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달부(達夫). 호는 응암(鷹巖). 아버지는증 좌승지(贈 左承旨) 신몽득(申夢得), 어머니는 증 공조 참의(工曹參議) 박민수(朴敏樹)의딸인 증 숙부인(贈 淑夫人) 월성 박씨(月城 朴氏), 할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역임한 신응규(申應奎), 증조할아버지는부장(部將)을 역임한 신한(申翰), 부인은 습독(習讀)을역임한 김준창(金俊昌)의 딸 함창 김씨(咸昌 金氏)로 알려져 있다. 신지효는 7형제 중 장남이다. 중제(仲弟) 신지제(申之悌)가 문과급제하며 현달하였다.
활동 사항
신지효(申之孝)[1561~1592]는1561년(명종 16) 출생하였으며, 경상도 의성현 신례동(新禮洞)[현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풍리리]에 거주하였다. 어려서부터용모가 수려하고 효우가 있었다고 한다. 18세 때 교임(校任)이 되었으며, 25세 때 고을 사람들이 교장(校長)으로 추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5월왜병을 피해 어머니 고창 오씨(高敞 吳氏)[아버지 신몽득의후처]를 모시고 응동(鷹洞)[또는천동(泉洞), 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 암혈(巖穴)에 피신하였다. 그러나 쫓아온 왜병에게 발각되어 왼쪽 어깨를 칼로 베이고 말았다. 피를흘리며 죽기 직전 신지효는 칡을 입으로 씹어 붓을 만들었다. 이어 예안 현감(禮安 縣監)을 지내고 있던 중제(仲弟) 신지제에게 주기 위한 혈서(血書)를쓰고 난 뒤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혈서에는 “나의 몸가짐이 조밀하지 못하고 효성이 없음이 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는가? 늙은부모는 여러 아우들이 있어 받들어 모시고 있거니와, 군(君)은 이미 몸을 왕실에 맞긴지라. 직수(職守)가 있는 터이니 마땅히 난에 임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고 실석(失石)을 무릅쓰고 죽음에 나갈 것이며, 내 시체를 찾지 못할까 걱정하여 다행히 발바닥에 ‘선성(宣城)[예안의 다른 이름]’ 두글자를 써서 알도록 하였노라![吾之藏身 不密不孝 孰甚焉 老親則有諸弟奉侍 君旣委身王室 有職守 當臨亂 授命而失石赴死之日 恐無以尋屍 幸於足掌 書宣城二字 俾識之]”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중제(仲弟) 신지제와 더불어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수학하며, 퇴계학맥을 계승하였다. 별도로 남긴 유고는 없으며, 유문으로 『응암실적(鷹巖實蹟)』이 있는데, 1817년편찬한 1책 44장의 목판본과 1933년에 편찬된 1책 72장의석인본이 전하고 있다. 『응암실적』에 수록된 「혈서습록(血書拾錄)」은 신지제의 후손 신체인(申體仁)이작성한 것으로 신지효의 ‘혈서’가 작성된 경위와 그것을 기리는의의 등이 언급되어 있다.
묘소
신지효의 유골을 수습한후, 현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광현리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상훈과 추모
금산 서원(錦山書院)[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에 위치]에 중제(仲弟) 신지제(申之悌), 신지제의 후손 신체인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금산 서원은 신체인이 강학을 위해 1782년 건립한 금연 정사를 1977년 중건하고, 1981년 서원으로 변경한 것이다. 신지효의 위패는 2005년 추향된 것이다. 추향 당시 봉안문은 류용훈(柳龍勳)이작성하였다. 한편 신지효가 왜군에 의해 죽은 응동[현 경상북도의성군 봉양면 길천리]에는 재실인 응암재(鷹巖齋)와 유허비(遺墟碑)가 건립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