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당시현령은 황응일이며, 본관은창원(昌原). 자는 여영(汝濚). 황영(黃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안산군수(安山郡守)를 지낸 황도형(黃道亨)이고, 아버지는 양성 현감(陽城 縣監)을지낸 황석(黃錫)이고, 어머니는지평(持平) 김주우(金柱宇)의 딸 안동김씨(安東 金氏)이고, 부인은 부사(府使)이송로(李宋老)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황응일(黃應一)[1655~1716]은 생원시에 합격한 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고, 1691년 의성현령(義城縣令)이 되어, 1694년에 문소루(聞韶樓)를 중건 하였다.
1704년에와서 별제(瓦署 別提), 1705년 형조좌랑(刑曹 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1708년 금부도사 (禁府 都事), 1709년 서흥 현감(瑞興縣監)을 역임하였다. 묘는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 양지리(陽地里)에 있다. 1934년의성군 사곡면 신감2리에 후손들이소헌정(韶軒亭)을 지어서 추모하고 있다.
황응일 현령 재임시 불타버린 문소루 구허지에다시 중수하였는데, 이 때 상량문은의성현구지미 (현구련리) 모성당 임세장 선생이 쓰고, 중수기문은형조판서인 유제이현석 선생이 썼다. 자족재신봉석선생은 황현령과 교분이 두터워 이임시 석별의 시를 썼다.
2) 문소루 를 중수한 찬한 시로 의성현을 말함 <출처:자족재집>
자족재(自足齋) 신봉석(申鳳錫)
1631년(인조 9) 출생하였다.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석형(錫亨). 호는 자족재(自足齋).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신견(申堅), 어머니는 신효성(申孝誠)의딸인 평산신씨(平山申氏), 할아버지는 신사도(申師道),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한 신심(申伈), 부인은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경(金鏡)의 딸 의인(宜人)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덕과 총명을 보여주어,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 전한다.
7세 때 신봉석이‘학서(學書)’를 청하였는데, 몸이유약하다며 부친이 허락하지 않았다.
13세 때에는 부친이 통발 속의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자, 신봉석은단지 잉어 한 마리만 가지고 왔다. 부친이 그 까닭을 꾸짖어 묻자 신봉석은“차마 모두 잡아오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특히, 신봉석은 효성이 지극했다고 전해지는데, 부친의 병환 때에는 얼음을 깨어 물고기를 잡아오고 상분(嘗糞)하며 간병하였다. 또한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했는데, 모친이 20리 밖에 떨어져 계셨기에매일 곡을 하면서도 가서 살피기를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몸가짐도 단정하여 의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 없었다고 하며, 부모제사 때가 아니면 함부로 돼지와 닭을 도살하지 않았다.신봉석은 부친의 계(階)로 인해 선교랑(宣敎郞)에 통적(通籍)되었으며, 일찍이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1655년(효종 6) 어느 날 성균관의 모든 유생이 삼청동(三淸洞)에 놀러 갔지만, 오직신봉석과 호남의 한 유생만이 성균관을 지키고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효종이 불시에 성균관에내시를 보내어 두 유생만 응제시(應製試)를 치게 하니, 둘 중 장원은 신봉석이 차지하였다.
이에 효종은 신봉석에게 집을 내리려 했지만, 대간(臺諫)들의 반대로 종이·붓·먹만 상으로 내렸다. 1657년(효종 8) 한성시(漢城試)에는 급제하였으나, 성시(省試)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낙향하여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으며, 스스로‘자족재(自足齋)’라는 호를 짓고 편액(扁額) 한 뒤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고향에 있으면서도 국사에대해서는 매우 강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677년(숙종 5) 「진오폐소(陳五弊疏)」를 올렸는데, 이는당시의 폐단을 5개조로 나누어 지적한 것으로, 그첫째가 세금 징수의 폐단, 둘째가 군역의 폐단, 셋째가가난한 백성이 더 가난해지는 폐단, 넷째가 영남의 인재를 쓰지 않는 폐단, 다섯째가 인재 등용의 폐단이다. 이어 신봉석은「의청영남행경대동소(擬請嶺南行京大同)」라는 상소를 올려, 대동법(大同法)의 영남지역의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후 거처를 지금의의성읍 용연리로 옮겼으며, 초택(草澤)에서머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