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년 10월 10일, 며칠 전부터 아우인 광악과 함께 대구의 김굉필의 묘도 참배하고, 한강 정구 선생도 뵙고, 여러 친구들도 만난 김광계는 이제 집으로 향하기 위해 발길을 잡았다.
집에 가는 길에 중간에 군위(軍威)에도 들러 가기로 했다. 군위에는 예전 임진왜란 때 예안 현감을 지냈던 신지제(申之悌)어른이 사시기 때문에 뵙고 갈 생각이었다. 그 날 밤에는 인동(仁同)의 낙원역(藥宛驛)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에 길을 나서서 군위(軍威) 읍내에 당도하였다.
신지제 어른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모아 안동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분이다. 당시 왜군이 안동을 점령하려고 하자 안동 부사와 판관마저 모두 도망쳤으나 예안 현감이었던 신지제 어른은 공석이 된 안동부사를 겸직하고 자리를 굳게 지키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경상 좌방어사 성응길의 지원에 힘입어 당분간 안동이 적의 치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던 분이었다.
그런데, 신지제 어른은 지난해부터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김광계는 신지제어른이 시묘살이를 하는 산소를 찾아 갔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다른 마을로 가는 바람에 길을 헤매다가 그만 날이 저물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가까운 곳에서 잠을 자고 다시 다음 날 새벽에 길을 나섰다.
12일 새벽부터 길을 나선 김광계는 아침을 먹을 때 즈음 겨우 신지제 어른이 있는 산소에 당도하여 조문을 하였다. 산소에는 신지제 어른뿐만 아니라 그 아우들인 신지신(申之信)과 지행(之行)도 있었다. 조문을 한 후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가 일어서서 떠나려고 하니 밥을 챙겨 주어 밥을 먹은 뒤에야 작별을 고하고 산을 내려왔다. 그 날 밤에는 류실 누이 집에서 잤다.
◆ 조선시대 시묘살이
시묘살이는 부모가 사망했을 때, 자식이 묘 옆에 초막 형태로 만든 움막을 짓고 거주하면서 탈상할 때까지 묘소를 돌보는 일을 말하는데, 김광계가 찾아 간 신지제는 1607년 4월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묘살이는 유가의 보편적인 예서인 『가례家禮』 등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시묘살이가 사대부가에 유행하게 된 것은 옛날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서 한 일이 중국에서 계승되었고,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사대부가의 풍속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묘살이는 의례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시묘살이는 초막 형태의 여막에서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취식을 할 만한 여건을 마련하여 시종이 있으면서 늘 밥을 해 올리고, 겨울을 대비하여 난방이 될 정도의 온돌시설도 만들었다.
시묘살이 동안 관리들은 현직을 그만두고 부모의 묘를 지켰다. 또 상중에는 술이나 고기 등을 금하고 근신하는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사실상 부모상을 당하는 시기는 상주로서는 사회나 문중․집안에서 중요한 일을 담당해야 할 나이인 만큼, 이들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상중이라도 사대부의 기본 행위인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은 물론, 필요할 때에는 이웃을 방문하는 등 기본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였다. 이들은 시묘살이 동안 먼 길을 떠나는 등의 행위는 할 수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문중이나 집안일을 돌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을 계기로, 상제의 몸으로 생활하는 동안 학문에 몰두하여 저술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안동의 김성일金誠一은 43세 때에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시묘살이를 하면서 부친의 행장, 묘지문를 작성하였으며, 1년이 지난 뒤에는 『상례고증喪禮考證』을 편찬하였다. 또한, 류성룡柳成龍은 60세 때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이때에 그는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상례고증喪禮考證』 등 여러 편의 저술을 남겼다.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독립운동가인 이상룡李相龍도 15세 때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이때에 수많은 장서를 탐독하였고 천문天文, 지지地誌 등을 연구한 바 있다. 이처럼 상중임에도 면학에 몰두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그 외에 이전에 하지 못했던 조상들의 자료 및 문집 정리, 조상의 묘소를 돌보는 일 등에 열중한 이들도 있었다.
조선시대 시묘살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대표적으로 안동에 살았던 이정회(李庭檜)와 서울 서소문에 살았던 이문건(李文楗)의일기를 통해 일부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안동의 대표적인 사대부였던 이정회는 1578년 5월 1일에 모친상을 당하여 만2년 동안 상중생활을 하였다. 그는 장사 뒤에 여막에 거주하면서 농사일도 돌보고, 그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인척들에게 대소사가 있으면 방문하는 등, 어찌 보면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상중의 이정회가 자식 된 도리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초하루와 보름에는 늘 삭망제(朔望祭)를 지냈으며, 특히 추수가 끝난 겨울에는 묘역에 표석(標石)이나 상석(床石)을 조성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상중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 동시에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내 일을 돌보는 등 두 가지 일을 다 하였다.
한편 이문건은 1535년 1월 5일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서울 서소문에 있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를 양주 인근에 모셨다. 이문건도 이정회와 마찬가지로 상중에 묘역을 돌보는 일과 사회경제적인 활동을 겸하였다. 그는 평상시처럼 전답을 관리하는 일이라든지, 소속된 노비를 관할하는 일 등을 철저히 이행하였다. 그 밖에 일상생활의 하나인 봉제사 접빈객도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무신년(1608, 선조41) 10월 10일 새벽에 길을 나서서 지나는 길에 채정응蔡靜應 어른 집에 들러서 아침을 먹었다. 인동仁同 낙원역藥宛驛에서 잤다. 이날 배를 타고 약목若木 나루를 건넜다. 10월 11일 군위軍威 읍내에 당도하여 신 지평申持平이 시묘살이 하는 산소를 찾아 갔는데, 다른 마을로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날이 이미 저물어서 그대로 투숙하였다. 10월 12일 새벽에 길을 나서서 아침 먹을 때 신 지평 어른이 있는 산소에 당도하여 조문을 하였다. 신 지평 어른 및 신지신申之信·지행之行이 자리에 있었다. 밥을 먹은 뒤에 작별을 고하고 류실 누이 집에 와서 잤다. 류형은 성산星山(성주)에 가고 돌아오지 않았다. 10월 13일 잠시 김 예천金醴泉 어른 및 숙모와 이간以幹을 뵈었다. 날이 저물어서 집에 당도하여 할머니를 뵈었다.
오봉종택 전경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에 위치한 아주 신씨 오봉공파의 종택 건물이다.
오봉종택 낙선당
오봉종택 좌측에 위치한 낙선당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건물로 강학을 담당하던 건물이다.
오봉 사당
오봉종택 낙선당 뒤쪽에 위치한 오봉사당이다. 사당 안에는 신지제 불천위를 비롯한 위패들이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