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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여헌학의 가학 전수와 선산․인동으로의 전파 속에서 만회당 장경우가 차지하
는 역할과 위상에 대하여 살펴보려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
遇, 1581~1656)는 부친인 극명당 장내범(張乃範, 1563~640)과 아들인 남파(南坡) 장
학(張澩, 1614~1669)과 함께 3대가 여헌 장현광을 시봉하였다.
장경우는 한강 정구가 사망한 후 여헌 장현광을 옆에서 시봉하면서 스승으로 모셨다.
1637년 장현광이 사망한 후에는 여헌을 위한 추숭 사업을 주도적으로 처리해 나갔다. 그는
1639년 동문 제자들과 함께 여헌의 위판을 오산서원에 봉안하였으며, 스승의 문집도 직접
교정하였다. 1654년에는 학사 김응조, 난재 신열도, 청천당 장응일 등과 함께 강학 장소인
부지암에 서원 건립을 결의하여 건물을 세웠으며, 이듬해 오산으로부터 위판을 모셔왔다. 장
현광의 원향 추진과 저술 간행에 장현광의 사자인 장응일과 함께 장경우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장영은 장현광의 제자록인 십철록을 지으면서 장경우를 가장 높은 반열에 두었
다
.
정구의 원유들도 문도록을 지으면서 장경우를 고제로 삼아 입계하였다. 인동 장씨 문중
이 중심이 되어 후손 중 출중한 자손을 제향하는 옥계사에도 종향되었다.
한편 장현광을 주향으로 모시는 동락서원에 장경우를 배향하려는 논의가 철종 말 거론되
었는데 당시 계장에서는 장경우를 사문의 적통 제자라고 칭송하였다. 평생 스승을 보좌하였
으며 학파로서의 독자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함으로써 사문의 공으로 본다면 여헌 장현광을 제
향하는 묘우에 단독으로 배향할 수 있는 고제라고 본 것이다. 1932년 동락에 영당이 복원되
면서 1933년 영당에의 종사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