갔다가 다시 돌아옴은 물리의 자연순환이고, 폐했다가 꼭 일어나서 큰집이 다시 중건되었다.홀연히 꿩이 날 듯한 백척의 누관을 보고 다투어 축하하는 잔치 자리에 오르게 되다. 먼 우리 조문국의 옛터전은 이에 옛날부터 아름다운 곳, 주렴은 십리에영헌(英憲)의 시가 들어오고 연화(煙火)는 천가와 동헌에 오래도록 전한다. 오직 흐르는 물과 높은 산이 수려할 뿐 아니라 대개 또는 관사(관사)가 넓고 큼이 여기로다
등림하는 사람은 근심과 걱정을 씻고 흐뭇하게 노는 이는 상쾌한 혼을 일으킨다.말 바퀴 섞여 손님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술잔을 권해 거문고 소리 몇 해나 영송(迎送)했나, 슬프다 정유년병란으로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무오년에 이르러 다시 동우(棟宇)를복고했다. 어찌 간사한 백성들이 방해함을 알았으랴, 또한불의 신이 화재의 재앙을 이루었도다.
기지(基址)는 황량하게기와는 깨져 부스러기만 남고, 노소과 함께 슬퍼 눈물로 상심치 않음이 없었다. 공손히 생각하면 우리 합하(閤下)이신김인량(金寅亮)공은 금의(錦衣)를 만드는 양재(良才)요소를 잡는 거수(巨手)로서 五년 동안 본군에서 창생을 돌보아살펴주고 일념(一念)이 시종토록 적심(赤心)을 미루어 배부르게 하였다.
우리 현을 다스리는데 먼저 학교를 세웠고, 혜택은 벽지 시골 궁촌까지미쳤다. 굉장한 모공(摹工)으로옛 터전을 건립하고자 하였고 성대한 계산 죄다 새로 건립하는데 힘을 썼다. 관찰사의 권유로 인해 재용(財用) 이 넉넉했고 관민을 함께하는 인정을 모아 분주하게 힘썼다. 혹은 서로 돕는 듯하고, 또 우연함이 아닌듯하다. 대목은 들보되고 세목은 서까래로 양공(良工)이 뭇 재목을 요리했고 모난 것은 모난대로 둥근 것은 등근대로 거실(巨室)은 고제(古制)의 미(美)를 합했도다. 동상(東廂)과 서창(西廠)은 팔창(八窓)의 영롱함을통하였고 중첩된 시렁받침은 오가(五架)의 헌활(軒豁)함을 열었도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상량한 뒤에는 복성(福星)이 와서 비춰주고 뭇별이 광채를 더하소서 촉군(蜀郡)의 고유(袴유)는 백성들이 염범(廉范)을사랑으로 추대하듯 무성(武城)의 현송(絃誦)은 선비들이 자유(子游)를 우러러 사모하듯 세시(歲時)가풍년들어 외호(外戶)를 거의 닫지않게 하고 풍속이 순후하여비옥(比屋)의 가봉(可封)함을 이루소서 어찌 온 마을의 아름다움 뿐이리오 진실로 이는 모두 하나로 함께하는 경사니라 <나재문집6권>
* 나재(懶齋) 신열도(申悅道) *
본관은아주(鵝洲). 자(字)는 진보(晉甫), 호는나재(懶齋). 신준정(申俊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수(申壽)이며 아버지는 신흘(申仡)이고, 어버니는 순천 박씨(順天 朴氏)로박윤(朴倫)의 딸이며, 부인은문소 김씨(聞韶 金氏)로 김굉(金浤)의 딸이다.
신열도(申悅道)[1589~1659]는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되고, 1624년(인조2)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1625년에 박사(博士), 전적, 기사관을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는형들과 더불어 호란 당시 척화(斥和)를 강력하게 주장하며화의론을 강력히 비난하였다.1628년 형조 좌랑(刑曹 佐郞)이 되었으며,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禮曹)·병조(兵曹)·호조(戶曹)의 좌랑(佐郞)을 두루 지내고, 1630년 지제교(知製敎), 1636년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 병조 정랑(兵曹 正郞), 사간원정언(司諫院 正言)을 지냈다.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병자호란때에도 화의론을 강력히 비난하며 동지들과 상소를 올려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했다. 이어 의병을 모집하는격문(檄文)을 초안하여 도내에 포고하고, 각 고을마다 의병을 모아 해서 부원수(海西 副元帥)의 진(陣)으로 보냈다.이듬해 전란이 끝나자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1638년(인조 16) 울진 현령(蔚珍縣令)으로 나아가 민생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인조는 이를모두 받아들였다. 1645년 공조·병조의 정랑(正郞)에 제수고, 1647년장령(掌令)을 거쳐1649년 예천 군수(醴泉 郡守)로 나아갔다가 1652년(효종 3) 장령을지냈으며, 다시 능주 목사(綾州 牧使)를 지냈다.1655년 사간(司諫), 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 종부시정(宗簿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때부터 고향에서 두문불출하며 병환을 다스렸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응암(鷹巖) 신지효(申之孝)
『응암실적』은 신지효(申之孝 ;1561~1592)의 실적이다. 신지효의 자는 달부(達夫), 호는 응암(鷹巖), 본관은아주(鵝洲)이다.1592(宣祖 壬辰)에 난리를 피하다가 적을 만나 죽었다.임진왜란이 급할 때 선생의 아우 오봉(梧峰) 지제(之悌)는 선성현령(宣城縣令)으로 있고 선생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집에 있다가 바위틈에 숨어 있더니 왜적(倭賊)이 쫓아와서 칼로 선생의 왼쪽배를 쳐서 피가 흔건히 흐르는 지라 선생이 목숨이 끊어질 때 칡을 입으로 씹어 붓을만들어 가지고 血書로 옷소매에 써서 梧峰에게 주기를 ″나의 몸가짐이 주밀(綢密)하지 못하고 효성이 없음이 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는가?, 늙은 부모는 여러 아우들이 있어 모시고 있거니와 君은 이미 몸을 王室에 맡긴 지라, 職守가 있는 터이니 마땅히 亂에 임하여 임금의 命을 바뜰어 矢石을 무릅쓰고 죽음에 나갈 것이며, 내 시체를 찾지 못할까 걱정하여 다행히 발바닥에 宣城 두 자를 써서 알도록 하였노라″ 하였다. 조선때의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出典 : 嶺南人物考,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