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아주(鵝洲), 초명은 봉조(鳳朝), 자는 성지(成之), 호는시남(示南)이다. 아버지는은통덕랑(通德郞) 신홍교(申弘敎), 어머니는 풍창군(豊昌君) 류유(柳濡)의 딸인 공인(恭人) 풍산 류씨(豊山 柳氏), 조부는통덕랑 신황(申煌), 증조부는 신중모(申重模), 처는 성언병(成彦秉)의 딸 숙부인(淑夫人) 창녕성씨(昌寧 成氏), 후처는 이제동(李濟東)의 딸 숙부인 진성 이씨(眞城李氏)이다.
[활동 사항]
신면주(申冕周)[1768~1845]는1768년(영조 44) 7월 22일 경상도 의성현 교전리(校前里)[현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학문에 두각을 보여 5세에 글자를 알았고, 7~8세에 글을지을 줄 알았으며, 14세 때에는 도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1791년(정조 15)에는 형 신면조(申冕朝)와 함께 어부정(漁父亭)을 짓고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합격하여, 이미 생원시에 합격했던 신면조와 함께 형제가 나란히 성균관의 적(籍)을 가지게 되었다. 1805년(순조 5)에는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곧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에임명되면서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810년(순조 10) 율봉도 찰방(栗峰道 察訪)에임명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818년(순조 18)에 다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병조 좌랑(兵曹 佐郞)에 임명되었으나, 형 신면조와 모친,그리고 외아들 신명협(申命協)의 상사가 잇따라일어나 고향에 머물러야 했다.
1821년(순조 21) 사간원정언(司諫院 正言), 1822년(순조 22)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으며, 1825년(순조 25)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 선전관(宣傳官)을겸직하였다. 이어 1826년(순조 26)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함경도 도사(咸鏡道 都事)를 역임한 후, 1828년(순조 28) 홍문관 교리(弘文館 敎理)에임명되어 경연 검토관(經筵 檢討官)과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을 겸임하였으나, 당시대리청정 중이었던 효명 세자(孝明 世子)에게 병환을 이유로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1829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며, 이어 시강원 필선(侍講院 弼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홍문관 교리 등에 차례로 임명되며 세자와 서연(書筵)에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했다.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만장(挽章)을 지었다. 이어이듬해까지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홍문관 수찬, 홍문관 부교리, 다시 사헌부 집의 등에 임명되나 병환으로 오래 관직에있지를 못하였다. 한편, 신면주는 효명세자 사후 홍문관에있으면서 효명세자의 측근들을 공격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이 효명 세자 대리청정 때 전권을휘둘렀다는 이유에서이다. 우선 단독으로 상소를 올려 효명 세자의 최측근이었던 김로(金鏴)와 그와 체결한 이속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또한 김노경(金魯敬)의 국청을 요구하는 삼사(三司)의 합계(合啓)에 참여하기도 했다.
1834년(헌종 즉위년) 순조장례 때 봉폐관(封閉官)이 되었으며,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835년(헌종 1) 홍문관부수찬이 되어 헌종을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소학(小學)』을강론하였으며, 이어 사헌부 집의,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병환이 도져 사직을 요청하였고, 헌종은 사직하는 신면주에게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렸다. 이 책은 당시 유행하는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내린윤음을 기록한 것이다.
은퇴 후 고향으로 낙향하여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845년(헌종 11) 8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이상정(李象靖)의 학통을 계승한 가학을 이어 받았다. 학문이 뛰어나 당시 영남 출신으로 드물게 홍문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수시로 경연·서연에 참석해 학문을 강론하였다. 유고(遺稿)인 4권 1책의 『시남선생유고(市南先生遺稿)』가전해진다. 이 책은 4세손 신석기(申碩基)가 1981년 편집·영인한 것이다. 여기에는 신면주가 홍문관 교리직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 명승지를 유람하고 작성한 기행문, 그리고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장례 때 지은 「왕세자만(王世子挽)」 등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아주 신씨 대동보』에는단촌면 은향촌(銀香村) 안영산(安永山)[현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관덕리]에 묘소가 자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시남선생유고(市南先生遺稿)』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교남지(嶠南誌)』
『아주 신씨 대동보』 (아주 신씨 대종회, 2012)
[지식연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면주
신상하(申相夏) 구암(矩庵)
한자申相夏
이칭/별칭계순(繼舜),구암(矩庵)
분야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인물
유형인물/문인·학자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시대근대/개항기
집필자이광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839년- 신상하출생
몰년 시기/일시1906년- 신상하사망
출생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묘소|단소-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성격유학자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대표 관직|경력향약장
[정의]
개항기 의성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계순(繼舜). 호는 구암(矩庵). 생부는신명호(申命祜), 모친은 김정진(金精進)의 딸 안동 김씨(安東金氏), 계부는 신인협(申寅協), 계모는 이관발(李觀發)의딸 영천 이씨(永川 李氏), 조부는 신면목(申冕穆), 증조부는 신만교(申萬敎)이다.
[활동 사항]
신상하(申相夏)[1839~1906]는1839년(헌종 5) 5월 7일 경상도 의성현 팔지리(八旨里)[현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할아버지신면구(申冕九)[생부 신명호의 부친]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5세 때 고문(古文)과 경전(經傳)을 두루 익혔다고 한다. 1853년(철종 4) 할아버지 신면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장성하면 유치명(柳致明) 문하에서 공부하라는 유언을 신상하에게 남겼다.
23세가 되자 신상하는 유언대로 유치명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 문하에서당대의 명유 이돈우(李敦禹), 김도화(金道和)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1864년(고종 1)에는 봉두산(鳳頭山)[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일대] 남쪽에 강학을 위한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이후 신상하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1891년(고종 28)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이헌영(李헌永)은 『향약절목(鄕約節目)』을 편찬한 뒤, 도내각 고을에 배포하며 향약 시행을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의성 지역에서도 향약 시행을 위한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신상하가 향약장(鄕約長)을맡았으며, 향교와 구호 서당(龜湖書堂)[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 위치]에서는 직접 강학(講學)을 하였다. 1893년(고종 30) 인근 군위현(軍威縣)으로 이주하였다가, 1895년(고종 32)에는 풍기군(豊基郡)으로다시 거처를 옮겼다. 1906년(광무 10) 3월 22일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는 4권 2책의 『구암집(矩庵集)』이 전하는데, 1955년 아들 신성환(申成煥)이 간행한 것이다. 『구암집』에수록되어 있는 「사문일수록(師門日受錄)」은 1861년(철종 12) 5월 7일부터, 18일까지 스승 유치명과 학문에 대해 문답한 것을 기록한것이며, 「향약절목후(鄕約節目後)」는 1891년(고종 28) 의성에서 향약을 시행할 때 그 의의와 유래 등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용학강의(庸學講義)」는 구호 서당에서 강학할 때 여러 문생들과의문답을 기록한 것으로, 이러한 글들은 성리학에 대한 신상하의 학문적 수준을 가늠케 해준다.
한편, 『구암집』에 수록된 아들 신성환의 유사(遺事)에 따르면, 신상하가 7대조신우석(申禹錫)[1638~1695]부터 자신 대까지, 선조들의 행록(行錄)과만뢰(挽誄)를 모아 『단구세적(丹邱世蹟)』 2책을 편찬했다고한다.
[묘소]
『구암집』의 행장과 유사에는팔지(八旨)[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 묘소가 자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구암집(矩庵集)』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아주 신씨 대동보』 (아주 신씨 대종회, 2012)
유교넷(http://www.ugy.net/)
신정주(申鼎周) 도와(陶窩)
한자申鼎周
이칭/별칭경백(景伯),도와(陶窩)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문인·학자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이광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764년- 신정주출생
활동 시기/일시1783년 - 신정주 향시에 급제
몰년 시기/일시1827년- 신정주사망
출생지- 경상북도의성군 봉양면 길천리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수학|강학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삼춘리(옥련사)
묘소|단소-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금산
성격유학자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학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경백(景伯), 호는 도와(陶窩). 신성구(申聖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신도발(申道潑)이고, 아버지는신종인(申種仁)이며, 어머니는선산 김씨(善山 金氏) 김기대의 딸이고,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 金氏) 김원묵(金元黙)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정주(申鼎周)[1764~1827]는3~4세에 글을 해독하기 시작해 7~8세에 『통감(通鑑)』, 10세에 『소학(小學)』과 사서(四書), 12세에삼경(三經)을 읽었다.1779년(정조 3) 옥련사(玉蓮寺)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듬해에는족부(族父) 신체인(申體仁)에게 수학하고,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다.
1783년 향시(鄕試)에급제하고, 이어 1809년(순조 9)에는 영남의 명망 있는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홍여하(洪汝河)가 편찬한 『휘찬려사(彙纂麗史)』 교정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구미[지금의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812년 『구장지(龜庄誌)』와「구미촌 향약(龜尾村 鄕約)」을 지어 주민 교화(敎化)에 힘썼다.
1817년 대구의 팔공산(八公山)에가서 평산 신씨(平山 申氏)와 아주 신씨가 분파되는 사적(事蹟)을 고찰하였다. 이후호서(湖西) 지방을 두루 유람하며, 여러 시와 글을 남겼다고 한다. 만년까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오로지 학문 연구와 향약 실시 같은 향촌 교화에 주력하여 ‘학행(學行)’으로 고을에서 이름을 높였다.
[학문과 저술]
문장에 능하여 많은 저술을남겼는데 「만록(漫錄)」,「호서 기행록(湖西 紀行錄)」 등이 6권 3책의 문집 『도와집(道窩集)』에 전한다.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자경육잠(自警六箴)」과 「암실명(暗室銘)」을 지어 자신의 경계로 삼았으며 『구장지(龜莊誌)』는 지금까지 아주 신씨가 세거하고 있는 구장(龜莊)[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의 지리지이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구미리 금산(錦山)에 있다.
[참고문헌]
『도와집(道窩集)』
『조선 환여 승람(朝鮮 寰輿 勝覽)』
『의성 군지』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 1998)
『아주 신씨 대동보』 (아주 신씨 대종회, 2012)
신체인(申體仁) 회병(晦屛)
한자申體仁
이칭/별칭 자장(子長),회병(晦屛)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문인·학자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이광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731년- 신체인출생
몰년 시기/일시1812년- 신체인사망
추모 시기/일시1977년 - 신체인 금산 서원에 배향
출생지- 경상북도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수학|강학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금연정사)
묘소|단소-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화전리 동곡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금산 서원)
성격유학자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학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자장(子長), 호는 회병(晦屛). 신숙범(申叔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신분구(申賁龜), 아버지는 신도만(申道萬)이고, 어머니는의성 김씨(義城 金氏) 김민행(金敏行)의 딸이며 부인은 풍산 유씨(豊山柳氏) 유후원(柳後元)의딸이다.
[활동 사항]
신체인(申體仁)[1731~1812]은3~4세 때 이웃집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면 말도 없이 그 집에 가서, 글 읽는 소리를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어려서 화장산(華藏山)[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일대]의 초당에서 공부하였고, 장성해서는 김낙행(金樂行), 임필대(任必大),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수학하였다. 30세 무렵에는 유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의술·병가·산수(算數)·복서(卜筮) 등 여러학문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1761년(영조 37) 향해(鄕解)에 응시해서 장원하는 등 학문적 명성이 있었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1782년(정조 6) 금산(錦山)[구미리]에 금연 정사(錦淵精舍)[현 금산 서원(錦山 書院)]가 완성되자 그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786년에는빙계 서원(氷溪 書院)의 교석(敎席)을 주도하며 통강례(通講禮)를 행하고자, 주자(朱子)의 월삭회약(月朔會約)을모방해 의절까지 정해 놓았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1788년 눈병으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자, 존양(存養) 공부에 열중하였다. 1807년(순조 7) 경술과 문장이 모범이 된다하여 의성 현령(義城 縣令)이 천거하였고, 경상도관찰사가 연이어 신체인의 학행을 조정에 계청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상정의 문하에서 함께공부하던 280여 명의 인사들과 호문학단(湖門學團)을 구성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호문학단 중에서도 그는 학문이 뛰어나호문육군자(湖文六君子)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의 문집으로는 12권 6책의『회병집(晦屛集)』이 전하는데, 19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회병집』 권6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은 천주교를 비판한 글로, 당시 천주교에 대한 영남 유림의 인식을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경(敬)’의 요체에 대해설명한 4권 2책의 『숭경록(崇敬錄)』을 저술하였으며, 정만양(鄭萬陽), 정규양(鄭葵陽) 형제의 어록인 『훈지양선생어록(塤篪兩先生語錄)』도 산교(刪校)하였다. 한편, 『아주 신씨 참판공 파보』에는 『징성록(徵省錄)』을 저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화전리 동곡(凍谷)에 있다.
[상훈과 추모]
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구산리에 있는 금산 서원에 신지제(申之悌), 신지효(申之孝)와 함께 배향되어 있다. 금산서원은 신체인이 강학을 위해 1782년 건립한 금연 정사를 1977년중건하고, 1981년 서원으로 승격한 것이다. 신체인의 위패는신지제와 함께 1977년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회병집(晦屛集)』
『숭경록(崇敬錄)』
『교남지(嶠南誌)』
『의성의 전통』 (의성 문화원, 1982)
『아주 신씨 참판공 파보』 (대보사, 1985)
『아주 신씨 대동보』 (아주신씨 대종회, 2012)
신정모(申正模) 이치재(二恥齋)
한자申正模
이칭/별칭경해(景楷),이치재(二恥齋)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문무 관인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이광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691년- 신정모출생
활동 시기/일시1719년 - 신정모 진사시에 급제
1719년 - 신정모 증광 문과에 급제
1728년 - 신정모 경상도 군위로 유배
몰년 시기/일시1742년- 신정모사망
추모 시기/일시1864년 - 신정모 복관
출생지- 경상북도안동시 풍산읍 상리리
거주|이주지- 경상북도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유허비- 경상북도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성격문신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대표 관직거창 현감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문신.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경해(景楷), 호는 이치재(二恥齋). 신채(申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대석(申大錫)이고, 아버지는 신덕일(申德溢)이며, 어머니는 이성구(李星耈)의 딸 예안 이씨(禮安 李氏)이고, 부인은 안이순(安履順)의딸 순흥 안씨(順興 安氏)이다. 숙부인 신덕순(申德洵)에게출계하였다.
[활동 사항]
신정모(申正模)[1691~1742]는 어려서는 중부(仲父)인 신덕호(申德浩)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장성해서는 이만부(李萬敷)에게 수학하였다. 1719년(숙종 45)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20년에 부정자, 1725년(영조 1)에 지평(持平)·정언(正言)·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 등에 임명되고, 1727년 병조 좌랑·강원 도사·병조 정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다가, 거창 부사에 임명되자 부임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난 때, 이를 막지 못하여 군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뒤 암행어사 이흡(李潝)이 전과를 재조사, 보고하는 과정에서 그 죄상을 과장하여, 1735년 다시 흥양(興陽)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충청도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적소에서 죽었다. 1864년(고종 1) 복관되었다.
[학문과 저술]
신정모는 귀양지에서 항상나라와 부모에게 충효(忠孝)를 다하지 못한 점을 부끄러워하며, 그 호를 스스로 이치재(二恥齋)라하였다. 문집으로는 6권3책의 『이치재집(二恥齋集)』이 전하는데, 이 문집은 1899년(광무 3) 후손 신상헌(申相憲)과신돈식(申敦植)이 편집·간행한것이다. 저서로는 10권3책의 『소행록(素行錄)』이 전해진다.
[묘소]
묘소는 오토산(五土山)[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오로리]에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팔성리에 그의 유업을 기린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영조 실록(英祖 實錄)』
『이치재집(二恥齋集)』
『소행록(素行錄)』
『의성 군지』 (의성군지 편찬 위원회, 1998)
『의성 지명 유래』 (의성 문화원, 2002)
『아주 신씨 대동보』 (아주 신씨 대종회, 2012)
[지식연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정모
신봉석(申鳳錫) 자족재(自足齋)
한자申鳳錫
이칭/별칭 자족재(自足齋),석여(錫予)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문인·학자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용연리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이광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631년- 신봉석출생
활동 시기/일시1655년 - 신봉석 성균관에 입학
1655년 - 신봉석 응제시에 장원 급제
1657년 - 신봉석 한성시에 급제
1657년 - 신봉석 성시에 낙방
1677년 - 신봉석 「진오폐소」 올림
몰년 시기/일시1704년- 신봉석사망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용연리
묘소|단소-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신안리 의곡
성격유학자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대표 관직|경력선교랑(宣敎郞)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학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석형(錫亨). 호는 자족재(自足齋). 아버지는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신견(申堅), 어머니는 신효성(申孝誠)의 딸인 평산 신씨(平山 申氏), 할아버지는신사도(申師道),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역임한 신심(申伈), 부인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경(金鏡)의 딸 의인(宜人) 안동김씨(安東 金氏)이다.
[활동 사항]
신봉석(申鳳錫)[1631~1704]은1631년(인조 9)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덕과 총명을 보여주어,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전한다. 7세 때 신봉석이 ‘학서(學書)’를 청하였는데, 몸이유약하다며 부친이 허락하지 않았다. 13세 때에는 부친이 통발 속의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자, 신봉석은 단지 잉어 한 마리만 가지고 왔다. 부친이 그 까닭을 꾸짖어묻자 신봉석은 “차마 모두 잡아오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일화가 있다. 특히 신봉석은 효성이 지극했다고 전해지는데, 부친의병환 때에는 얼음을 깨어 물고기를 잡아오고 상분(嘗糞)하며간병하였다. 또한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했는데, 모친이 20리 밖에 떨어져 계셨기에 매일 곡을 하면서도 가서 살피기를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몸가짐도 단정하여 의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 없었다고 하며, 부모제사 때가 아니면 함부로 돼지와 닭을 도살하지 않았다.
신봉석은 부친의 계(階)로 인해 선교랑(宣敎郞)에 통적(通籍)되었으며, 일찍이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1655년(효종 6) 어느 날 성균관의 모든 유생이 삼청동(三淸洞)에 놀러 갔지만, 오직신봉석과 호남의 한 유생만이 성균관을 지키고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효종이 불시에 성균관에 내시를 보내어두 유생에게 친히 시제를 내려 글을 짓게 하니, 둘 중 장원은 신봉석이 차지하였다. 이에 효종은 신봉석에게 집을 내리려 했지만, 대간(臺諫)들의 반대로 종이·붓·먹만 상으로 내렸다. 1657년(효종 8) 한성시(漢城試)에는급제하였으나, 성시(省試)에는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낙향하여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으며,스스로 ‘자족재(自足齋)’라는 호를 짓고 편액(扁額) 한뒤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고향에 있으면서도 국사에대해서는 매우 강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677년(숙종 5) 「진오폐소(陳五弊疏)」를올렸는데, 이는 당시의 폐단을 5개조로 나누어 지적한 것으로, 그 첫째가 세금 징수의 폐단, 둘째가 군역의 폐단, 셋째가 가난한 백성이 더 가난해지는 폐단, 넷째가 영남의 인재를쓰지 않는 폐단, 다섯째가 인재 등용의 폐단이다. 이어 신봉석은「의청영남행경대동소(擬請嶺南行京大同䟽)」라는 상소를 올려, 대동법(大同法)의 영남지역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후 거처를 지금의 의성군 의성읍 용연리로 옮겼으며, 초택(草澤)에서 머물다 1704년(숙종 30) 세상을떠났다.
[학문과 저술]
신봉석의 문집으로는 3권 1책의 『자족재유집(自足齋遺集)』이 전한다. 이 책은 신봉석의 8세손신용섭(申龍燮)이 편찬하였으며, 1921년경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권2에 신봉석이 올렸던 두 편의 상소문인 「진오폐소」와 「의청영남행경대동소」, 그리고「자족설(自足說)」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신봉석은 「자족설」에서 “자족의 도는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마음에 있으니 그것을 취하여도 금하는것이 없고, 그것을 써도 다하지 않는다.”라며 자족의 의미와자신의 신념을 풀이해 놓았다.
[묘소]
『자족재집(自足齋集)』 묘갈명에는 현의 서쪽에 위치한 의곡(蟻谷)에 묘소가 자리한다고 하였는데,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신안리이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용연리에 신봉석의 학문과 효행을 기리기 위한 재사인 자족재(自足齋)가건립되어 있다.
[참고문헌]
『자족재유집(自足齋遺集)』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아주 신씨 대동보』(아주 신씨 대종회, 2012)
유교넷(http://www.ugy.net/)
신채(申埰) 인재(忍齋)
한자申埰
이칭/별칭 자경(子卿),인재(忍齋),삼모(三某)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문인·학자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이광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610년- 신채출생
활동 시기/일시1646년 - 신채 진사시에 급제
1646년 - 신채 성균관에 입학
1649년 - 신채 낙향
몰년 시기/일시1672년- 신채사망
추모 시기/일시1858년 - 신채 단구 서원에 배향
출생지- 경상북도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거주|이주지- 경상북도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묘소|단소-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단구 서원)
성격유학자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대표 관직|경력진사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학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자경(子卿), 호는 인재(忍齋). 참의(參議) 신원록(申元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흘(申仡)이고, 아버지는 참봉(參奉) 신적도(申適道)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 尹氏) 첨정(僉正) 윤순조(尹淳祖)의 딸이고,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 권익창(權益昌)의딸이다.
[활동 사항]
신채(申埰)[1610~1672]는 어린 시절부터 총기를 보이며 학문에 뜻을두었다. 1629년(인조7) 향해(鄕解)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며, 1643년(인조 21)에는아버지의 뜻에 따라 향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1646년(인조 24)에는 진사시(進士試)에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는데, 성균관에서의 학업 활동이 뛰어나 영남의 삼모(三某)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한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의 명으로 「태학명(太學銘)」을 짓기도 했으며, 또세자의 명에 의하여 「성학 도명(聖學 圖銘)」을 지었다.
1660년에 모친상을 당하고 1664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마치 어린아이가부모를 사모하듯 지극 정성으로 전후 상례를 치렀으며, 그 후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실천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이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집 앞에 매화나무와 대나무를심고 당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아울러 팔지산(八智山) 아래에별업(別業)을 개척한 뒤,그곳의 지명을 팔지(八智)[현 경상북도 의성군의성읍 팔성리]로 고치기도 했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는 4권 2책의 『인재집(忍齋集)』이 전하는데, 1931년 후손 신상하(申相夏)가 간행하였다. 문집에수록된 글들 가운데 「답대학문목(答大學問目)」, 「용학표리설(庸學表裏說)」, 「성학십도명(聖學十圖銘)」등과 같은 성리학 논설들이 주목된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팔성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58년(철종 9) 부친신적도, 계부 신열도와 함께 단구 서원(丹邱 書院)[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인재집(忍齋集)』
『의성의 전통』 (의성 문화원, 1982)
『아주 신씨 대동보』 (아주 신씨 대종회, 2012)
신홍망(申弘望) 고송(孤松)
한자申弘望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문무 관인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이광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600년- 신홍망출생
활동 시기/일시1639년 - 신홍망 별시 문과에 급제
1652년 - 신홍망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
1652년 - 신홍망 해배
1659년 - 신홍망 풍기 군수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73년- 신홍망 사망
추모 시기/일시1691년 - 신홍망의 거처에 낙선당 건립
추모 시기/일시1984년 - 신홍망 유허비 건립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묘소|단소-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풍리리
유허비-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성격문신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대표 관직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校)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문신.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 망구(望久), 호는고송(孤松). 신응규(申應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몽득(申夢得)이며, 아버지는 승지 신지제(申之悌)이고, 어머니는 함안 조씨(咸安趙氏)로, 조지(趙址)의 딸이며, 부인은 영천 이씨(永川李氏) 이민환(李民寏)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홍망(申弘望)[1600~1673]은1627년(인조 5) 진사시에 급제한 뒤, 강릉 참봉(康陵 參奉)에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9년(인조 17) 별시 문과 병과(丙科)에급제하여 1645년 승문원 주서(承文院 注書)가 되었으나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였다. 1646년 전적(典籍)․병조 좌랑(兵曹 佐郞)․정언(正言), 1647년(인조 25) 예조 좌랑(禮曹佐郞)․전주 판관(全州 判官) 등을역임하였다.
1652년(효종 3)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이때 도승지 이시매(李時楳)가 자못 패만(悖慢)한 것을 지평 이온발(李溫發)이상주(上奏)하다가 탄핵을 당하였다. 이 때 이시매는 자기의 밝음을 선현을 이끌어서 증명하려 하였다. 신홍망은이를 듣고 직접 그 소(疏)를 보니 실로 모욕적이어서 이를단독으로 왕에게 진달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당론을 타파하고자 하는 마당에 호당(護黨)한다 하여 탄핵을 받고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가 두달 뒤 풀려났다.
1656년 울산 부사(蔚山 府使),1659년에는 풍기 군수(豊基 郡守)로 나아갈때 수령들이 잇달아 관청에서 죽으며 흉흉한 소문이 일자, “내가 그 자리에 나가지 않고서는 요망스러운말을 없앨 수 없다”라고 말하며 부임하였다 한다. 수령이된 뒤에는 교육을 장려하는 데 힘썼으며 가난한 선비를 도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664년(현종 5)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 사예(司藝)를두루 지냈다 이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거의 나아가지 않았다. 말년에는 주로 고향인 의성의거처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구미리에 1984년 후손들 주도로 건립된 고송 신 선생 유허비(孤松申先生遺墟碑)가 있다.
[참고문헌]
『고송집(孤松集)』
『인조 실록(仁祖實錄)』
『효종 실록(孝宗實錄)』
『의성의 전통』 (의성 문화원, 1982)
『아주 신씨 참판공 파보』(대보사, 1985)
『의성 군지』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 1998)
장필기, 「조선 후기 의성 아주 신씨가의 가계 이력과 향촌 재지 기반 -의성아주 신씨 읍파·구파의 고문서 검토를 중심으로」(『한국 사학회』88, 2007)
[지식연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홍망
신열도(申悅道) 나재(懶齋)
한자申悅道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문무 관인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이광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589년- 신열도출생
활동 시기/일시1606년 - 신열도 진사시에 급제
1624년 - 신열도 증광 문과에 급제
1647년 - 신열도 사헌부 장령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1659년- 신열도사망
추모 시기/일시1858년- 신열도의성 단구 서원에 배향
출생지- 경상북도의성군 의성읍
묘소|단소-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단구 서원)
성격문신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대표 관직능주 목사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문신.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 진보(晉甫), 호는나재(懶齋). 신준정(申俊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수(申壽)이며 아버지는 신흘(申仡)이고, 어버니는 순천 박씨(順天 朴氏)로박윤(朴倫)의 딸이며, 부인은문소 김씨(聞韶 金氏)로 김굉(金浤)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열도(申悅道)[1589~1659]는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1624년(인조 2)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관직을시작하였다. 1625년에 박사(博士), 전적, 기사관을 지내고 1627년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는 형들과 더불어 호란 당시 척화(斥和)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화의론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1628년 형조 좌랑(刑曹 佐郞)이되었으며, 동지사(冬至使)의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禮曹)·병조(兵曹)·호조(戶曹)의 좌랑(佐郞)을 두루지내고, 1630년 지제교(知製敎), 1636년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 병조 정랑(兵曹 正郞), 사간원정언(司諫院 正言)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병자호란 때에도 화의론을 강력히 비난하며 동지들과 상소를 올려 끝까지항쟁할 것을 주장했다. 이어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檄文)을 초안하여 도내에 포고하고, 각 고을마다 의병을 모아 해서 부원수(海西 副元帥)의 진(陣)으로 보냈다.
이듬해 전란이 끝나자 고향으로내려왔다가, 1638년(인조 16) 울진 현령(蔚珍 縣令)으로나아가 민생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인조는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1645년 공조·병조의 정랑(正郞)에 제수고, 1647년 장령(掌令)을 거쳐 1649년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나아갔다가 1652년(효종 3) 장령을 지냈으며, 다시능주 목사(綾州 牧使)를 지냈다.
1655년 사간(司諫), 성균관사성(成均館 司成), 종부시 정(宗簿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때부터 고향에서 두문불출하며 병환을 다스렸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는 『나재집(懶齋集)』 9권 4책이 있으며, 『선사지仙槎志』와 『문소지聞韶志』 등도 편찬하였다. 『문소지』는 스승인 장현광의 권유로 편찬한 의성현의 읍지이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비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분토리에 위치한 단구 서원(丹邱 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인조 실록(仁祖 實錄)』
『나재집(懶齋集)』
『의성의 전통』 (의성 문화원, 1982)
『의성 군지』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 1998)
『고문서 집성-의성 아주 신씨 오봉 가문·호계 가문편』 77(한국학 중앙 연구원, 2005)
장필기, 「조선 후기 의성 아주 신씨가의 가계 이력과 향촌 재지 기반 -의성아주신씨 읍파·구파의 고문서 검토를 중심으로」(『한국 사학회』 88, 2007)
[지식연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열도
신달도(申達道) 만오(晩悟)
한자申達道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문무 관인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이광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576년- 신달도출생
활동 시기/일시1610년 - 신달도 생원시에 급제
1631년 - 신달도 홍문관 수찬에 임명
추모 시기/일시1646년 - 신달도 도승지에 추증
추모 시기/일시1658년 - 신달도 단구 서원에 배향
출생지- 경상도 의성현 도암리 - 경상북도의성군 의성읍
거주|이주지한양 아현 -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
수학지- 경상북도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장천 서원)
수학지- 경상북도안동시 도산면 토계리(도산 서원)
부임|활동지- 전라북도 전주시(전주판관)
묘소|단소-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오동산)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단구 서원)
성격문신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대표 관직홍문관 수찬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문신.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 형보(亨甫), 호는만오(晩悟). 신준정(申俊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봉 신수(申壽)이고, 아버지는 신흘(申仡)이며, 어머니는 박윤(朴倫)의 딸 순천 박씨(順天 朴氏)이고, 부인은 이난수(李鸞壽)의딸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다.
[활동 사항]
신달도[1576~?]는 어려서 족형(族兄)신홍도(申弘道)에게 학문을 배우고, 16세에는 장천 서원(長川 書院)[의성빙계 서원(氷溪 書院)]에서 독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을모시고 황학산(黃鶴山)에 피난했다고 한다. 1596년(선조 29) 안동의도산 서원(陶山 書院)에 있는 조목(趙穆)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고, 역동서원(易東 書院)에서 공부를 하였다. 부친의권유로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 되기도 했다. 1603년(선조 36) 장현광이의성 현령(義城 縣令)으로 부임했을 때, 향교에서 수업을 받았고, 광해군 시절 선산(善山)과 인동(仁同)을 수시로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1610년(광해군 2) 생원시에 급제하고,1623년(인조 1)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그해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과 성환도 찰방(聖歡道 察訪)에 임명되었다.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국왕을모시고 공주(公州)까지 따라 갔으며, 그 해 전주 판관(全州 判官)에제수되고 시폐(時弊)를 열 가지 조목으로 요약하여 「진시폐십조소(陳時弊十條疏)」를 올렸다. 이후 형조(刑曹)와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1627년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예조정랑(禮曹 正郞), 시강원 문학(侍講院 文學)과 필선(弼善),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윤황(尹煌)과 함께 적극적으로 척화론을 주장했었다. 전란이 끝나고 4월에는 왕명으로 가도(椵島)에 머물고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찾아가서 후금(後金)과의 화의가 본의 아님을 피력하였으며, 조선인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것을 당부하였다.
척화를 강력히 주장함과동시에 인조반정의 공신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공신들을 공격하였다. 특히 인조반정의 유력한 공신 이귀(李貴)를 맹렬히 공격했는데, 이로 인하여1629년 여러 대신과 중신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하였다. 1631년(인조 9)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으나, 한양 아현(阿峴)[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의거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1927년 신홍기(申鴻基)가의성의 신석 기숙(申錫 基塾)에서 간행한 『만오집(晩悟集)』 10권 5책이 전하고 있다. 『만오집』 권5의「가도봉사시문견계(椵島奉使時聞見啓)」, 권7의 「강도 일록(江都 日錄)」등은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당시 정국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고문서집성-의성 아주 신씨 오봉 가문·호계 가문편』 77(한국학 중앙 연구원, 2005)
장필기, 「조선 후기 의성 아주 신씨가의 가계 이력과 향촌 재지 기반 -의성아주 신씨 읍파·구파의 고문서 검토를 중심으로」(『한국 사학회』88, 2007)
[지식연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달도
신적도(申適道) 호계(虎溪)
한자申適道
이칭/별칭 호계(虎溪)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김용만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574년- 신적도출생
활동 시기/일시1606년 - 신적도 진사시에 급제
1627년 - 신적도 상운도 찰방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1663년- 신적도사망
추모 시기/일시1867년 - 신적도 호조 참의에 추증
활동지-강원도 양양군(상운도)
- 경기도 구리시(건원릉)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단구 서원)
성격관료|의병
성별남
대표 경력증 호조 참의(戶曹 參議)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관료이자 의병.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호계(虎溪). 아주 신씨 의성읍 파조(派祖) 신광부(申光富)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신원록(申元祿)이고, 아버지는신흘(申仡)이고, 동생은신달도, 신열도이다.
[활동 사항]
신적도(申適道)[1574~1663]는 청년기에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에게배웠다. 학문과 효행이 뛰어 났다.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급제하였다.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임금이 피난길에 나서고 국사가 어지러운데 신하된 사람으로 산하에 묻혀 구차하게 생활을 도모할 때가아니다.” 하며 원근의 동지들과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밤낮 달려가니 이미 화의를 맺어 적이 물러간 뒤라 어전에소장을 올려 장한 일이란 비답(批答)을 받고 나라로부터 상운도찰방(祥雲道 察訪) 벼슬이 내렸다.
병자호란 때에도 의성 의병장으로활약하였다. 오랑캐와 화친할 수 없으며, 이를 배척한다는뜻에서 “척화하는 것이 당연한 일. 어찌 강화파들은 반대한단말인가? 오랑캐가 겁나 두려워함이라. 망국꼴 보려는 왕손매의심정이구나.” 라는 척화시(斥和詩) 읊었고, 군사와 양곡을 나라에 바쳤다. 나라에서 건원릉 참봉(健元陵 參奉)의벼슬이 내려졌다.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기 위해 서울에 가서 사은(謝恩)의 예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학리의 학소대에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날마다『춘추(春秋)』를 읽으며,비분강개(悲憤慷慨)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소주(韶州) 산곡에대명(大明)의 일월이 비친다고 했다.
[저술 및 작품]
생전에 쓴 글을 모은 『호계문집(虎溪文集)』 6권 3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1867년(고종 4) 호조참의 증직이 내려졌으며, 단구 서원(丹邱 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호계집(虎溪集)』
『경상도 읍지(慶尙道 邑誌)』
『조선 환여 승람(朝鮮 寰輿 勝覽)』
『교남지(嶠南誌)』
『의성의 전통』 (의성군, 1982)
『의얼의 메아리』 (박인걸 편, 1983)
신지제(申之悌) 오봉(梧峰)
한자申之悌
이칭/별칭오봉(梧峰)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상리동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김용만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562년- 출생
활동 시기/일시1588년 - 신지제 증광 문과에 급제
몰년 시기/일시1624년- 사망
출생지신지제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상리동]
묘소군북 우곡
성격관료
성별남
대표 경력증 이조 참판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관료.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부(順夫), 호는 오봉(梧峰). 고려충신 효자 신우의 후예이고, 구미파조(龜尾派祖) 신광귀(申光貴)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몽득(申夢得)이고, 부인은 함안 조씨(咸安 趙氏)이다. 아들은 신홍망(申弘望)이고, 형제로는 신지효(申之孝), 신지신(申之信), 신지의(申之義), 신지행(申之行), 신지경(申之敬), 신지훈(申之訓) 등이 있다.
[활동 사항]
신지제(申之悌)[1562~1624]는 학봉 김성일과 유일재 김언기의 문하에서수학하고, 1589년(선조22) 증광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정언, 좌랑, 문학, 부사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였다. 예안 현감 때에는 죄수를 석방하여농사에 전념토록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열읍이 붕괴하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나라는 초토화되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경상북도 예안, 안동 겸관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구휼에 전념하였다. 의병 모집을 위해단기(單騎)로 안동 용궁 방면으로 다니다가 왜병 70여 명에게 포위되었으나 과거 훈방된 죄수가 은공을 갚아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다. 예안, 안동 겸관으로 있을 때 구휼한 백성이 수천에 이르렀다.
다시 예안에 가서 의병장김해(金垓)와 약속하여 피차 나라일로 목숨을 잃을 때에는처자를 의탁하기로 하였다. 뒤에 김해는 경주 진중으로 출발하였고, 뒤에순국하였다. 그 때 선생의 백씨가 왜군의 칼에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쳤으며, 혈서로 중씨에게 “국가에 몸을 바쳤으니 나라 일에 전력하라.” 하였다. 그 길로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에 진을 쳤으나 1596년 4월 순찰 종사관의 명을 받아 순찰 임무를 띠고 팔공산에이르러 열읍의 수령에게 전쟁에 나아가 “일사종시 동난사(一死終始同難事).” 하도록 했다. 다시 함양 화왕산성에서 망우당곽재우와 동맹 창의하고 국가에 충성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통제사 종사관, 삼영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왜군이 물러난후에는 여러 고을의 판관 등을 지냈다. 창원 부사 재직 시에는 명(明) 화적 정대립(鄭大立) 등을잡은 공로로 교서를 받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였으며, 인조 때는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선무호성훈(宣武扈聖勳) 1등에 올랐다. 퇴관 후 권귀(權貴)를 탐하지 않고 낙향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0리나 되는 구미보를축성하여 주변 땅을 옥답으로 만들었다. 인조반정 후 인조의 엄소(嚴召)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저술 및 작품]
신지제의 전적·고문서의 수량은 8종 5책 78매이다. 원래 오봉 종택이 있는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251에 보관하였다가, 보존을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한국 국학진흥원에 위탁 관리하고 있다.
목록을 살펴보면, 필사 원본으로는 『영남동도회첩(嶺南同道會帖)』, 『장사목록(長沙目錄)』[효종 3년 도승지 이시모의탄핵 사건으로 평안도 벽당에 유배 갔을 때 일기], 『조선 팔도 지도(朝鮮八道 地圖)』[17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재사종의(齋舍宗議)』[기제(忌祭), 묘제(墓祭), 묘위토(墓位土)에 관한 완의(完議)], 『구미보신장도목 완의(龜尾洑 新粧都目 完議)』[신지제가 축보(築洑)한구미보에 관한 내력과 완의, 구미보 몽리호(蒙利戶)의 답수(畓數)와 경작자명단, 수세액 등 기재, 시기는 17~19세기], 『갑진걸물절왜사소(甲辰乞勿絶倭使疏)』, 『오봉집(梧峰集)』 4책 등이 있다. 고문서로는신지제 부자의 교첩지 등 49매, 유지 2매, 교서 1매, 시권 3매, 혼례간 2매, 녹패 3매, 준호구 22매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전주 판관 재임 시에는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676년(숙종 2년) 이조 참판 증직이 내렸으며,뒤에 사림의 공의가 준발하여 장대 서원을 창건하고, 송은 김수광, 회당 신원록, 경정 이민성과 함께 장대 서원에 봉향되었다.
오봉 종택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7호이며, 전적·고문서는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경상도 읍지(慶尙道 邑誌)』
『여지도서(輿地圖書)』
『의성현지(義城縣誌)』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문소의 얼』 (의성군 교육청, 1979)
『의성의 전통』 (의성군, 1982)
『의얼의 메아리』 (박인걸 편, 1983)
『의성 군지』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 1998)
「경상북도 문화재 지정조사 보고서」 (이수건, 배현숙)
[지식연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지제
신지효(申之孝) 응암(鷹巖)
한자申之孝
이칭/별칭달부(達夫),응암(鷹巖)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문인·학자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풍리리
시대조선/조선 전기
집필자이광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561년- 신지효출생
몰년 시기/일시1592년- 신지효사망
추모 시기/일시2005년 - 신지효 금산 서원에 배향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풍리리
묘소|단소-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광현리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금산서원)
재실-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응암재)
성격유학자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지역 출신의유학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달부(達夫). 호는 응암(鷹巖). 아버지는증 좌승지(贈 左承旨) 신몽득(申夢得), 어머니는 증 공조 참의(工曹參議) 박민수(朴敏樹)의딸인 증 숙부인(贈 淑夫人) 월성 박씨(月城 朴氏), 할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역임한 신응규(申應奎), 증조할아버지는부장(部將)을 역임한 신한(申翰), 부인은 습독(習讀)을역임한 김준창(金俊昌)의 딸 함창 김씨(咸昌 金氏)로 알려져 있다. 신지효는 7형제 중 장남이다. 중제(仲弟) 신지제(申之悌)가 문과급제하며 현달하였다.
[활동 사항]
신지효(申之孝)[1561~1592]는1561년(명종 16) 출생하였으며, 경상도 의성현 신례동(新禮洞)[현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풍리리]에 거주하였다. 어려서부터용모가 수려하고 효우가 있었다고 한다. 18세 때 교임(校任)이 되었으며, 25세 때 고을 사람들이 교장(校長)으로 추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5월왜병을 피해 어머니 고창 오씨(高敞 吳氏)[아버지 신몽득의후처]를 모시고 응동(鷹洞)[또는천동(泉洞), 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 암혈(巖穴)에 피신하였다. 그러나 쫓아온 왜병에게 발각되어 왼쪽 어깨를 칼로 베이고 말았다. 피를흘리며 죽기 직전 신지효는 칡을 입으로 씹어 붓을 만들었다. 이어 예안 현감(禮安 縣監)을 지내고 있던 중제(仲弟) 신지제에게 주기 위한 혈서(血書)를쓰고 난 뒤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혈서에는 “나의 몸가짐이 조밀하지 못하고 효성이 없음이 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는가? 늙은부모는 여러 아우들이 있어 받들어 모시고 있거니와, 군(君)은 이미 몸을 왕실에 맞긴지라. 직수(職守)가 있는 터이니 마땅히 난에 임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고 실석(失石)을 무릅쓰고 죽음에 나갈 것이며, 내 시체를 찾지 못할까 걱정하여 다행히 발바닥에 ‘선성(宣城)[예안의 다른 이름]’ 두글자를 써서 알도록 하였노라![吾之藏身 不密不孝 孰甚焉 老親則有諸弟奉侍 君旣委身王室 有職守 當臨亂 授命而失石赴死之日 恐無以尋屍 幸於足掌 書宣城二字 俾識之]”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중제(仲弟) 신지제와 더불어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수학하며, 퇴계학맥을 계승하였다. 별도로 남긴 유고는 없으며, 유문으로 『응암실적(鷹巖實蹟)』이 있는데, 1817년편찬한 1책 44장의 목판본과 1933년에 편찬된 1책 72장의석인본이 전하고 있다. 『응암실적』에 수록된 「혈서습록(血書拾錄)」은 신지제의 후손 신체인(申體仁)이작성한 것으로 신지효의 ‘혈서’가 작성된 경위와 그것을 기리는의의 등이 언급되어 있다.
[묘소]
신지효의 유골을 수습한후, 현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광현리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상훈과 추모]
금산 서원(錦山書院)[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에 위치]에 중제(仲弟) 신지제(申之悌), 신지제의 후손 신체인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금산 서원은 신체인이 강학을 위해 1782년 건립한 금연 정사를 1977년 중건하고, 1981년 서원으로 변경한 것이다. 신지효의 위패는 2005년 추향된 것이다. 추향 당시 봉안문은 류용훈(柳龍勳)이작성하였다. 한편 신지효가 왜군에 의해 죽은 응동[현 경상북도의성군 봉양면 길천리]에는 재실인 응암재(鷹巖齋)와 유허비(遺墟碑)가 건립되어있다.
[참고문헌]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응암실적』
『교남지(嶠南誌)』
『아주 신씨 대동보』 (아주 신씨 대종회, 2012)
신홍도(申弘道) 정봉(鼎峰)
한자申弘道
이칭/별칭대중(大中),정봉(鼎峰)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문인·학자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시대조선/조선 전기
집필자이광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558년- 신홍도출생
몰년 시기/일시1611년- 신홍도사망
추모 시기/일시1817년 - 신홍도 매강 서원에 배향
출생지-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수학|강학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치선리
묘소|단소- 경상북도의성군 의성읍 오로리 오토산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매곡리(매강 서원)
성격학자|의병장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대표 관직|경력유일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학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대중(大中), 호는 정봉(鼎峰). 신수(申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신원복(申元福)이고, 아버지는신엄(申儼)이며, 어머니는충순위(忠順衛) 선산 김씨(善山金氏) 김윤덕(金潤德)의딸이고, 부인은 안동 김씨(安東 金氏) 김응용(金應鏞)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홍도(申弘道)[1558~1612]는 6세에『대학』, 9세에 『논어』를 읽었으며, 20세 때에 집 동쪽 5리에 위치한 선암사(仙巖寺)[현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치선리]에서 공부를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따르면, 1592년 경상도 예안현(禮安縣)에서 김해(金垓)가 창의를 하자 그는 의성에서 창의하여 김해의 통솔을 받았다고 한다. 전란초기 첨사(僉使) 배경남(裵慶男)이 패주를 거듭하며 도망치자 그의 죄상을 순찰사에게 알리고, 장사진(張士珍)으로 교체를 청하여 허락을 받기도 했다. 1593년 명나라 원병들이 인근으로 남하해 오자, 그들의 군량을마련하는 데 힘을 썼다. 1598년 명나라 유격 장군(遊擊將軍) 엽방영(葉邦榮) 부대의주둔지가 안동에서 의성으로 옮겨졌는데, 병졸들의 횡포가 심하여 고을의 많은 백성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섭엽방에게 편지를 보내 보급 문제에 대해 논의한 뒤 그들의 횡포를 진정시켰다.
1600년(선조 33) 관찰사가유일(遺逸)로 천거하였으나,사양한 뒤 선암사 아래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주력하였다. 1603년에는 관찰사로부터 임진왜란때의 사적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받았다.
1608년 광해군 즉위 직후, 대북(大北) 세력이 서인(西人) 학통을공격하자, 서인의 유생 고경리(高敬履)가 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상소문 가운데 오현(五賢)을 언급하면서, 이언적(李彦迪)을 누락하자상소문을 올려 그 잘못됨을 논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배척을 요구하는 ‘회퇴변척(晦退辨斥)’의 논의를 일으키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학문과 저술]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장현광(張顯光)과 서사원(徐思遠) 등 퇴계 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향촌에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주력하였는데, 인조 연간 척화론을 주창하였던 신적도(申適道), 신달도, 신열도(申悅道) 형제도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서인 『성리휘언(性理彙言)』, 예학서인『상례고증(喪禮考證)』, 선대의장갈문을 엮은 『영모록(永慕錄)』을 지었다고 하나 산실되어전해지지 않는다. 『아주 신씨 대동보』에는 유고(遺稿)만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
묘는 현 경상북도 의성군의성읍 오로리 오토산(五土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매곡리의 매강 서원(梅岡 書院)에 신원복(申元福), 신류(申瑠)와 함께 배향되어 있다. 『아주 신씨 대동보』에 의하면, 신홍도의 위패는 1817년(순조 17) 배향되었고, 유심춘(柳尋春)이 봉안문(奉安文)을 찬(撰)하였다. 2009년에는의성의 유림 김창회(金昌會)가 묘갈명을 찬(撰)하였다.
[참고문헌]
『만오집(晩悟集)』
『효암집(曉庵集)』
『난중잡록(亂中雜錄)』
『의성 군지』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 1998)
『아주 신씨 대동보』 (아주 신씨 대종회, 2012)
신흘(申仡) 성은(城隱)
한자申仡
이칭/별칭구지(懼之),성은(城隱)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김용만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550년- 신흘출생
활동 시기/일시1603년 - 신흘 『난중사적』 편찬
1608년 - 신흘 회퇴변무소 상소
몰년 시기/일시1614년- 신흘사망
성격의병
성별남
대표 경력증 좌승지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의병.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구지(懼之), 호는 성은(城隱). 아버지는신원록(申元祿)이며, 의성(義城) 사람이다.
[활동 사항]
신흘(申仡)[1550~1614]은 아버지가 사망하자 삼년상을 마친 후 묘소아래 집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편액을 달고 애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영가 교수(永嘉敎授)를 지냈다. 전쟁이일어나자 형인 신심(申伈)을 도와 창의하였다. 의병을 일으키고 수 백 명을 모집하여 김해(金垓)·유종개(柳宗介)·정세아(鄭世雅)와 함께 왜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하였다. 1603년(선조 36) 조정의명으로 『난중사적(亂中事蹟)』을 편찬하였다. 1608년에는 종질인 신홍도(申弘道)와 함께 회퇴[회재 이언적, 퇴계이황] 두 분의 변무소(辨誣疏)를 올렸다.
1611년(광해군 5)에는정인홍이 국정을 농락하고 성현을 모함한 무현죄(誣賢罪)로논핵하기도 하였다. 그 후로는 어지러운 세상에 나서지 않고 두문불출하면서 고요함을 지켰으며, 경전과 역사책을 보면서 스스로 즐기는 삶을 살았다. 아들 삼형제[신적도, 신달도, 신열도]를 잘 교육하여 충신, 정치인, 학자로키웠으며, 이로써 의성 지역 명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특히읍파인 광부(光富) 계열이 중추가 되어 전성기를 열었다.
[저술 및 작품]
『난중사적(亂中事蹟)』을 편찬하였고, 유집으로『성은일고』가 있다.
[상훈과 추모]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사림에서 신적도, 신달도, 신열도삼형제를 비롯하여 신적도의 아들 인재(忍齋) 신채(申埰) 부자를 단구 서원(丹丘書院)에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난적휘찬(亂蹟彙撰)』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의성의 전통』 (의성군, 1982)
『의얼의 메아리』 (박인걸 편, 1983)
유교넷(http://www.ugy.net/)
신원록(申元祿) 회당(悔堂)
한자申元祿
이칭/별칭 계수(季綏),순보(順甫),회당(悔堂)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효자·열녀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시대조선/조선 전기
집필자하창환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1516년- 신원록출생
몰년 시기/일시1576년- 신원록 사망
추모 시기/일시1615년 - 신원록 효자문 건립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장대 서원)
성격효자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정의]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효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계수(季綏)·순보(順甫). 호는 회당(悔堂). 퇴재(退齋) 신우(申祐)의 6세손이다. 참봉(參奉)을 지낸 신수(申壽)의다섯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형은 신석록(申錫祿)과 신택록(申宅祿)이며, 동생은 신도수(申道洙)와신헌록(申憲祿)이다.
[활동 사항]
신원록(申元祿)[1516~1576]은 효성과 학문이 모두 뛰어났다. 11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이 들어 인근에서 약을 구할 수가 없어 집에서 수백 리가 떨어진 팔공산까지 직접가서 약을 구해 왔다. 그러한 정성으로 형인 신원복(申元福)과 함께 8년 동안 아버지를 간호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홀로 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연친곡(宴親曲)」 8규(閨)를 지어 불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세 번 성묘를 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 먼저 나아가 학문을 닦다가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자 그곳으로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그리고 스승 주세붕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 삼년을 지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 군수로 재임할 때에는 백운동 서원에 머물며 구봉령(具鳳齡), 조목(趙穆), 김팔원(金八元) 등과 강론하며 교유하였다.또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을 종유하며 학문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1556년(명종 11)에는서원을 세워 의성(義城)이 관향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배향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 일로 “장천(長川)”이라는 사액을받게 되었다. 그 밖에 향리를 위해 스승 퇴계에게서 향약을 필사해 와 실행하고, 난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휼장(賑恤場)을 운영하고, 고장의 발전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대소과(大小科)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연계소(蓮桂所)를 설립하고, 문중인사를 모아 사당에 참배하고 학문을 권장하는 모임인 월삭회(月朔會)를조직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상훈과 추모]
세상을 떠난 지 39년 뒤인 1615년(광해군 7)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그가 살던 마을에 효자문이 세워지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 參議)에추서되었다. 그리고 장대 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교남지(嶠南誌)』
『의성지 집록』 (의성 문화원, 1994)
『의성 군지』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 1998)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시스템(http://peple.aks.ac.kr/)
신우(申祐) 퇴재(退齋)
한자申祐
이칭/별칭 퇴재(退齋)
분야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시대 인물
유형인물/문무 관인
지역경상북도 의성군
시대고려/고려 후기
집필자위은숙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1509년 - 신우 속수 서원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1992년 - 신우 유허비각 중수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효자리)
묘소|단소-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용사 1리산39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속암리(속수 서원)
성격무신
성별남
본관아주(鵝洲)
대표 관직호군(護軍)
[정의]
고려 후기 의성 출신의무신이며 효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퇴재(退齋). 아버지는 신윤유(申允濡)로아주 신씨(鵝洲 申氏) 의성 입향조이다. 부인은 약목 유씨(若木 柳氏)이다.
[활동 사항]
신우(申祐)는 생몰년 미상이며, 고려충혜왕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봉상(奉常)·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거쳐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일설에는 전라도 안렴사(全羅道 安廉使)에 이르렀다고도 한다.지극한 효성으로 부친의 3년상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그 자리에 대나무 두 그루가 자랐다는것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내리고 살던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고 불렀다.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에게 영향을 받아 고려 멸망 후 고려에 대한 충성심으로 조선이개국하자 조카사위인 길재(吉再)와 고향에 은거하였고 이성계가등극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한다. 그의 행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실려 있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퇴재선생실기(退齋先生實紀)』 2권이있다.
[묘소]
묘는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에있다. 용포재(龍浦齋)는신우의 묘각으로 1956년 건축되었다.
[상훈과 추모]
1509년(중종 4년) 의성군 단밀면 속암리에 있는 속수 서원(涑水 書院)에 손중돈(孫仲暾) 등과함께 배향되었다. 단밀면 주선리에 있는 유허비각에는 3개의비가 있는데 정경세는 묘표(墓表)를, 김응조(金應祚)는 봉안문(奉安文)을, 번암 채제공은유허비명을 찬(撰)하였다.비각은 최근 1992년에 중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