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년에는학문에 뜻이 없었으나 18세 이후 학문에 뜻을 두어 전념하였으며, 이대유(李大柔)와 주고받은 논문은 병곡 권구(屛谷 權榘)로부터 “이사람은 늦게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뜻을 세워 성실하고 돈독하기가 이와 같다.”라는 찬사를 들었다. 학가사ㆍ청량사 등 사찰에서 공부를 하다 이광정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주자학에침잠하여 전긍재(戰兢齋)라는 호도 주희의 「경재잠 敬齋箴」에서취한 것이다. 1727년(영조 3)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 과거업을 폐하고 『심경』ㆍ『근사록』ㆍ『주자전서』ㆍ『퇴계집』 등 주자학에 전념하였다. 1764년(영조 40)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771년(영조 47)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772년(영조 48) 자헌대부동지중추부사(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전형적인 재지사림으로 인근의 사림을 모아 서숙(書塾)을 세워 후학을 교육하는 등 후진양성에 힘썼다. 종유한 자로는 이산두ㆍ이경익(李山斗ㆍ李景翼) 등이 있다. 전배(前配)는 풍천임씨 세핵(豊川任氏 世翮)의딸이며, 후배(後配)는흥해배씨 형(興海裵氏 珩)의 딸이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근원ㆍ신원(謹源ㆍ愼源)이고 세 딸은 각각 김시만ㆍ김타ㆍ서창필(金始萬ㆍ金垞ㆍ徐昌弼)에게 출가하였고,서녀(庶女)는 백시채(白始采)에게 출가하였다.
김서일(金瑞一)은 안동 풍산의 대표적인 사족출신으로 인근의 사족들과 교유하면서도많은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다.
해제
전긍재집(戰兢齋集)
戰兢齋金瑞一의 문집. 4권 2책.목판본.
1868년(고종 5) 작성된 류주목(柳疇睦)의 서문으로 보아 이 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卷1에 약 200수의 시가 실려 있고,卷2에는 「여병산동주 與屛山洞主」, 「답호계사림答虎溪士林」 등 사림 간에 주고받은 서간을 수록하였다. 卷3에는기ㆍ발ㆍ묘지명ㆍ뢰사ㆍ상량문ㆍ제문(記ㆍ跋ㆍ墓誌銘ㆍ誄辭ㆍ上樑文ㆍ祭文)을수록하였으며, 卷4에는 가상ㆍ행장(家狀ㆍ行狀) 등 김서일에 대한 기록을 수록하고, 사우ㆍ친인들의 만사(輓詞)와제문(祭文)을 수록하였다.성리학설에 대한 서술은 거의 없고, 지인들과 주고받은 시문과 각종 문고(文藁)가 대부분이다.
○ 서이치재유고후(書二恥齋遺稿後)
申光烈이그의 선대인 이치재(二恥齋) 신경해(申景楷)의 유문을 가지고 와 “선군자의평생 저술이 적지 않으나 화란이 있고 난 후 거의 없어지고 「강담수수록 江潭隨手錄」 약간 편만 남아 있으니 그대가 보아주시오.” 하였다. 내가 “좋다. 내가 바라던 바이다.” 하고 받아 두세 번 열람하였다. 신군이 또 그 행장을 지어주기를 바라므로 감히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서일은 평일 이치공(二恥公)으로부터 감화받은 바가 많았다.공이 二恥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충ㆍ효(忠ㆍ孝)에 과연 부끄러움이 있었는가?무신년을 만나 적이 올 때 사람들이 모두 놀라 새와 쥐가 도망치는 것과 같이 숨었는데 공이 한 서생으로 군을 지킨 것이 수개월이었다. 공은 어머니를모심에 지극하여 향리에서 소증참(小曾參)의 칭호를 들었다. 난을 당하여 또한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공이 二恥로 齋의 이름으로삼은 것은 無恥에서 나온 것이고 恥를 더한 것은 스스로 면려(勉勵)하기위함이었다. 사람들은 그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그 시세를 보지 않고 다만 한 때 불행한 변으로 그 득실을논하니 어찌 분통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