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卷3冊 : 四周雙邊 半郭 20.5 x17.5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28.5 x 19.5 cm.
조선 중기의 학자인이홍리의 시문집이다. 해겸(海謙)의 아들이며 영천사람이다. 정만양,정규 양 두 선생을 사사하여 동문인 정중기와 정간(鄭幹)과서로 토론하였다. 선생은 기우(器宇)가 준위(俊偉)하고 기격(氣格)이 응중(凝重)하여 일찍이 학문에 뜻하여 넓은 식견과 본원(本原)의 공부에 힘써서 과장(科場)에도출입하였으나 명리(名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홀로 있을 때에는 갈리는것이니 만약 홀로 있을 때 근신 (勤愼)하지 못하면 이것은남을 위한 학문이니 마침내 진짜 소인이다.”하고 또 “빈곤(貧困)은 선비의 상태(常態)다. 이것으로 어찌 나의 호연한 기를 상하게 하리오.”하였다. 저서로는 『예가 지남(禮家指南)』․『천인보전(天人寶詮』』 등이 있다.
이 문집은 1909년 간행된 것이다. 「문절의간쟁(問節義諫諍)」에서는 절의와 간쟁은 국가와 임금에게 충성하는 도리를볼 때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쟁은 나라가 태평할 때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 올바른 정사를 펴게 하는 것이고 절의는 나라가 위험에 처하여 있을때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문영실성(問營室星)」에서는 집을 짓고 수리하는 것은 어느 때라고 할 수 있으나예로부터 초겨울에 공사를 하는 이유는 계절적으로 기온이 알맞아 일하기가 쉽고 농사가 끝난 뒤라 노력 동원이 쉽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傳) 중「옥처사전(玉處士傳)」은 중인(中人) 의 신분인 옥처사의 전기로 권선징악의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