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고송선생(孤松先生) 아주신공(鵝州申公: 申弘望, 1600∼1673)이 거처하던 곳 옆에 주연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당(堂)을 지어, ‘낙선(樂善)’으로 편액하고 그로 인하여 네 소절의 시를 지어 그 뜻을 읊고 노래하였다. 선생의손(孫)인 신국모(申國模숙범:叔範)씨에 이르러 그 당 전체를 개축하였는데, 당의 옛 건축법을 살려 아름답게 지었고 족인들이 모여 노래하고 곡하는 장소로삼아 그 호칭을 옛날 그대로 하였다.
오호라!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은 또한많지만 무엇이 선을 행하는 것만 같은 것이 있겠는가? 절로 하고자하여 선(善)을 행하여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땅을 굽어 부끄럽지 않으니, 그 즐거움이 무엇과 같을 수 있겠는가? 선생은 이미 선으로써즐거움을 삼음에, 일찍이 그 소유함을 행하고자하지 않은 적이 없어 이 사람과 더불어 하였다. 세상이 나와는 맞지 않음에미쳐 마치 가는 구멍에 큰괭이를 맞추어 넣는 것과 같이 합하지 않아 물러나 은거하여 동평왕(東平王)ㆍ마소유(馬少游)의행함을스스로 달갑게 여겼다. 그러므로 시와 음악을 지은 것은 유유하고 맑고 깨끗하니 여유로움을 스스로 얻게되었다.
증점(曾點)과 더불어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흥(興)과 사마광(司馬光)의 스스로한가로이 물러나 지내는 즐거움의 뜻은 천고(千古)에 매 한가지이니, 어찌 세상의 명리(名利)에 기뻐하고 부귀(富貴)에급급하여 헛된 영화와 같은 외물로 즐거움을 삼는 자와 함께 의논할 수 있겠는가? 선생은 이것을 자신에게넉넉히 하여 후대에까지 드리웠으니, 신국모(申國模 숙범:叔範)씨 또한 그 뜻을 이어 그 일을 기술하였다. 비록 그 당을 고쳐 새롭게 지었지만 옛 편액을 걸었고 소반과 사발, 안석과지팡이에까지 경계의 말을 새겨 그 선대(先代)의 뜻을 좇아서받드니, 선대의 훌륭함을 힘써 따름을 볼 수 있다. 내가[孤山 李惟樟, 1625~1701] 일찍이선생의 문하에 허락을 받고 그 높은 뜻과 소양에 감복하여 후손에게 좋은 뜻을 밝히기로 하고는 이에 거듭 절하며 명(銘)을 지었다
신홍망 (申弘望)
자 : 망구(望久)호 : 고송(孤松)인물/전통 인물
성별 : 남성출생연도 : 1600년(선조33)
사망연도 : 미상본관 : 아주(鵝洲: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
주요 관직 : 풍기군수 |사헌부지평
정의
조선후기 풍기군수, 사헌부지평 등을역임한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지평·정언·풍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52년(효종 3)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도승지 이시매(李時楳)가 자못 패만(悖慢)한 것을 지평 이온발(李溫發)이상주(上奏)하다가 탄핵을 당하였는데, 이 때 이시매는 자기의 밝음을 선현을 이끌어서 증명하려 하였다.
이를 듣고서 직접 그 소(疏)를 보니 실로 모욕적이어서 이를 단독으로 왕에게 진달하였다. 이것이빌미가 되어 당론을 타파하고자 하는 마당에 호당(護黨)한다하여 탄핵을 받고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가 두달 뒤 풀려났다.
1659년풍기군수로 나갈 때 읍재(邑宰)가 연달아 관청에서 죽자, “내가 그 자리에 나가지 않고서는 요망스러운 말을 없앨 수 없다.”하고부임한 뒤, 학교를 일으키고 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고송집(孤松集)』이 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고송집(孤松集)』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이유장(李惟樟)
1625년(인조 3)∼1701년(숙종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주1). 자는 하경(夏卿), 호는 마애(磨崖)‧나암(懶庵)‧우원(芋園)‧우포(芋圃)‧사익당(四益堂).
1660년(현종 1) 경자식년사마시(庚子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합격하였다. 1667년(현종 8)에 대도솔촌(大兜率村)에우거(寓居)하였다.1689년(숙종 15)에 대신(大臣)이 행고학우(行高學優) 천이독실(踐履篤實)로천거하였다. 6품계에 올라 와서별제(瓦署別提)와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669년(현종 10)에 모친상을 당한 후, 두문불출하였다. 이후 강학(講學)에 전면하면서『주역(周易)』‧『춘추전(春秋傳)』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특히 주자(朱子)와 퇴계(退溪) 선생의 예설(禮說)을절충하여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하였다. 한편 이론을 분류, 수편(手編)하여 「이선생예설(二先生禮說)」을 만들었고, 우리나라 역사책을 산절(删節)하고 요약 한 뒤에 자기의 의견을 곁들어 『동사절요(東史節要)』를 만들었다. 1691년(숙종 17)에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제수되었으나 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 해 겨울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으로 제수되었지만 입직(入直)한지 7일만에 하향(下鄕)하였다.
1694년(숙종 20) 이조판서(吏曹判書) 이현일(李玄逸)이 하향(下鄕)하면서 이유장을 영남(嶺南)의 노성(老成)한 숙덕(宿德)으로 천거했다. 1701년(숙종 27) 5월 14일에사망하였다. 묘는 경상북도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 북쪽현공산(懸空山) 용감동(龍甘洞)에 있다. 1729년(영조 5) 동향(同鄕)의 인사들이안동에 낙빈정사(洛濱精舍)을 세워 향사하였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남아있는 문집으로 『고산집(孤山集)』이 있는데, 이유장의 증손 이홍진(李弘辰)이 간행하였고, 원집(原集) 8권, 부록(附錄) 2권으로 모두 5책으로 구성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