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는 『오봉문집(梧峰文集)』 권 6에 수록된 것으로 신지제(申之悌 ; 1562~1624)가 갑오년(1594, 선조 27) 9월 2일부터 9월 5일까지 청량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기행문이다. 강효업과 금난수가 동행하였으며, 여행의 경로는 치원암, 안중암과 몇몇 봉우리를 간신히 보았던 것으로되어 있다. 이때 넉넉히 유람할 겨를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있으며, 김수온이불교에 아부한 시를 보고 유자(儒者)의 죄인이라고 평가했으며, 퇴계선생의 유향을 흠모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신지제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峰)ㆍ오재(梧齋)이다.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갑과(甲科)로 급제, 정언(正言)ㆍ예조좌랑ㆍ문학(文學) 등을 역임하였고, 1613년(광해군 5) 창녕부사(昌寧府使)로나가 백성을 괴롭히는 도적을 토평,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인조(仁祖) 초 승지에 이르렀다. 의성(義城)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오봉문집』이 있다.
『장사일록(長沙日錄)』은 신홍망(申弘望 ; 1600~1673)이 이시매(李時楳)를 모함했다는 일로 인하여 평해(平海)로 귀향을 가게 된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임진년(1652년) 9월 당시 지평으로 있던 그는 이시매의 사직상소에 성현을모욕하는 말을 썼다고 판단하여 이시매를 체직하라는 상소를 올리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리하여 신홍망을 두둔하는쪽과 이시매를 옹호하는 쪽으로 갈린 정국은 결국 신홍망이 남을 비방했다는 죄가 더 크게 인정되어 11월 3일 평해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홍망은 11월 18일 평해에 도착한지 1주일만에 해배(解配)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장사일록』은 이러한 사건발생의 모든 과정과 유배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데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마지막으로 일기를 기록한 날짜는 12월 21로 되어 있으며, 후손들에게 자신의 일을 알리기 위해 기록함을언급하고 있다. 또 자신의 호가 곡정(鵠汀)ㆍ죽창(竹窓)이었다가 다시고송(孤松)으로 바꾸었음도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부분에는 손자 진구가 쓴 행장이 부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행장은 신홍망의 문집인 『고송선생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쓴행장만이 실려져 있다. 문집의 객관성을 지니기 위해서 조부의 문집을 편집하면서 자신의 행장은 일부러뺀듯하다. 신홍망의 자는 망구(望久), 호는 고송(孤松), 본관은아주(鵝州)이다. 1639년별시문과에 급제, 주서(注書)를 거쳐 1646년 정언이 되었고,이어 사헌부에 재직중 도승지 이시매(李時楳)의탄핵으로 벽동(碧潼)에 유배되었다. 1652년 지평이 되었을 때 호당(護黨)의 죄로 인하여 평해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1659년 풍기군수가되었다.
「강도일록(江都日錄)」은 신달도(申達道, 1576∼1631)의 문집인『만오선생문집(晩悟先生文集)』권7 제11엽부터 제32엽까지 모두 43면에 걸쳐 수록되어 있으며, 목활자본이다.
이 일기는 1627년(정묘) 정월 17일에 평양감사 윤훤(尹暄)이 “노적(奴賊)이 13일에 의주를 침범하고 14일에 정주(定州)에 이르렀습니다.”라고보고서를 올린 데서 시작하고 있다. 즉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9년전, 정묘호란의 발발 사실로 일기는 시작하고 있다. 임금과왕실이 강화도로 피난하여 그 곳에서 쓴 일기라 제목을 ‘강도일록(江都日錄)’이라고 한 것이다. 일기에는 급박한 상황에 따라 허둥대던 임금과신하들의 언행이며, 조선을 침략한 북방의 오랑캐 후금(청)과 왕래한 문서, 여러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 등도 기록하고 있다. 후금에게 패배를 거듭하던 중, 그해 3월 후금과 화친이 맺어지자, 일기 역시 3월 23일에서 기록을 멈춘다.
신달도의 자는 형보(亨甫),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 아주(鵝州)이며, 조목(趙穆)과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배웠다.1610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는데 당시 조정이 어지러워 과거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정묘호란때 임금이 강화(江華)로 들어가고 최명길(崔鳴吉)이 화의를 주장하여 강화(講和)를 맺으려고 하자, 윤황(尹煌)과 함께 강화의 부당함을 거침 없이 따지는 상소를 올렸다. 영사공신(寧社功臣)에 녹훈되고, 1631년에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도승지로 증직(贈職)되었다.
「강도일록」은 정묘호란때의 경과를 왕이 파천(播遷)한 강화에서 기록한 것으로, 「유경일록(留京日記)」과함께 정묘호란 당시 우리나라 조정의 동향과 후금(청)의 움직임을살필 수 있는 역사 사료이다.
『월영대기(月影臺記)』는 신지제(申之悌 ; 1562~1624)가 마산 합포에 있는 월영대 주변의 경치와 누대의 아름다움과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 857~?)의 학문과 인품을 기록한 것이다. 월영대의 위치와 최치원이쓴 월영대의 글씨를 소개하고, 지우들과 배를 타고 남포에서 바다를 따라 월영대를 방문할 때의 경치를기술하였으며, 물의 성품과 달의 성품이 체와 용이 되어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극찬하였고, 또 최치원의 학문이나 인품을 알지 못하고 월영대에 와서 시가를 읊조린다면 이태백이 달을 따다가 돌을 줍고 소동파가적벽의 아래에서 곱기만 한 시를 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음을 기술하고, 민간에 전해오는 최치원의 전설적인이야기 등도 소개하였다. 신지제는 고려 충신 효자 신우의 후예로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峯), 본관은 아주(鵝州)이다. 학봉 김성일, 유일제, 김언기문하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급제한 뒤 예안현감 재임 중 임진란이 일어나자 예안, 안동 겸관으로 의병을모집하여 항쟁했다. 전주 판관 재임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인조반정 후 동부승지로 불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사림이공의가 준발하여 그가 강학하던 서당에 장대서원을 창건하고 송은 김광수, 회당 신원록, 경정 이민성과 함께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