요격 명령이 내려지자, 박진은 권 응수와 함께 교통의 요충지이자 일본군의 후방보급로에 위치하였던 영천성을 공략하여 수복하였고,그 기세를 몰아 경상 좌도의 거진이었던 경주성도 탈환하였다. 영천성과 경주성의 탈환에 성공한 조선군은 언양과 울산으로 통하는 길목과 울산에서 부산으로 다니는 길을차단시키면서 일본군의 보급로 유지를 어렵게 하는 등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게 되었다.
이 글은임진왜란 초기 경상 좌도 조선군의 대응 양상을 경상 좌병사 박진과 권응수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기존연구에서 간과하였던 관군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구명한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몇 가지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다. 먼저 국내의 사료들을 중심으로 검토함에 따라 당시 경상 좌도의전황을 다룬 일본측의 사료나 연구 성과를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국사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경상 좌도 의병이 준 관군적 부대였다는 것을 전개시키면서도 관군과 의병의 개념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했으며, 문집이라는제한된 사료를 근간으로 이 지역의 전쟁 양상에 대해 검토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당시 경상 좌도내 일부 지역인 안동, 경주 등의 관군 부대와 의병의 동향을 함께 종합하면서 그 성과를 검토하지못했다.
앞으로의연구에서는 국내 사료에 편중된 검토보다 당시 일본측의 기록들을 활용하여 동일 시간 별로 비교하고 종합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겠고, 문집이 갖는 사료적 한계는 연대기 등의 객관적 자료들이 좀 더 폭넓게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경상 좌도 관군과 의병 관계의 역사적인 특성과 지역적인 특성을 밝히는데 좀 더 집중적인 보완이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향후 연구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