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6월 10일, 예안현 관아에 나아가 왜적에 대한 방비 상황을 확인하던 금난수는 예안현감 신지제의 처남 조준도(趙遵道)와 아우 신지의(申之義)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 이들은 신지제의 안부를 확인하고 집안 소식을 전하고자 나타난 것이었다. 조준도는 아직 10대 소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직 큰일을 맡을 수가 없었고, 아우 신지의 역시 부모를 모시는 역할을 맡아 전력이 되지 못하였다. 신지제는 올해 막 30세가 되었는데, 전란이 터지기 3년 전인 15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예안현감이 된 터였다.
이 때, 경상도는 왜적에 의해 도로가 막혀 여러 읍의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소식이 통하지 않았고, 영덕현감 안진(安璡)은 보고하기를, “경상좌도의 여러 읍은 다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오직 영해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 용궁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 및 예안현감(禮安縣監) 신지제(申之悌)가 각각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였다. 영해, 용궁, 예안은 왜적이 침입한 경상좌도로부터 거리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또한 신지제는 이 때 수령의 도망으로 인해 공석이 되어 있던 안동부사직까지 겸직하여 두 현의 방어를 모두 담당하였다.
신지제는 경상 좌방어사 성응길의 지원을 받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동시에 안동과 예안에서 의병장 김해(金垓)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 모집을 위해 홀로 안동 용궁으로 가다가 왜병 70여 명에게 포위당하였으나 과거에 신지제에 의해 훈방조치 되었던 죄수가 은덕을 갚아 목숨을 건지기도 하였다. 또한 신지제는 안동과 예안 지역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에도 노력하였다.
젊은 관원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한 신지제의 공적이 이후 조정에 전해졌고, 이 덕분에 신지제는 이후 공신에 책봉되고 여러 요직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아직 먼 훗날의 일이고, 신지제는 다만 눈앞에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적들에 맞서 집안일은 모두 처남과 동생에게 맡겨놓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의병장 김해와 약조하기를 어느 한쪽이 목숨을 잃게 되면 서로의 처자를 돌보아주기로 하였다. 이미 그는 자신의 목숨은 나라에 바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임진년 6월, 혼란의 경상도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2개월째, 부산을 가볍게 돌파한 왜적은 6월에는 경상좌도(울산·양산·연일·동래·청송·예천·풍기·밀양·칠곡·경산·청도·영양 등 37개 군현)를 초토화시켰다. 경상좌도에는 감사(監使)와 병사(兵使)·수사(水使)가 없어 명령 전달이 안 되었고, 이미 왜적에 의해 도로가 막혀 각 읍이 서로 통하지 못해 상황 전달 역시 어려웠다.
영덕 현감(盈德縣監) 안진(安璡)은 우순찰사 김수(金睟)에게 보고하기를, “좌도의 여러 읍은 다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오직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 효순(韓孝純),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 및 예안 현감(禮安縣監) 신지제(申之悌)가 각각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이 보고가 쓰여 있는 공문을 전달한 사람은 산길로 밤에만 걸어서 20일만에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공문을 가져온 사람에게 김수가 경상 좌도와 우도의 현황에 대해 묻자, 그는 경상좌도에서는 동해(東海) 일대 장기(長鬐) 이상으로 안동·청송·진보(眞寶)·봉화·예안(禮安)·영천(榮川)·예천·풍기(豐基) 이외의 언양(彦陽) 일로와 울산·경주·영천(永川)·신령(新寧)·의흥(義興)·의성·군위·비안(比安) 일대가 이미 왜적의 손에 들어가 약탈당하고 있었다고 답하였다. 또한 이 와중에 각 지역을 책임지는 감사·병사·수사·방어사·조방장 및 수령들은 모두 도망하였다는 것이었다.
경상우도의 상황도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거창·안음(安陰)·함양·산음(山陰)·단성(丹城)·하동·곤양(昆陽)·사천·진주 이외의 지역은 모두 적의 침략을 겪었고, 남해의 섬들은 비록 아직 침략을 겪지는 않았지만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 군량과 군기가 적의 손에 넘어갈 것을 염려하여 먼저 스스로 불태워버려 빈 섬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사항을 치계한 김수는 거느린 군졸이 없어 80여 명의 군관과 수령만 거느린 채 서울로 가고 있었는데, 이미 경기 지역에 왜적이 가득하므로 나아갈 수 없었다. 어디에 가도 응원군을 구하고 있을 뿐, 다른 지역을 응원할 여유가 있는 지방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