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군 봉양면기(鳳陽面基)는지리적인 멋을 지닌 삶터다. 빼어난 경승지가 있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그 터가 풍수적으로 어떤 대명당이어서도아니다.
지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과 삶터, 자연간의 조화로운 균형을추구하는데 있다면, 그런 다양한 균형미를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봉양땅일뿐더러 옛 주민들의 삶터에 대한 의식과행태 또한 각별한 멋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그 면기 내에는 도리원(桃李院) 터처럼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그 공간 모습이 크게바뀐 곳도 있다.
그것은 곧 그 터의 함의성(含意性)이그만큼 풍부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도리원 터를 통하여 전통의 풍수지리와 현대지리적인 안목이 서로 만나는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그만큼 사람들의 다양한삶터 지리관(地理觀)을 접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봉양면기의 중심을 이루는 도리원은 그 지명 유래부터가 신비스럽다.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는 다같이 도리원(都里院)으로 나와 있는데, 요즘의 모든 지리지나 지도에서는 桃李院으로 통칭되고있다. 물론 예로부터 그곳이 안동, 상주, 대구를 잇는 삼각 교통요지였기 때문에 길손들을 위한 국영 원(院)집이 그 일대 어디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원 자(字)에는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 궁금한 것은 역시 都里와 桃李라는 한자표기다. 일설에는 신라때 아도화상이 선산 고을 태조산(혹은 냉산)중턱에 도리사(桃李寺)를짓고 제2의 도리사지를 물색하던 중, 지금의 도리원 터를찾아냈으나 행주형(行舟形) 지세임을 알고 포기하는 바람에桃李院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전해온다.
하지만 그 얘기는 전혀 믿을바가 못된다.
역원제도가 마련된 역사적 시점으로 봐도 그렇고, 지세적으로 볼 때도그곳에 절집이 들어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아마도 근대에 와서 누군가가 도리사의 도리와도리원이라 할 때의 도리의 한자표기가 같은 데 착안하여 그런 황당한 설을 지어냈을 듯싶다.
그렇다면 향토사가를 위시한 현재의 도리원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지명유래설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원래 도원동에 있었던 장터가 잦은하천 범람으로 수몰되자 1920년 9월에 현재의 도리원 터로 장터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 당시 그 일대는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황무지나 다름없었던 관계로 그때부터 桃李院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또한 명백히 잘못된 설이다. 이웃 구미리(龜尾里)에 살았던 도와(陶窩) 신정주(申鼎周.1764-1827)가 저술한 '구장지(龜莊志)'에 이미桃李院이라는 한자지명이 나오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제 도리원이라는 곳 이름의 비밀은 다 풀린 셈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중앙에서는 都里院, 향토에서는 桃李院으로 써 왔는데, 예로부터 토지이용 경관이 크게 변하지 않은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 밭에 공교롭게도 장터가 이설되면서 桃李院이라는줏대 있는 고(古)지명이 극적으로 부활되었던 것이다.
지리의 오묘함을 느끼기에 앞서, 일찍이 삶터 주변의 이곳 저곳에 대해자세히 기록해 둔 도와 선생의 혜안에 그저 감복할 따름이다.
봉양 사람들의 그같은 뿌리깊은 향토애 정신은 물론 지금도 살아 있다.
주변 산이름을 놓고 봐도 도무지 하나의 이름만을 가진 산이 없다.
도리원의 주산격인 무태산(武台山)을무태산(無怠山)이라고도 하여 주민들 누구나 게으름을 경계하도록하고, 동남방의 안산격인 간점산(肝岾山)은 갈뫼봉(물가 또는 작은 냇줄기가 갈린 곳에 있는 산이라는 뜻), 봉기산(鳳起山), 탑산(塔山: 현재의 탑산온천 개발자인 그곳 출신 김모씨가 어릴적부터 갈뫼봉을오르내리면서 돌을 하나씩 주워다 탑을 쌓은 결과 어느 때부턴가 주민들이 탑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함) 등으로, 그리고 모선암(慕仙庵)이있는 서쪽의 마두산(馬頭山)은 일명 장등산(長燈山: 절집을 드나드는 佛者들이 마두산의 어감이 좋지 않아 그 대안으로지은 이름인 듯함)으로도 불린다.
필자는 삶터 주변 자연에 그토록 다중적으로 의미가 부여돼 있는 지역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어디 산이름뿐인가. 의성읍 쪽에서 흘러오는남대천(南大川)과 금성면 쪽에서 흘러오는 쌍계천(雙溪川)이 구미리 앞 섬개들에서 합류한 후, 도리원 서남쪽으로 빠져 흐르는데 그 이름이 봉황천(鳳凰川)이다.
하기야 봉기덤('덤'은 '둠'의 또다른 표현으로서 '둘러싸임'의 뜻을 지니고 있음)이 있는데 어찌 그 밑을 흐르는 하천이 봉황천이되지 않을쏜가.
혹자는 혼란만 불러일으키는 그런 의미부여 행위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반문할 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모든 산과강이 하나의 이름만을 가져야 된다는 말인가.
그런 다양한 의미부여 행태는 알고 보면 사람과 삶터 자연이 주체성 있게 상즉상입(相卽相入)한 결과다. 그들스스로가 현재 자신들이 살고 있는 주변 자연과 교감하며 그런 식으로 삶터의 새로운 역사를 가꾸어 나가고자 하는데,누가 감히 그것을 가타부타할 수 있으리오.
하지만 봉양면기의 풍수적 압권은 단연 옛 도리원, 조상이 보여주었던행주형 지세와 연관된 일련의 행태들이라 생각된다.
갈뫼봉이나 장등산에 올라 도리원 터를 한번 내려다 보라. 안평천이도리원 터의 뒤(北)를 돌고, 봉황천(혹은 쌍계천)이그 앞(南)을 감싸 흐르고 있다.
그 두 하천 줄기 사이에 놓인 도리원 터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배(舟)와 같은 모습이다. 더구나 그 배의 뾰족한 뱃머리는 곶(串)처럼 가늘게 뻗어나온 저
시봉산(枾峰山 혹은 가마봉) 줄기의서남쪽 지맥 끝과 연결돼 있다.
영락 없이 물 위에 떠 있는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듯한 형상이다. 그러나옛도리원과 구미리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근심사가 있었으니, 그것은 곧 그 연결된 지맥 일부 凹처가너무 허해 혹여 배가 떠내려 가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배를 직접 타고 있는 도리원 사람들로 봐서는 배가 안정을 잃고 표류하는 것이 싫었을테고, 그 배의 서쪽 끝 원지(院旨 혹은 원마을)에 인공 솔밭을 만들어 조상의 분묘지로 삼고 있었던 구미리의 아주신씨(鵝洲申氏)들로 봐서는 배가떠내려 간다는 것은 곧 조상을 잃는 것이나 진배없어 여간 걱정이 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묘책이 바로 그 허결처에 비보(裨補: 지리적으로 모자라는 부분을 보완하는 것) 조산(造山)을 만드는 일이었다.
즉, 그 凹처에 배를 묶어 둘 수 있는 계주(繫柱)꽂일대를 파묻은 후, 그위에 인공 조산을 만들어 놓을 것 같으면 그것은 마치 계주를 꽂아 놓은 것과 같은 형상이므로 배가 요지부동하지 않겠느냐는 믿음이었다.
'구장지'에서 그 산을 '소부(小阜)'라 일컫기도했다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조산은 그 책이 저술되기 훨씬 이전에 조성되었던 듯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조산이 '말뚝무덤'이라는 색다른 이름으로 전해내려 오더니 엉뚱하게도 그 무덤은 1990년 10월 모 대학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파헤쳐지고 만다.
누군가가 그것을 고총(古塚)으로오해했거나 아니면 말로만 전해내려 오던 '말뚝무덤'의 실체가궁금하여 발굴을 의뢰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무덤에서 나온 것은 암반을 파고 심어 놓은 구멍지름
30cm, 높이 30cm 되는돌절구 모양의 계주꽂일대가 전부였다.
다행히 그 조산은 발굴된 직후 즉시 재조성된 바 있지만, 지금은 또도리원 우회도로 개설로 인해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다.
하기야 그보다 더 위쪽에서 선착장 구실을 톡톡히 해주던 부엉이덤 자체가 중앙고속도로 건설로 다 망가져 버렸는데그 조산이 남아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그토록 행주형 지세의 배를 붙들어매 두기를 염원하고, 그것도 모자라 도리원 땅에서 재물을 많이 모으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돈을 벌면 10년안에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불거십년지지(不居十年之地)'의 철칙까지 세워두었던 도리원 옛조상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런 대동적(大同的)인삶터관은 이제는 영영 찾아볼 길이 없을 듯하다.
장등산에 올라 도리원 터를 내려다 보니 5번과 28번 국도, 무태산 자락을 끊으면서 새로 난 우회도로와 간점산의미골(尾骨)을 깎아내고 들어선 중앙고속도로가 이리저리 엉켜혼잡한 모양새를 연출하고 있다.
하루 평균 3만여대의 차량이 지나다닌다는 말을 들은 탓인지 굉음으로산울림 되어 돌아오는 차량 소음이 엄청 더 시끄럽게 느껴진다.
아! 그토록 산자수명하고 고즈넉하던 부수선혈(浮水船穴)의 도리원 터가 노중선혈(路中船穴)이 되어버리다니, ...실로 애석한 노릇이다. 어떤 주민은, 배의 몸체에 가능한한 많은 교량과 도로를 갖다 붙이는것이 곧 행주형 혈(穴)의 허약함을 비보하는 동시에 지기를돋워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지만, 닻풀린 배가 우왕좌왕하는 것이 오죽 보기 싫었으면그런 자조적 이면서도 역설적인 삶터 지리관을 표출하였을까. 하지만 마냥 낙담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일, 옛 도리원 조상들의 삶터 지리정신을 이어받아 이제부터라도 명당 관념적인 유희는 접어두고, 보기 흉한 곳을 비보숲으로 가린 다든가 아니면 도로 옆으로 방음벽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보다 실질적인환경비보운동을 꾸준히 펼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도리원 터를 조금이라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 같기 때문이다.
의성군 봉양면기 중심지인 도리원에서 동북쪽으로 불과 2Km 떨어진곳에 그 겉모습이 매우 예스런 마을이 있다. 바로 아주신씨(鵝州申氏)집성촌인 구미리(龜尾里)다. 1612년에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1562-1624)에 의해 택리(擇里)된 그 마을에는 지금도 고색창연한 기와집과 정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뿐더러 도와(陶窩) 신정주(申鼎周.1764-1827)가그 터의 내력에 대해 기술해 놓은 '구장지(龜莊志)'도 전해온다.
필자가 과문하지 않다면 그 책은 우리 나라 최초의 마을지일 가능성이높다.
남다른 역사를 가꾸어 온 마을답게 구미리는 물론 '좋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남대천(옛 長川)과 쌍계천(옛 下川)이 수구(水口: 물이 빠져나가는 곳)를 이루는 섬개들 끝 부근에서 합류할 뿐만 아니라북쪽의 가마봉 주릉을 병풍삼은 마을터 앞쪽으로 넓은 구미들이 펼쳐져 있어 판국 자체가 무척 밝고 명랑하다. 게다가마을공간 구성요소 하나 하나가 모두 제자리를 찾아 입지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퍽 짜임새가 있다.
크게는 주택들과 경지, 못(池)이, 그리고 작게는 종택과 정자 같은 것이 마땅히 있을만한 자리에모두 터잡고 있다는 말이다.
구미리처럼 주어진 삶터 자연에 크게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적소(適所)마다 최선책의 유관적합한 토지이용을한 마을터를 필자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하늘이 내린 복지(福地)를'좋은 터'라 한다면, 구미리는주어진 삶터의 고유한 멋까지 살려놓은 그야말로 '훌륭한 삶터'의전형이라는 생각이다.
부분(특정 삶터의 토지이용)이전체(국토 전체의 토지이용)의 귀감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아마도 구미리와 같은 마을터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삶터다운 삶터를 만드는 데 사람들의 토지관(혹은 지리관)이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를 암시해 주고, 또한 아름다운삶터를 구축하는 데 절제와 적소성(適所性)을 겸비한 토지이용이얼마만큼 소중한가를 일깨워 주는 터, 그 터가 곧 구미 마을터인 것이다.
구미리는 주산격인 가마봉(신성하고 거룩하다는 뜻의 옛말 '감'에서 '가마'가 생겼을 법함) 남쪽자락의 동부(옛東邊)와 서부(옛 西邊),그리고 못안 마을(옛 池內村)로 구성돼 있다. 그중에서 오봉공(公)이 입향하면서 처음 터잡은 곳은 지내촌이다. 그는 이웃한 상리(上里 혹은 新禮洞)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마도 구호(龜湖: 구미리의 옛 이름)의 터 됨됨이를 훤히 꿰뚫고 있었을 게다.
그곳은 가마봉 지맥이 원(圓)처럼둥글게 감싸고있고, 그나마 트인 개구부 쪽으로는 못(池)이 조성돼 있어 거의 별외의 세계나 다름없다.
지금도 구미못안 마을에 들어가면 선경과도 같은 그 지세 맛에 흠뻑 도취되어 저절로 안빈낙도 하고픈 마음이 이는데, 예전에는 오죽 더 했겠는가.
관직에서 은퇴한 그가 그런 적소를 골랐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과연 풍수에 정통한 유학자였던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가 그곳을 새로운 삶터로 정할 때 풍수를 고려했다는기록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200여년 뒤에 저술된 '구장지'에서조차 기껏해야 구미리의 주산과 안산 정도를 논하고 있을뿐인데, 어찌그가 풍수를 알고 그 터에 복거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공교로운 일은 그 터가 필자의 눈에는 회룡은산형(回龍隱山形)의 대길지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반적인 지세가 수성산형(水星山形)인데다 지맥이 Ω와 같은 형태로 굽이 도니 영락없이 용이산에 돌아와숨는 모습이다.
비록 선인(善人)에게는하늘이 명당을 모르게 내린다는 옛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그런 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묘하다는 생각이다. 공교로운 일은 비단 그뿐이 아니다.
구미들 너머로는 왼쪽부터 차례로 삼보산(三寶山), 구산(龜山), 천방산(天放山.선방산은 잘못된 표기임), 금산(錦山) 등이 이른바 안산으로서 그 대길지를 받쳐주고 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악산(惡山)인것이 없다.
특히 구미리에서 바라보이는 구산의 모습은 꼬리를 늘어뜨리고 엎드려 있는 거북의 형상을 그대로 쏙 빼닮았다.
바로 그런 구산의 모습이 구호라는 지명을 구미로 바꾸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구산 남쪽자락의구산리 사람들이 그 꼬리부분을 오히려 거북의 머리로 여기고 있음을 내 모르는 바 아니나 무릇 그어떤 산도 보는 위치에 따라 천변만화의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것인즉, 더군다나 구미리 사람들이 예나지금이나 자신들의 삶터를 조선 8대 구미리 중의 한 곳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 자연을 마음속으로내면화하는 일이 얼마만큼 소중한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설상가상 이제부터는 또 구미리가 용과 거북이라는 두 영물이 조화를 이루는 길지 중의 길지로 재인식될 터이니, 그 또한 어찌 공교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쏜가.
그런 관념적인 터 인식에 못지않게 구미리의 실제 인문 경관(景觀)들도 하나같이 빼어난 입지성을 뽐내고 있다. 구미못으로 올라가는 입구도로 바로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종택과 오봉공 사당만 봐도 그렇다.
그 둘은 원래 지내에 있었으나 후일 모두 지외(池外)로 옮긴 것이다. 아마도 구미 못의 저수량을 늘리다 보니 이건(移建)이 불가피했던 모양이다. 하기야오봉공이 일찍이 구미보(龜尾洑)를 축조하여 저 길부(길천1리)에서 구미리까지 장장 4Km에 달하는 관개수로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 후손인들 어찌 가문의 영화보다 대동의 삶을 더 중시하지 않았겠는가. 그러고보면 마치 여의주와도같은 반월형의 동산(東山)자락에 원래부터있었던 낙선당(樂善堂:오봉공의 獨子 孤松 申弘望의 서당)과 더불어 종택과 오봉공의 사당이나란히 함께 들어선 것도 어찌 생각하면 보본반시의 아주신씨 가문 복록인듯하다.
구미리 조상들의 삶터 이용 지혜는 서원과 정자 터 선정, 그리고 명당지키기 행태에서 그 극치를 보여준다. 오봉공이 강서(講書)하기 위해 복축(卜築)했다는 장대리(藏待里) 묵방산(墨坊山 혹은 강당산) 기슭의강당(지금의 장대서원)터,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1731-1812)이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었다는 금산(錦山)자락 쌍계천변의금연정사(錦淵精舍: 1981년에 금산서원으로 승격)터, 그리고 구미못안 마을에 있는 삼지당(三知堂.申漢傑의 강학지소)과 창암정(蒼巖亭.申熙大의 유덕을 기려 1981년에 후손들이 세운 정자)터 같은 곳에서 폐부 깊숙이 다가오는 느낌을 한번 비교해보라.
마음이 갑자기 굳세지는 곳도 있고, 마음이 물 흐르듯 맑아지는 곳도있으며, 처연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곳도 있다. 제각기 다른 그런느낌이바로 터가 지닌 맛이자 위력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오봉공과 관계있는 장대서원터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자신이 태어난 상리에 매우 가까이 위치한 강당산을 유년시절부터 즐겨찾았던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가 새로운 삶터를 구미리에 정했으면서도 굳이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강당산 기슭에강학소를 마련했다는 것은 곧 그가 그 터의 됨됨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장대서원터에서느껴지는 기운은 실로 호쾌하기 이를 데 없다.
쌍계천변의 넓은 들을 굽어보고 천방산 주릉을 응시하는 그 앉음새는 남아의 기상 바로 그 자체다. 게다가 뒤를 두르고 있는 강당산의 자연 석병(石屛)과 서원터 주위로 군데군데 널려 있는 큰 바윗돌들은 선비다운 굳은 의지와 절개를 심어주기에 안성맞춤인 자연지물이다. 혹자는 왼쪽 멀리 떨어진 산능선 凹처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의흥 고을 선암산의 엿봄을 꺼려할 지 모르겠으나그 봉우리의 형상은 알고 보면 어사모(御史帽)로 얼마든지관념 전환될 수 있는 내용이다.
여헌 장현광이 '주역(周易)'에 나오는, "덕기를 몸에 감추고(藏器於身) 때를 기다려 움직인다(待時而動)"는 말에서 장대라는 글자를 따와 서원 이름을 지어준 것도 어찌 생각하면 바로 그런 터에서 길러진 호쾌한기상을 남용하는 것을 경계한, 일종의 지명 비보책(地名 裨補策)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구미리 사람들의 그같은 지혜로운 삶터 활용 정신은 일제시대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일제는 원래 대구와 안동을 잇는 신작로를 구미 마을안을 통과하도록 설계했다.하지만 주민들이 가만 있을 리는 만무한 일, 조정 끝에 그 노선은 결국 마을로부터 멀리밀려나가게 되었는데, 현재의 구안국도가 구미마을로부터 남쪽으로 500여m 떨어진 지점에서 동서로 길게 나있는 것도 알고보면 그런 내력이 있다. 그덕분에 오늘날 구미리 사람들이 그야말로 고즈넉한 주거 환경을 향유할 수 있게 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렇다고 구미리 터에 전혀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을이 밖으로너무 노출돼 있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마을 바로 앞이라도 좋고, 국도변이라도 좋으니, 동서로 길게 비보숲을 만들어 밖에서 마을을쉬이 들여다볼 수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면 환경심리적으로도 안정감을 확보할 수 있을 뿐더러마을의 품격도 한층 높아진다. 젊은이들이 모두 마을을 떠나 봉양면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봉양초등학교마저폐교된 마당인데, 삶터를 가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다소 의아해 할 사람도 있겠지만 터라는것은 꼭 그런 게 아니다. 교통과 정보통신망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의 공간 극복 한계력도 자연히 증대될것인즉, 그야말로 '터다운 터'를 지키고 있는 구미리가 각광받는 날이 반드시 오게돼있다.
"인간의 논리는 덧없는 것이지만 땅의 논리는 영원한 것이다." 그것이 곧 구미리 터의 지난 역사와 현재의 됨됨이가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교훈이지 않은가.
가마봉 줄기를 병풍삼고 넓은 구미들과 남대천을 끼고 있는 의성군 봉양면 구미마을 전경. 앞쪽 가운데 둥글게 볼록 솟은 산이 동산(東山)이며, 그 왼쪽으로 움푹 들어간 곳이 못안마을이다. 밝고 명랑한 터 기운과 합리적인 토지이용이 돋보이는 마을이기는 하지만, 비보숲을만들어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마을 모습을 가릴 필요가 있다.
삼지당에서 내려다본 못안마을 정경. 선경과 다름없는 풍광을 지닌 이터는어딘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오른쪽 앞으로 보이는 창암정터는 마치 한 척의 배가 물 위로 나아가려 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묵방산(속칭 강당산)의석병을 배경으로 터잡고 있는 장대서원 모습.
마을 맨 위쪽 왼편 작은 건물이 경현사(景賢祠)이고, 그 오른편 큰 건물이 바로 장대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이다. 원래 오봉공 신지제의 강학지소였던그 터에 올라보면 남아의 호쾌한 기상이 저절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