影印本(石印本). - 서울 : 景仁文化社,1996. - 【韓國歷代文集叢書(1783-1784)】.
2冊 : 23 cm.
조선 말기의 문신 김홍락의 시문집이다. 학봉 김성일의 11세손으로, 아버지는진억(鎭嶷)이고, 어머니는여산 송씨로 송양신(宋養信)의 딸이다.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태어났다. 서산 김흥락의 문인으로, 1884(고종 21)년 동당시에 급제하였으나 취소되었다. 1889(고종 26)년 「관도기(觀到記)」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수업을 받던 중 지어 올린 글이 우수작으로 뽑혀, 왕이 『대학(大學)』한 부를 하사하였다. 1894(고종 31)년 문과에 급제한뒤 더욱 덕성을 도야하고 의리를 강론하다가 스승인 김흥락이 세상을 떠나자, 척암 김도화의 문하에 들어가수학하였다. 1907(순종 1)년 비서감랑(秘書監郞)으로 임명되어 영친왕(英親王) 가례(嘉禮)에 제서관(製書官)으로 일을 한 뒤에 홍문관시독(弘文館侍讀)으로 승진되었다. 이후비서관기주(秘書官記注)로 옮겼다가 곧 선조관(宣詔官)이 되어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랐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두문불출하고 독서로 소일하며여생을 마쳤다.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 낙암정(洛巖亭)의 「낙암정중수기」를 지었는데, 지금도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집은 아들재동(在東)이 상자에 남아있던 아버지의 유고가 그릇되고 편차가뒤죽박죽이었던 것을 김정모(金正模)에게 바로잡아서 5책의 필사본으로 간행하였다. 서문이 없고, 족질(族姪)인 김정모의후서(後敍)만이 있어서 간단하게 문집 간행의 과정을 알 수있다. 생전에 서산 김흥락과 척암 김도화를 비롯한 훌륭한 스승 밑에서 학문을 이어받아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나아가 자신의 포부를 펼치다가 경술국치 후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자정(自靖)한 인물이다. 그는 수사(修辭)와 입언(立言)에 있어서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문장에는 그다지 힘쓰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문집을 보면 여느 문인들과는다르게 詩는 그렇게 많은 편이 못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만사와 같은 실용적이고 의례적인 작품을 제외하고나면 순수한 문학 작품은 더욱 적은 숫자를 차지한다. 특히 많은 숫자를 점하고 있는 것은 묘갈명을 포함한비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김홍락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겠다. 원래 비문과 같은 글은 연비(聯臂)나학문적 사승(師承)이나 연원관계(淵源關係), 문벌(門閥)이나 지체가 좋은 집의 사람에게 받는 것이 하나의 상식이다. 따라서학봉의 후손인 의성 김씨 가문에 벼슬까지 한 그의 이력을 감안하면 많은 사람들이 비문을 부탁하였을 것이다. 이것이그의 문집에서 비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하여 일견 기형적인 모습을 띠게 한 요인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