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행상운도찰방(行祥雲道察訪) 신적도(申適道)와 모친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4남 중 3남으로태어났다. 형은 신연(申埏)‧신탄(申坦)이고, 동생은 신점(申坫)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수학하였으며, 홍여하(洪汝河) 등과 학문적인 도움을 주고 받으며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광해군 재위 중에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고, 인조가 등극한 뒤인 1646년(인조 24) 식년시에진사 3등 10위로 합격하였다.
시문집으로 신상하(申相夏)가편집‧간행한 4권의 『인재집(忍齋集)』이전하며, 문집 중에서 주목할 작품으로 『대학(大學)』을 탐구하여 문답 형식으로 집필한 「답대학문목(答大學問目)」, 『중용(中庸)』‧『대학』의 관계를 연구한 「용학표리설(庸學表裏說)」,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자세하게 설명한 글로 「성학십도명(聖學十圖銘)」 등이 있다.
『인재집(忍齋集)』
이 책은 종손 상하(相夏)가편집, 1913년에 간행하였다. 권1~2에는 시35수가 있는데, 대체로자연시가 많으나 거경(居敬)과 학문에 관한 시도 간혹 개재되어있다. 서(書)는대부분 학문에 관한 서한으로 『중용』에 관한 연구와 문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답대학문목(答大學問目)」에서는 명덕(明德)에서 혈구(혈矩) 등에이르기까지 질의문답의 형식을 통하여 광범하게 해석하였다. 그 중 지(智)에 대하여 인의예지의 지와 총명예지의 지를 비교, 분석하고 그 동의점을설명하였으며, 극명덕(克明德)과 극명준덕(克明峻德)의 `극`자와 일일신(日日新)과 구일신(苟日新)의 `신`자에 대해서도 구분, 해설하였다.「용학표리설(庸學表裏說)」은『중용』과 『대학』은 서로 안과 밖이 되어 연관관계를 가지며, 『중용』의 성(性)과 『대학』의 심(心)은 동정에 관한 표현이라고 설명하면서 이것이 체용(體用)이 되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므로 그 중 하나가 없어도 완전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 글이다. 「책문(策問)」에서는심(心)은 경(敬)의 대명사로 심이 경 없이 작용하는 것은 정이 아니고 사일 뿐이며, 이것이인심이 되고 심이 경에 따라 작용하는 것이 곧 도심이라고 『서경』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분석하여 설명한 글이다.
신채는 적도(適道)의 아들로의성(義城)에서 살았다. 그는광해군의 난정을 당했으므로 과거에 응하지 않다가 인조가 즉위한 뒤 비로소 응시해서 1620년 초시에입학하고 164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태학관(太學館)에 있으면서 성균관장(成均館長)의명에 따라 태학명(太學銘)을 지었고, 또 세자의 명에 의하여 성학도명(聖學圖銘)을 지었다. 1660년에 모친상을 당하고 1664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모하듯 지극정성으로 전후상(前後喪)을 모셨으며, 그후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실천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그는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홍여하(洪汝河) 등과도의로서 사귀며 서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안렴공(按廉公)이 부친상에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쌍죽(雙竹)이 솟아나는 이적(異蹟)이 있었다. 6대를내려와 호부 우시랑에 증직된 신원록(申元祿)에 이르러 역시지극한 효성으로 소문났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조고 신흘(申仡)은 좌승지에증직되었고, 선고 신적도(申適道)는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을지냈는데 천품이 매우 고고하여 관직을 버리고 한가로이 수양하였다. 선비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경술년(1610, 광해군2) 6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단정하였으며 뜻을 독실하게 가져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문예가 탁월하고 일찍 성취되어 인재(訒齋) 최현(崔晛) 공이일찍이 함께 경사(經史)를 강론하다가 감탄하며 “경을 전문(專門)하는이름난 학자도 미치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병술년(1646, 인조24)에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는데, 몸가짐이엄숙하여동료들이 공경하고 감복하였다. 성균관에서 거벽(巨擘)을 꼽을 때면 영남의 세 아무개라고 칭하였으니, 대개 같은시기에 두 명의 이씨(李氏)가 있어 공과 이름이 같았는데문장과 행실을 앞다투었다고 한다.
조정에서 육행(六行)으로관유(館儒)를 선발할 적에 공이 으뜸이 되어 화려한 명성이더욱 빛났는데도 공은 오히려 스스로 부족하게 여기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훌륭하게 여겼다. 경자년(1660, 현종1)과 계묘년(1663)에 거듭 양친의 상을 당하자 슬픔으로 몸을손상함이 예제(禮制)보다지나쳤다. 복을 마친 뒤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문을닫고 조용히 정양하여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서사(書史)에빠져 지내며느긋하게 여생을 마치려는 뜻을 지녔다. 관찰사가집에 찾아와 경의를 표하였고 경재(卿宰)들이 대부분 그가세상에 등용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임자년(1672) 9월 8일에 졸하니 향년 63세였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호양 처사(湖陽處士) 권익창(權益昌)의 따님이다. 유순하고정숙한 덕이 있어 부도(婦道)를 잘 수행하였는데, 공보다 두 달 먼저 졸하였으니 실로 같은 해 7월 3일이었다. 현의 북쪽 계란치(雞卵峙)에 합장하였다가후에팔지산(八智山) 병향(丙向)의 언덕에 개장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우석(禹錫), 문석(文錫)은 모두 그 문장과 행실을 이었으며, 두 딸은 금문조(琴文操), 박문흥(朴文興)에게 시집갔다. 우석은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덕윤(德潤)은 의모(義模)를 후사로 삼았다. 차남 덕해(德海)는 아들 의모, 기모(器模), 예모(禮模)가 있다. 막내 덕위(德湋)는
아들 익모(益模), 분모(賁模)가 있다. 두딸은 권득태(權得泰), 송후(宋煦)에게시집갔다. 문석은 3남 3녀를두었다. 장남 덕일(德溢)은 아들 언모(彦模), 정모(正模)를 두었는데, 정모는문과에 급제하였다. 차남 덕호(德浩)는 예모를 후사로 삼았다. 삼남 덕순(德洵)은 정모를 후사로 삼았다. 세딸은 이영중(李英中), 권성(權惺), 이후겸(李厚謙)에게 시집갔다. 현손 이하로 또몇 명이 있다.
공이 돌아가신 지 백여 년이 되었는데 묘도에 비석이 없었으므로 여러 후손들이 빗돌을 마련하여 글을 새겨서 후세에분명히 보여 주고자 하여 나에게 부탁해 명을지은 것이다. 명은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