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 는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수학하면서 급진적인 학문적 발전을 이루었고 학봉 김성일을 통한 학문적 ,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또 서애 류성룡 여헌 장현광 경정 . , , 이민성 자암 이민환 등 당대 지식인들에게서 그의 훌륭한학문과 빼어 , 난 행적을 인정받았다 그는 지식인들의 기본필독서인 소학 사서삼경 을 위시하여 그리고두보시와 성리대전 등 각종 서책들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 퇴계집 을 애독하였으며 퇴계가 중국의 잠명찬 을 선집한 고경중마방 을 통해서 내면의 수양을완성해갔다 본고는 신지제의 수학과 학문 그리고 그의 삶을 몇 가지 특징점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신지제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남달랐는데 특히 계모오씨에 대해서 증자 의 양지 맹종과 왕상의 양구체 의 두 측면을 두루 겸비하는 효행을 실천하였다 그의 효는 나라에 대한 충으로 . 전이되어 벼슬살이하는 기간 내내 부정한 청탁을 거절하고 권세에 아부 하지 않는 청렴한 선비상을 보여주었다또 목민관으로서 선정과 구휼 . 정신은 가는 곳마다 선정비를 세우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예안 . 현감 시절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극복한 활약상은 그가 문무를 겸비한 충신임을 새롭게 보여주는 대목이고 청량산유람에서의 섬세한 문학적 , 표현은 그가 시인으로서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자양분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Ⅰ. 들어가는 말
오봉 신지제 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이다 의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남달랐고 천부적 재능을바탕으로 한 학업은 유일재 김언기 에게 수학하면서 학업의 진전에 가속도가 붙어 세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28 문과장원이라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주지하다시피 문과 장원은 품직이나 품직이 아닌 품직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특혜가 수반되었다 이후 신지제는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관리로서의 책임과 . 의무를 다하였다.서애 류성룡 은 신지제를 한번 보고 으뜸가는 인물이라고 일컬었고,1) 여헌 장현광 도 죽음을애도하는 만시 에서 온화하고 공손한 도량 억지로 꾸밈이 아니고 즐겁고 화평한 참다운 정은 자연에서 우러나왔네”2)하였으며 경정 이민성 은 제문에서 확고하여 꺾기 어려운 지조를 지녔고 의연하여 범접하기 어려운 기색을 띠었으며 널찍하여 포용력 있 , 는 도량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3)라고 하였으니 신지제의행 , 적을 대략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복배수적 즉 안과 밖 양쪽 모두로부터 적이 밀려오는 형세에 있었다.4) 그리하여 이따금 중국과 일본의몸부림에 등이 터지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임진왜란 역시 일본의 가 . ‘ 도입명 이라는 말도 안 되는조롱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지제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해 수령으로 서 치안유지에 진력하면서 년간의 난리를 슬기롭게극복하여 목민관으 7 로서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기도 하였다 비록 문관의 자격으로 시작한 . 관리의 행보였으나 전란을 당해서는 평소 익힌 병법서를 바탕으로 전략 의 운용까지 논하였으니 우리는 그를 문무를두루 겸비한 선비라 불러 , 도 좋을 듯하다. 이제까지 신지제에대한 연구는 박명숙의 논문 한 편 이외에는 이렇 다 할 성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5) 본고에서는오봉 신지 제의 학문 경향과 삶의 여러 양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신지제의 수학과 학문 경향
1. 성장에서의 수학(受學)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신지제는 7세 무렵에 이웃 노인에게서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이는 마치 퇴계가 6세에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익히기 시작한 것과 동일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신지제는 13세에 백씨 신지효호 와 함께 안동 와룡 가야 현 에 거주하던 유일재 김언기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신지제는 밤낮 쉬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 모습을 본 김언 . . 기는 이 아이는 말이 신중하고 용모가 중후한 데다 학문에 독실하니 “, 훗날 반드시 큰 인재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신지제는 권태일 박의장 등과 함께 학문을 익혔 는데 이때의 일화가 있어 소개하기로한다.
당시 동학 여 명이 서당에 번을 들며 불을 지폈다 하루는 권태일 박의장 함께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동료가실수로 나무꾼을 밀치는 바람에 나 , 무꾼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나무꾼의 아들이 관아에고소하여 . 밀친 동료가 잡혀가게 되었다 이때 오봉이 말하기를 우리 세 사람이 함께 갔으니 한 사람에죄를 덮어씌울 수 없다 하고 관아로 따라 들어가서 서로 자신 이 밀쳤다고 다투었다 고을 수령이 한참 지켜보다가 마침내 고소한 사람에게 말하기를세 아이에게 모두 정승의 기상이 있다 차마 일개 촌부의 일 때문에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없다 관아에서 널을 갖추어 네 아비를 묻어 . 줄 것이니 너는 돌아가라 하고서 오봉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염려 말고 돌아가서 글을 읽어라 하고 이어서서당 근처 마을에서 관아로 바치는 땔 나무를 서당으로 옮겨 보내어서 나무하는 수고로움을 덜게 하고 이를 해마다 이행하는 준례로 삼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