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卷,附錄3卷(合6冊) : 世系圖, 年譜, 四周雙邊 半郭 21.3~22 x16.8~17.4 cm, 有界, 10~11行22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1.8 x 20.2~22.4 cm.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인 장현광의 시문집이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로 제릉(齊陵) 참봉 팽석(彭錫)의 딸이다. 1567(명종 22)년부터 진사 장순(張 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1571(선조 4)년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로서의 면모 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576년 재능과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전 옥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 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이 해에 유명한 「평설(平說)」을 지었다. 1595년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 에게세 번이나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다시 세 번 사직을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류성룡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류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 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어서 의성현령에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 만에 돌아왔다. 1604년 순천군수,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 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08년 「주역도설(周易圖說)」을지 었고, 1621(광해군 13)년 「경위설(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즉 ‘이경기위설(理經 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 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했고, 이어서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 되어 경연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후 이조참의․승정 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1626(인조 4)년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謝恩)했고, 이어서 사헌부대사헌․부호군,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로도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 우참찬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 (三田渡)에서의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구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 는 이황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인 것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 에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 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것이다. 또한 그는 사단(四端)이 칠정 (七情) 밖에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 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 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성리설(性理說)』․『역학도설(易學圖 說)』․『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다. 1655(효종 6)년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 되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同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 문집은 서문과발문이 없으며, 간년은 미상이다. 그의 시는 서경을 읊은것이라도 우주의 원리 또는 형이상학적인 분위기가 많이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이 중에는 만시(輓詩) 나 차운시(次韻詩) 등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소(疏)는 대부분이 그에게 많은 벼슬이 내릴 적마다 그에 대한 사직소이며, 은사로서의처지를 논하기는 하였으나 시사는 별반 거론치 않고 있다. 서(書)는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 등 서원에 보낸 것들이 상당수가 있다. 답, 문목 등에서는 예(禮)와성리학 또는 경서(經書)의 의문점에 관한 답변들이 많다. 그의 사상적 위치를 단편으로 알려주는 내용이다. 「학부명목회통지결(學部名目會通旨訣)」․「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도통설(道統說)」 등에서 그의 이기철학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기에 대하여 이물이본(二物二本)이 아니라 하고 서로 체용이 될 뿐이라 말한다. 심정의 발동에 관하여는호발설을 배척하고 기발이본(氣發理本)의 설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호발설을 배척하고 기발이본의 설을 만대불역의 설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이기설에 있어서 이황보다도 이이의 설에 찬동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주목되는 이론이다.
「문설(文說)」에서는글이 육경을 중심으로 한 고문(古文)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노인 사업(老人事業)」등에서는 노인은 기력이 소모되었으므로 시청․언동․동작․좌와(坐臥)에 있어 서 조심할 것 등 노인이 평소 가져야 할 점을 설명하였다. 「서원설(書院說)」은서원의 의의와 연혁 그리고 향제 등 그 소임을 밝힌 것, 「여헌설(旅軒說)」은 자호의 뜻과 풀이한 것이다, 「피잔설(皮孱說)」은 어릴 때 삼재(三才)의 이치와 우주인물 등의 제목을 적은 『우주요괄첩』을 피(皮)대로 만들어 지니고 다닌 사실, 「동진설(同塵說)」에서는 은사의 행동거지 따위를 설명 하였다. 「문무일체론(文武一體論)」은 천하의 도에 반드시 경위와 표리가 있듯이 문무도 그와 같은 것으로 문(文)이 경(經)․리(裏), 무(武)가 위(緯)․표(表)가 되어 일체라고 강조, 그 둘을 동일시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무를 경시하던 당시의 풍조에서 볼 때 주목되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