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폐교된 초등학교 옆에 자리하고 있다. 미원면가양리와 미원의 문방리 쪽으로는 아주신씨가 대성인 듯 하다 곳곳에 아주신씨 문중의 재실과 더불어 유허비와 효자비등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화창리 2-3번지에위치하고 있는 아주신문(鵝洲申門) 삼효각(三孝閣)은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15호로지정되었다.
삼효각은1655년(효종6) 효자(孝子)조산대부(朝散大夫)신협(申鋏, 1605~1691),1683년(숙종9) 양일당(養一堂) 신지익(申之益, 1596~1640)과 그의 아들 신심(申鐔, ?~?) 부자의효행을 기리기 위한 정려이다. 숙종 29년 1703년에 이곳에 아주 신씨(鵝洲申氏) 3효자의 효행담을 합쳐 모신 것이다.
아주신씨 삼효각은 아주신씨(鵝洲申氏) 3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1655년(효종 6) 효자 신협(申鋏)의 효자각이 세워지 고, 1683년(숙종 9) 효자 신지익(申之益)과그의 아들 효자 신심 의 효자각이 세워졌다. 1703년(숙종 29) 3인의 효자각을 합설 하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752년(영조 28)에중건하고 1972년에 보수한 것이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살로 막고 안에는 3인의 정문 편액을 걸었다. 또한1686년(숙 종 1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가 쓴 아주신씨선세사실(鵝洲申氏先世事實)과 1703년 (숙종 29)에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지은 삼효사실기(三孝事實記), 그리고 1762년(영조 38)에 송가상(宋可相)이지은 삼효 려중수기(三孝閭重修記)가 걸려 있다. 밖에는 ‘삼효려(三孝閭)’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지금은 주위에 철울타리를 두르고 철문 을달았다..
정려는 팔각 돌기둥 고주초석(高柱礎石) 위에 나무기둥을 올렸으며,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 ‘효자학생신협지문(孝子學生申梜之門)’, ‘효자조산대부행영숭전참봉신지익지문(孝子朝散大夫行永崇殿參奉申之益之門)’, ‘효자학생신심지문(孝子學生申鐔之門)’ 3효자의 정문 편액을 걸었다.
그밖에도 1686년(숙종12)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가 쓴 ‘아주신씨선세사실(鵝洲申氏先世事實)’과 1703년(숙종29)에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지은 ‘삼효사실기(三孝事實記)’ 그리고 1762년(영조38)에 송가상(宋可相)이지은 ‘삼효려중수기(三孝閭重修記)’가 걸려 있다. 밖에는 ‘삼효려(三孝閭)’이라는현판을 달았다.
그들의 효행을 살펴보면 효자 신협은 어머니가 병환에 들자 손가락을 단지하여 그피를 마시게 하여 병을 낫게 했고, 어머니께서 한 겨울에 고사리를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산을 헤매고다녀 고사리를 구해와 맛있게 음식을 해드렸다고 한다. 이렇듯 미원면 화창리의 넓은 들판에 아주 신문삼효각은 아름다운 효행이야기를 담고 후손들을 품어주고 있다.
아주신씨는 조선 영조 때 편찬된 《문헌비고》와1924년에 발행된 《조선씨족통보》에 고려 때 아주현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신 영미(申英美)가시조로 기록되어 있으며, 대표적 인물은 신우(申祐)인데, 그는 고려 충혜왕 때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를 지냈으며, 지극한효자로서 경상북도 의성(義城) 에 정문과 효자비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크게 벼슬을 한 사람은 없으나 학자와 효행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다.우의 6대손 신원 록(申元祿)은 성리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효행이 뛰어나 효자정문이 세워졌고, 그의손자 3형제 중 신적도(申適道)는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찰방(察訪)을 지냈는데, 역시 학문과 효행이 뛰어났다. 신달도(申達道)는 삼사(三司)를 역임하고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신열도(申悅道)는 직언(直言)으로 유명하고병자호란 때 역시 척화를 주장했으며, 장령을 거쳐 능주(綾州)목사를 지냈다. 또 우 의 9대손신지제(申之悌)는 임진왜란 때 예안(禮安)현감으로 용인(龍仁)싸움에 참전하여 선무(宣武)·호종(扈從)의 두 원종공 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의 아들 신홍망(申弘望)은 대간·수령·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신지익(申之益, 1588~1649)의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거(舜擧), 호는 양일당(養一堂)이다. 승지(承旨)를 지낸 오재(梧齋) 신지제(申之悌)의 종제(從弟)로 학행(學行)이 있었다.
신지익은 어머님이 중병으로 고생하자 밤낮으로 쾌유를 하늘에 기원하였다. 단지주혈을 하여 어머님의 입에 피를 흘려 넣는 등 어머님의 병환을 완쾌시키기 위하여 효성이 지극 하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기절하였다가 가까스로 소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효자 신심은 신지익의 아들로서 어려서 부터 부모의 효를 본받아 예의가 바르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병자호란을 당하여서는 피난중에 청나라 군사에게 발각되여 청나라 군사가 부모를 해치려 하자 가로막고 살려주기를 빌었다. 청나라 군사도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풀어주었다. 이런 그의 효행심이 널리 알려지자 숙종임금께서 정려를 명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였다.
효자 신협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극진한 효성으로 주위에 칭찬이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 입속에 피를 흘려넣음으로 어머니를 소생시켰다또한 어머니가 한 겨울에 고사리가 먹고 싶다고 하자 눈 덮힌 산속을 고사리를 찾아 헤매다 바위틈에서 고사리를 발견하여 어머 니를 공양하였다. 신협은 또한 어머니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여 꿩을 잡으려고 산속을 헤매던 바 매가 꿩을 잡아 신협앞에 떨어트려줌으로서 어머니를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 모든것이 신협의 효성에 감동한 하늘의 복이였다.
‘가경리’는 가양리의 중심 마을이다.이 마을은 정조 때에 ‘가양리(佳陽里)’로 조성되어그대로 사용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직 전에는 ‘가경리(佳景里)’로, 그 후 다시 ‘가경자(佳景子)’로 바뀌었다. ‘가양리’․‘가양골’․‘가양동’은 흔한 지명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들이 ‘갱이’․‘갱골’과 함께사용된다. ‘갱이’․‘갱골’에서 ‘갱’은 두 가지로해석된다. 하나는 ‘강(江)’의 변화형으로, 대개는 강과 인접한 지명에 사용된다. 다른 하나는 ‘가양(可陽)’이는 ‘개양 (開陽)’의 변화형으로, ‘볕이 잘 든다’와관련된다. 본 예는 ‘가양(佳陽)’으로표기되나, 후자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가 양리’는 ‘볕이 잘 드는 마을’로 풀이된다.‘가경골’․‘가경동’은전국에서 그 예가 더러 발견된다. 그리고 이들에는 산수가 아름답다는 유래담이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가 경리’나, 변화형 ‘가경자’는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로 해석된다.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가경자’가 ‘가정자’와 함께 사용되 어,‘떡갈나무정자’를 뜻하기도 한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어머니 병환에 목욕재계(沐浴齋戒) 후 북두칠성(北斗七星)에 빌고, 손가락을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목 놓아 큰 소리로 울다가 혼절하기도 하였으며, 상중에는삼베옷을 벗지 않고 집상(執喪)하는 등 효행(孝行)이 높아서 신지익과 사촌 신협(申鋏), 아들 신심(申鐔)과함께 충북 청주시 청원구 미원면 가양리 솔골 삼효각(三孝閣)에 1703년(숙종29) 효로써정려(旌閭)되었다. 손자신응태(申應泰)는 우암(尤庵)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사서제요도설(四書提要圖說)≫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행장(行狀)을 찬(撰)하였고, 공(公)에 대한 일이 ≪삼강록(三綱錄)≫에 기재되었다. 청주(淸州)의 검암서원(儉巖書院)에배향(配享)되었다.
- 旌閭 內容 ∙孝子 朝散大夫 行永崇殿 參奉 申之益之門 ∙孝子 學生 申鋏 之門 ∙孝子 學生 申鐔 之門 三孝子중 之益, 鐔 父子의 旌閭 內容은 肅宗 12년(1686)에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이 짓고 쓴 것이며, 之益의 손자 응태(應泰 1643~1728)는우암(尤庵)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 일찍이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과거(科擧)에는 끝내 오르지 못하고, 그뒤 뜻을 달리하여 학문연구에 전심, 역학(易學)과 성리학(性理學)에 깊이들어갔으며 천문․역수에도 밝았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賜死되자 이에 항변(抗辯)하는 내용의 上疏文을 써서 대궐 앞에 나아가 시위하는 등, 스승의 신원을 위하여 힘썼으며, 만년에는 후진양성에 힘써 문하에많은 학자가 배출되었고. <사서제요>와 <천명태주도> 등의 저서를 남겼다.
효를 언급한 최초의 문헌은 중국 <서경>이다. 아비는 친하고(父親) 어미는 자애롭고(母愛) 자식은효도하고(子孝) 형제는 우애롭고(兄友) 아우는 공손하라(弟恭). 이 중 자효를 최고로 쳤다. 공자에 이어 맹자가 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漢代에 이르러<효경(孝經)>이 발간된다. 공자와 그의 제자 증삼이 묻고 답한 것 중 효에 관한 것만 추린 책으로"죄 중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불효"라는 글귀가 백미다. 효경은 효가 중국과 한국의 통치사상과 윤리관으로 설정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행의 근본인 효, 효자들이 어떻게 실천했을까?
부모 병을 고치기 위해 살점을 베어 부모에게 먹인다는 할고료친(割股療親). 1858년 경북 고령 조성인은 모친이 사경에 이르자 자신의허벅지 살을 베어 조약(造藥)해 드려 병이 나았다<한국구비문학>한다.
김구 선생도 할고 효자로 유명하다. 손가락을 잘라부모님께 피를 마시게 한 뒤 자른 손가락은 삶아 드리는 단지(斷指)도효행의 한 방법이었다.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 부모님께 드린 효자도 많다. 신지익(조선인조)과 그의 아들 신심 ,조카 신협이다. 청원군 미원에 삼효각(三孝閣)이있다.
더욱 더 살벌한 효행도 있었다. 24명의 효자를기록한 중국 <이십사효(二十四孝)>를 보자. 곽거 부부 이야기는 모골이 송연할 정도다. 노모를 모신 그들은 삶이 궁핍해 자칫 노모를 굶겨 죽일 형편이었다. 노모를살리기 위한 방법은 아들을 생매장해 식구(食口)를 줄이는것. 애는 다시 낳을 수 있지만 노모는 한 번 죽으면 끝이기 때문이다.허나 매장을 위해 땅을 파던 중 구덩이에서 황금이 나와 그 황금으로 노모를 잘 모셨다.(신라시대이런 효자가 있었다. 손순이다. 그는 어머니를 굶어죽일 수없어 밥을 축내는 자신의 아이를 묻어 어머니를 잘 봉양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왕상의 효심은 가슴을뭉클하게 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계모가 병상에 누워 잉어를 먹고 싶다하자 한 겨울에 잉어를 잡기 위해맨몸으로 밤 새워 얼음을 녹이고 있었다. 하늘이 감동, 갑자기얼음이 깨지면서 잉어 두 마리가 튀어 올랐다. 잉어를 먹은 계모는 병상에서 일어났다. 어버이의 변을 직접 맛 보아 건강상태를 점검해 장수토록 했다는 유검루의 효행은 진한 감동을 준다.
공자 제자들도 빠지지 않았다. 자로는 백리길이 멀다하지않고 쌀을 얻어와 부모를 봉양했다. 자신은 쌀겨와 산나물로 허기를 달랬지만 부모님은 쌀밥을 드시게 했다. 특히 공자를 감동시켰던 효자는 민자건. 생모를 잃은 그는 계모를모시게 됐다. 이복형제 셋을 낳은 계모는 유독 민자건을 괴롭혔다. 계모는친 자식에게 솜옷을, 민자건에겐 홑옷을 입혔다. 뒤늦게 이를안 아버지가 계모를 내 쫓으려했다. 민자건은 "저하나만 홑옷으로 떨면 되지만 어머니를 쫓아내면 네 아들이 홑옷으로 떨게 됩니다"라며 아버지를말렸다. 또 다시 홀아비로 살아야하는 아버지의 불행을 홑옷으로 막으면서 효를 실천했다.
아버지 '父'는등에 멘 두 개의 도끼를 의미한다. 도끼는 가족이나 부족을 위한 먹이 사냥은 물론 적과 맞서 싸우는무기다. 어머니 '母'는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먹이제공과 함께 위협을 막아 주셨고, 어머니는 홀로 설 수 있는 못자리와 북풍한설을 막는 문풍지가 되는데 몸을 아끼지 않으셨다. 부모는 자식에게 조건이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호천망극(昊天罔極)이라했다. 호천은 서쪽과 여름하늘로, 아홉 개 하늘 가운데 가장넓고 높고 끝이 없다. 부모의 은혜는 넓고 끝이 없는 호천과 같아서 절대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축문에 빠지지 않는 글귀 아닌가? -호천망극 근이 청작서수-
아무리 효도를 한다 해도 어버이의 은혜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늘 불효자다. 허나 부모는 자식을 나무라지 않고 효를 기다리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