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卷,別集12卷,年譜(合16冊) : 年譜, 四周雙邊 半郭 20.9 x 16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1 x 22.3 cm.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정경세의 시문집이다. 아버지는 좌찬성여관(汝寬)이며, 어머니는 합천 이씨로 가(軻)의 딸이다. 류성룡의 문인이다. 1578(선조11)년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 여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합격했다. 1582년 회시(會試)에서 진사에 뽑히고, 1586년알성문과 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88년 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가곧 통사랑대교로 승진되었다. 1596년 이조좌랑에 시강원문학을 겸했으며, 잠시 영남어사 의 특명을 받아 어왜진영(禦倭鎭營)의 각처를 순시하고 돌아와 홍문관교리에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을 겸하였고, 이어서이조정랑․시강원문학을 겸하였다. 이조정랑에 있을 때에는 인사행정이 공정하여 현사(賢邪)를 엄선해서 임용․퇴출했으며, 특정인에게 경중을 둔 일이 없었다. 1598년 2월 승정원우승지, 3월에 승정원좌승지로 승진되었고, 4월에는 경상감사로 나갔다. 이때 영남 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민력(民力)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해 주고, 백성들의풍습 교화 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1600년 영해부사가 되어 싸움을 잘하고 남을모략하는 투서가 심한 풍습을 교화하였다. 그해 겨울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몇 번의 소명을 받았으나 당시 당쟁의 풍랑으로 정계가 시끄러웠기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 에서 학문 연구에전념하였다. 또한 마을에 존애원(存愛院)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그는 도학(道學)이 정몽주에서 시작되어 이황에게서 집성되었으며, 김굉필․정여창 ․이언적 같은 여러 현인들이 나와 정학(正學)으로 더욱 깊이 연구하여 왕성한 발전이 이루어 졌다고 보았다. 그리하여그는 영남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상주에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였으며, 이곳에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였다. 1607년 대구부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고, 이듬해 광해군이 즉위하여 교서를 내려 구언(求言)하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609(광해군 1)년 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돌아와 서는 화약(火藥)의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하도록 병부(兵部)에 글을 올렸다. 이후 명나라와 교섭하여 그 수입에 힘썼기에 특지(特旨)로 가선대부의 칭호를 받았다. 1610년 4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는 외직을 원해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는 다시 전라감사 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 정인홍 일당의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부제학이 제수되었다. 이후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 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정한 도리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士論)을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은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주자(朱子)를 흠모하고 존경하 였으며, 주서(朱書)를 편람하고 정독하여 후진 교육이나 조의(朝議)․경연에서 진강할때 항상 주서(朱書)에 근거를 두었다. 그의 저서 『양정편(養正篇)』은주자가 편찬한 『소학』과 표리가 되고, 『주문작해(朱文酌海)』는 이황이 편찬한 『주서절요(朱書節要)』와 표리가 되는 것으로 주자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는경전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제자로는 전명룡(全命龍)․신석번(申碩蕃)․강진룡(姜震龍)․황뉴(黃紐)․홍호(洪鎬) 등이 있다. 저서로는『상례참고(喪禮參考)』가 있다.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원집은 1657(효종 8)년에 초간,1844(헌종 10)년에 중간했는데, 별집은 1899(광무 3)년에 후손 정하묵(鄭夏黙)이 원집과 함께추보(追補) 간행했다. 시의편차는 연대순으로 되어 있으 며 만시(挽詩)와 차운이 많다. 그의 시는 서사적인 경향으로 평량(平亮)한 음조를 중시했다 한다. 「진위주문(陳慰奏文)」은 1630(인조 8)년 만주(滿洲)의 여진(女眞)이 명나라에 침입하였을 때 그것을 위로키 위해 명나라에 올린주문(奏文)이다.
「청부등주구로주문(請復登州舊路奏文)」은 청나라의 발호로 공로(貢路)가막혀 바다로 왕래할 적에 등주(登州)의 길을 터 달라고 올린주문(奏文)이다. 그외의 것은 임진왜란 중에 관계되 는 문서 또는 난 후의 정책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소차(疏箚)는 임진왜란과 가도(街道)문제 및 상례(喪禮)에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호패(號牌)와 양전(量田)에 관한 의(議), 내노(內奴)의 복호(復戶)에 관한 계(啓) 등이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선조에게 조(祖)를 올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계(啓)는기휘(忌諱)에 저촉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것이다. 서(書)에는 당대의 명사인류성룡, 이원익, 이덕형,이호민(李好閔), 장현광, 김장생 등과 여답(與答)으로시사(時事), 문학(文學), 예의(禮儀), 성리(性理) 등에 관한 토론 형식의 내용들이 많다. 특히 김장생과는 진지하게 사례(四禮)의 제반 문제를 논하고 있어 그의 예설(禮說)의 주자가례에 바탕을 두고서 한국의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잡저에는예설(禮說), 사실(史實) 또는 일반상식 등 여러 잡다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서(序)와 기(記), 발(跋)에는 낙사합계(洛 社合稧), 상주향안(尙州鄕案) 및 사창약조(社倉約條)에관한 것은 사회경제사의 자료가 된다. 별집의 시는 원집의 시에서와는 달리 시평(詩評)을 간단히 기술한 주기(註記)가 많으며 만시 (挽詩)가대부분이다. 「사문록(思問錄)」에는 주역, 예기, 의례(儀禮)에 관한 의심나는 문제를 놓고[안(按)]이라 하여 자기의 견해를 주자 등의설을 인용하여 기재하였다.
「양정편(養正篇)」에는검속신심지례(檢束身心之禮)에서 12목, 입사부모출사사장통행지례(入事父母出事師長通行之禮)」에서 11목, 서당사업지례(書堂肆業之禮)」에서 5목으로 나누어 아동의 예절 수양방법을 적었다. 「경연일기(經筵日記)」는 1623년~1630년 사이에 경연 에서의 강록이다. 대문장가요 명환(名宦)으로 일컬어진 우복의 시문집인 만큼 분량도 많거니 와 내용도다양하여 문학적 및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는 서애의 문인이었으나 부록에 그와 관계되는 글을 쓴 인사들은류이좌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론계열이다. 인조반정 후 사환(仕宦)을 누린 탓으로 보인다. 저자의 일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속하여 있어서 이 문집 속에는 어느 문집보다도 역사적 자료가 풍부하다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특히, 소차(疏箚)에는 정치와국방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