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本貫) 아주(鵝州). 자(字) 자장(子長). 호(號) 회병(晦屛). 부(父) 도만(道萬). 거(居) 의성(義城). 김락행(金樂行)‧임필대(任必大)‧리상정(李象靖)의 문인. 어려서부터 독서에 몰두하고, 30세 전후에 경전과 천문지리‧의술 등을 두루 통달함. 이후출사의 뜻은 버리고 敬 하나로 거(居) 경궁리(敬窮理)함. 금산서원(錦山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회병집(晦屛集)이 전함.[참고] <신종우(辛鍾友)의 인명사전>
신정주(申鼎周):1764(영조 40)~1827(순조27). 본관(本貫) 아주(鵝州). 자(字) 경백(景伯). 호(號) 도와(陶窩). 부(父) 종인(種仁). 거(居) 의성(義城). 정종로(鄭宗魯)의 문인. 벼슬에는 뜻이 없어 학문에 열중하며 성리학에 전심함. 「자경륙잠(自警六箴)」과 「암실명(暗室銘)」을 지어 경계로 삼음. 1812년 구장지(龜庄誌) 과구미촌향약(龜尾村鄕約) 을 지어 주민 교화에 힘씀. 문장에 능하여 많은 저술을 남김. 저서로는 도와집(陶窩集) 이 전함. [참고] <신종우(辛鍾友)의인명사전>
신정모(申正模):1691(숙종 17)~1742(영조18). 본관(本貫) 아주(鵝州). 자(字) 경해(景楷). 호(號) 이치재(二恥齋). 부(父) 덕일(德溢). 거(居) 의성(義城). 이현일(李玄逸)의 문인. 1719년 증광시(增廣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지평(持平)‧정언(正言)‧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거(居) 창부사(昌府使) 등을역임함.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이를 막지 못하여 군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됨. 1735년다시 흥양에 유배되었다가 7년 뒤 적소에서 사망함. 1864년복관됨. 저서로는 이치재집(二恥齋集)이전함. [참고] 한국인물대사전
신원복(申元福):1509(중종 4)~1584(선조 17). 본관(本貫) 아주(鵝州). 자(字) 중수(仲綏). 호(號) 정은(靜隱). 부(父) 수(壽). 거(居) 의성(義城) 그의 동생 원록(元祿)의일대기를 기록한 효우록(孝友錄) 이 전함. [참고] <신종우(辛鍾友)의 인명사전>
신원록(申元祿):1516(중종 11)~�1576(선조9). 본관(本貫) 아주(鵝州). 자(字) 계수(季綏). 호(號) 회당(悔堂). 부(父) 수(壽).�거(居) 안동(安東)‧의성(義城). 주세붕(周世鵬)‧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인. 이황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재임할 때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머물면서 조목(趙穆)‧구봉령(具鳳齡)‧김팔원(金八元) 등과 함께 강론하면서교유함. 학행으로 관학의 교수(敎授)를 지냄.�광 해군때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에증직됨. 장천에 빙계서원(冰溪書院)을 창건하는데 앞장섰으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선조 때는 장천서원(長川書院)으로 사액됨. 의성의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 회당집(悔堂集) 이전함. [참고] 퇴계문인록(退溪門人錄)
신우(申祐):생몰년미상. 본관(本貫) 아주(鵝州). 호(號) 퇴재(退齋). 부(父) 윤유(允濡). 거(居) 의성(義城). 고려 말엽에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를 지내고 李成桂가 등극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불러도 나아가지 않음.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고 살던 곳은 효자리(孝子里)라 일컬어짐. [참고] 의성군지(의성군지(義城郡誌))
신석호(申錫祐):1816(순조 16)~1881(고종18). 본관(本貫) 아주(鵝州). 자(字) 덕문(德文). 호(號) 가헌(可軒). 부(父) 면위(冕瑋). 거(居) 의성(義城).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황조산 아래 봉정을 짓고 은둔생활을함. 1866년 유후조(柳厚祚)의 천거로 경상도도유사(慶尙道都有司)에오름.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그 불가함을 상소함.저서로는 가헌집(可軒集) 이 전함. [참고] 가헌집(可軒集)
신면주(申冕周):1768(영조 44)~1845(헌종11). 본관(本貫) 아주(鵝州). 자(字) 성지(成之). 호(號) 시남(市南). 부(父) 홍교(弘敎). 거(居) 의성(義城). 1798년 생원에 입격하고,1805년 문과에 급제함.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리조좌랑‧사헌부지평‧함경도도사(成均館典籍‧司諫院正言‧吏曹佐郞‧司憲府持平‧咸鏡道都事)등을 역임함. 이상정의 학통을 이어받아 하늘과 인간의 진리, 사단과 칠정의 본질 등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함. 1834년 순조의장례식에 봉폐관(封閉官)으로 참석함. 헌종 즉위 이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漁父亭을 짓고후학 양성에 전념함. 저서로는 시남유고(市南遺稿) 가 전함. [참고] 사마방목(司馬榜目) 한국인물대사전
신덕함(申德涵):1656(효종 7)~1730(영조 6). 본관(本貫) 아주(鵝州). 자(字) 중유(仲遊). 호(號) 롱아(聾啞). 부(父) 휴석(休錫). 거(居) 의성(義城) 1684년 식년시(式年試) 생원진사에 입격함. 중국 고사‧시전(故事‧詩傳) 등에 밝았고 문장이 뛰어남. 열녀 우소사의 행적을 기록한 우렬녀전(禹烈女傳) 을 지어 널리 알림. [참고]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신심(申鐔):1611(광해군 )~ ? 본관(本貫) 아주(鵝州). 자(字) 사패(士佩). 부(父) 지익(之益). 조부(祖父) 로(櫓). 거(居) 청주(淸州). 병자호란에갑작스럽게 적병을 만나 자신의 몸으로 부모를 막고 슬피 울며 살려줄 것을 청하니 적병들도 차마 어찌하지 못하였다.또한 어머니의 병에 단지(斷指)하여 구완하였다.
신응태(申應泰):1643(인조 ~ 영조 1738 ) 본관(本貫) 아주(鵝州). 자(字) 길래(吉來). 호(號) 용애(龍崖). 부(父) 심(鐔). 조부(祖父) 지익(之益). 거(居) 청주(淸州). 신심(申鐔)의 아들이며, 어머니는광주반씨(光州潘氏)로 반봉익(潘鳳翼)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저서로『용애문집(龍崖文集)』 4권 1책이 있다.
신내석(申乃錫) : 1691 1742(영조)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 지언(知彦), 호는 원재(元齋). 아버지는신준(申埈), 어머니는 손지효(孫至孝)의 딸 경주 손씨(慶州孫氏)이고, 할아버지는 신흠도(申欽道), 증조할아버지는 상호군(上護軍) 신한(申僩)이다. 처는 장원준(蔣元浚)의딸 아산 장씨(牙山 蔣氏)이다.
신내석(申乃錫)[1691~1742]은 1691년(숙종 17) 경상도의성현 원흥(元興)[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나,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13세 때에 부친이 병으로 위독하여안동으로 직접 약을 구하러 갔는데, 낙동강 물이 홍수로 불어 건너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사공들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자, 신내석의 효성에 감동한 사공들이위험을 무릅쓰고 배를 저어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부모상으로 여묘 살이 할 때에는 눈이오나 비가 오나 조석(朝夕)으로 곡(哭)을 하였기에, 그 산을효려산(孝廬山)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의성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 안동에서 편찬한 『무신 창의록(戊申 倡義錄)』에 따르면, 신내석은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1728년 3월 2일 신렴(申濂), 신효(申涍) 등과 더불어 의성현의 여러 유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창의를계획하고 동지를 격려했다고 한다. 신내석은 같은 고을 출신의 신덕기(申德沂), 이경재(李慶載), 박사윤(朴師尹), 박계령(朴桂齡)과 더불어 이 책의 「의성의병군문좌목(義城義兵軍門坐目)」에 수록되어 있다. 1742년(영조 18)에 사망하였다.
신중모(申重模) 1683년(숙종 9)∼1724년(경종 4). 조선 중기 유생. 자는 사범(士範)이다.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부친은 신렴(申濂)이다. 부인은 정랑(正郞) 이후영(李後榮)의 딸철성이씨(鐵城李氏)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훌륭하여 행동거지가 남달랐다.나부공(羅浮公)을 모시고 잠잘 때 자주 요강을찾으면 자다가 놀라 일어나 가져다 드렸다.
일곱 살에 『십구사(十九史)』를 읽었으며 눈에 보이는 대로 바로 외웠다. 부친의 성품이 엄하여아들이 하나임에도 조금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열두세 살에 이미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읽었다. 당시 현감 정상호(鄭相澔)가 연회에 초청하자 어린아이가 왕래할 곳이 아니라며 거절하였다.
1707년(숙종 33) 부친이 서울에 간 사이 모친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옷도벗지 않고 탕약을 달여 병구완을 하였으나 부친이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였다.
처남 이훤(李烜)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손자로 교유가 두터웠는데,1708년(숙종 34) 병으로 자신의 집에 와서병 조리를 하자, 의원을 맞이하고 약을 달여 마음을 다하여 병구완을 하였으나 끝내 죽자 애통해하였다.
몇 번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자 주변에서 뇌물을 쓸 것을 알려주었지만거절하였다.
1718년(숙종 44) 부인의 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침식을 폐하고 목욕재계한후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플 것을 청하였으나 부인은 결국 죽고 말았다. 평소 손발 마비 증상이 있었는데부인상을 당한 즈음에 더욱 심해져 마침내 고질병(痼疾病)이되어 고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