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19일 신축【진시辰時】에 선생이 의성현義城縣 하천下川 신례동新禮洞2) 집에서 태어났다.
○ 선생의 윗대 조상은 본래 아주鵝洲 사람이다.3) 9대조 안렴공按廉公4)에 이르러 상주尙州단밀현丹密縣 관동리館洞里5)에 살았다. 5대조 상장공上將公6)은 안동 풍산현豐山縣 정사동鼎寺洞7)으로 옮겨 살았고, 증조부 판결사공判决事公8)이 다시 신례동으로 옮겨 살았다.
1) 세종황제(世宗皇帝):명나라 11대 임금 주후총(朱厚熜)으로, 연호는 가정(嘉靖)이고 재위 기간은 1552∼1567년이다.
2) 신례동(新禮洞):지금의 의성군 봉양면 풍리리(豐里里)를 가리킨다. 신지제의 고조부 신개보(申介甫)가 정착하여 새로 예법을 밝힌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새락골[新禮谷]’이라고도 부른다.
3) 선생의……사람이다:아주 신씨는 고려 시대 거제군 아주현(현재의 거제시 아주동)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신영미(申英美, 신지제의 13대조)를 시조로 하고 있다.(한국국학진흥원 기탁, 梧峯先生年譜(附世系圖) 참조)
4) 안렴공(按廉公):신우(申祐, 1283∼?)로, 호가 퇴재(退齋)이다. 신우는 고려 충혜왕 때 대과에 급제한뒤 사헌부 장령•전라도 안렴사 등을 역임하였고, 고려가 망하자 고향 의성군 만경산(萬景山)에 은거하였다. 의성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5) 관동리(館洞里):지금의 의성군 단밀면(丹密面) 주선리(注仙里)에 있는 마을이다. 신라에서 고려 초기까지 상주(尙州) 관할 단밀현의 현청(縣廳)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강골’, ‘관동(官洞)’,‘관골[官谷]’이라고도 부른다.
6) 상장공(上將公):신시생(申始生)으로, 부사용(副司勇)을 지냈다.
7) 정사동(鼎寺洞):현재 안동시 풍산읍 괴정리(槐亭里)에 있는 마을로, 솥처럼 작은 절이 있었다고도 하고 솥발처럼 세 군데에 절이 있었다 하여 ‘솥절 마을’이라 불린다.
8) 판결사공(判決事公):신한(申翰)으로, 장례원 판결사에 추증되었다.
356|오봉선생문집 2
42년 계해년(1563) 선생 2세
43년 갑자년(1564) 선생 3세
44년 을축년(1565) 선생 4세
45년 병인년(1566) 선생 5세
목종황제穆宗皇帝9) 융경隆慶 원년 정묘년(1567) 선생 6세
2년 선조대왕 원년 무진년(1568) 선생 7세
❙ 글공부를 시작했다.
○ 선생은 어릴 때부터 글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책을 가지고 이웃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했는데, 노인이 막 텃밭을 매러 들어가서 오래도록 나오지 않자 선생이 울타리 밖에서 울며 기다리고 서서 기어이 수업을 받고 나서야 돌아왔다.
3년 기사년(1569) 선생 8세
❙ 12월에 어머니 박씨朴氏10)의 상을 당하였다.
○ 선생이 몸이 야윌 정도로 슬퍼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태어난 지 겨우 10개월 된 어린 누이가 있었는데, 선생은 안아 주고 업어 주면서 슬피 울기를 그만두지 않았고, 늘 자신이 거처하는 방 안에 두고 직접 유모를 구하여 젖을 먹였다.
9) 목종황제(穆宗皇帝):명나라 12대 임금 주재후(朱載垕)로, 연호는 융경(隆慶)이고 재위 기간은 1567∼1572년이다.
10) 어머니 박씨(朴氏, ?∼1569):무계(無溪) 박민수(朴敏樹, 1501∼1557)의 딸로, 본관은 월성(月城)이다. 1607년 숙부인에 추증되었다.
연보 |357
4년 경오년(1570) 선생 9세
❙ 한번은 의흥義興11) 외가를 왕래하며 어머니가 거처하던 방을 보고는 문득 벽을 맴돌며 목 놓아 우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5년 신미년(1571) 선생 10세
❙ 선생은 왕상王祥의 행실12)이 있어서 계모 오 부인吳夫人을 정성껏 섬기며 잘따랐다. 이는 누구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고 또한 남들이 미처 몰랐던 점이다.
6년 임신년(1572) 선생 11세
신종황제神宗皇帝13) 만력萬曆 원년 계유년(1573) 선생 12세
2년 갑술년(1574) 선생 13세
❙ 가야곡佳野谷14)【안동 북쪽 고을이다.】에 가서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15)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 김 선생이 은거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후학을 양성하여 그 문하에 출입하는 이가 수백명이었는데, 선생도 백형伯兄 지효之孝16)와 함께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선생이 뜻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써서 아침부터 밤까지 게을리하지 않으니, 김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 “이 아이는 말이 신중하고 용모가 중후한 데다 학문에 독실함이 또 이와 같으니, 훗날 반드시 큰 인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1) 의흥(義興):지금의 군위군 의흥면(義興面) 쌍정리를 가리킨다.
12) 왕상(王祥)의 행실:효행을 말한다. 진(晉)나라 사람 왕상이, 계모(繼母) 주씨(朱氏)가 겨울에 물고기가 먹고 싶다 하여 얼음을 녹이는데 잉어 한 쌍이 저절로 튀어나왔고, 계모가 참새구이가 먹고 싶다 하자 참새 수십 마리가 저절로 집에 날아 들어왔다고 한다.( 小學 「善行」)
13) 신종황제(神宗皇帝):명나라 13대 임금 주익균(朱翊鈞)으로, 연호는 만력(萬曆)이고 재위 기간은 1573∼1620년이다.
14) 가야곡(佳野谷):안동시 와룡면(臥龍面)에 있는 마을로, 개실•계실(溪實)•가야촌(佳野村)•가구리(佳邱
里)로도 불린다. 광산 김씨(光山金氏)가 세거하고 있다.
15) 김언기(金彦璣, 1520∼1588):자는 중온(仲昷), 호는 유일재(惟一齋),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안동
시 풍천면 구담리(九潭里)에서 태어났으며, 이황(李滉)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佳野里)에 가야서당(佳野書堂)을 지어 제자를 길렀다. 안동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되었
다. 저서로는 유일재집 이 있다.
358|오봉선생문집 2
3년 을해년(1575) 선생 14세
❙ 가야곡에 있었다.
○ 당시 동학 70여 명이 서당에 돌아가며 불을 지폈다. 하루는 선생이 참판 권태일權泰一17)공과 절도사 박의장朴毅長18) 공과 함께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동료가 실수로 나무꾼을 밀치는 바람에 나무꾼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나무꾼의 아들이 관아에 고소하여 밀친 동료가 잡혀가자, 선생이 “우리 세 사람이 함께 갔는데 한 사람에게 죄를 덮어쓰게 할 수 없다.”라고 하고 관아로 따라 들어가서 목숨을 걸고 서로 자신이 밀쳤다고 다투었다. 고을 수령이 한참 지켜보다가 마침내 고소한 자에게 “세 아이에게 모두 정승의 기상이 있으니, 차마 일개 촌부의 일 때문에 목숨으로 그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없다. 관아에서 널을 갖추어 네 아비를 묻어 줄 것이니, 너는 돌아가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생에게 “너희들은 염려 말고 돌아가서 글을 읽어라.”라고 하고, 이어서 서당 근처 마을에서 관아에 바치는 땔감을 서당에 바치게 하여 나무하는 수고를 덜어 주고 이를해마다 관례로 행하게 하였다.
16) 신지효(申之孝, 1561∼1592):자는 달부(達夫), 호는 응암(鷹巖), 본관은 아주이다. 임진왜란 때 난
리를 피하다가 적을 만나 죽었다. 저서로는 응암실적(鷹巖實蹟) 이 있다.
17) 권태일(權泰一, 1569∼1631):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본관은 안동이다. 1599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이조 정랑•호조 참의•전주 부윤•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장곡집 이 있다.
18) 박의장(朴毅長, 1555∼1615):자는 사강(士剛),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1577년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경주 부윤•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인동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호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영해(寧海) 정충사(貞忠祠)와 구봉정사(九峯精舍)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연보 |359
4년 병자년(1576) 선생 15세
❙ 아우 지신之信19)이 뒤따라 와서 함께 수학하였다.
5년 정축년(1577) 선생 16세
6년 무인년(1578) 선생 17세
❙ 가야곡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천방산天榜山 지보사持寶寺20)【의성현義城縣 서쪽에 있다.】에서 독서하였다.
○ 마을에 사는 어떤 아름다운 여인이 절을 왕래하다가 선생의 풍모를 보고 반하여 밤이 깊도록 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선생이 여인의 속내를 알아차리고는 의리로써 엄히 꾸짖고는 그 여인에게 회초리를 가져오게 한 다음 매질하고 돌려보냈다. 수십 일 뒤에 그남편이 술과 음식을 가져와 주며 “공이 바른 도리를 들어서 마을의 부녀자를 가르쳤다 이에 사례하러 왔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 여인이 선생의 말에 감동하여 돌아 가서 남편에게 말한 듯하다.
7년 기묘년(1579) 선생 18세
8년 경진년(1580) 선생 19세
9년 신사년(1581) 선생 20세
❙ 맏형과 함께 빙산사氷山寺21)【의성현 남쪽에 있다.】에서 글을 읽었다.
○ 사찰 벽에 상서尙書 윤국형尹國馨22)이 지은 시가 있었는데, 선생이 그 시에 차운하였다.
19) 신지신(申之信, 1566∼1632):자는 입부(立夫), 호는 독현(獨峴), 본관은 아주이다. 병산서원 동주
(洞主)를 지냈다.
20) 지보사(持寶寺):현재 군위군 군위읍 상곡리(上谷里) 선방산(船放山)에 있는 절이다. 673년 의상(義湘)이 창건하였고, 맷돌•가마솥•청동향로 세 가지 보물을 지니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21) 빙산사(氷山寺):현재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氷溪里) 빙산 서쪽 기슭에 있던 절로, 신라 말기나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석탑만 남아 있다.
360|오봉선생문집 2
10년 임오년(1582) 선생 21세
11년 계미년(1583) 선생 22세
12년 갑신년(1584) 선생 23세
❙ 2월에 부인 조씨趙氏【증 형조 판서 조지趙址23)의 따님이고, 어계漁溪 조려趙旅24)의 후손이다.】에게 장가들었다.
13년 을유년(1585) 선생 24세
14년 병술년(1586) 선생 25세
15년 정해년(1587) 선생 26세
16년 무자년(1588) 선생 27세
❙ 4월에 유일재惟一齋 선생의 부고를 듣고 급히 달려가 곡하였다.
○ 만시輓詩가 있다.
17년 기축년(1589) 선생 28세
❙ 2월에 증광시의 크고 작은 향시에 합격하였다.
❙ 4월에 문과에서 갑과 3인으로 급제하였다.
22) 윤국형(尹國馨, 1543∼1611):자는 수부(粹夫), 호는 달촌(達村),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568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 정언•홍문관 부제학•충청도 관찰사•병조 참판•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문소만록(聞韶漫錄) 이 있다.
23) 조지(趙址):자는 극립(克立), 호는 망운(望雲),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조려(趙旅)의 5대손이다.
24) 조려(趙旅, 1420∼1489):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본관은 함안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
다.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저서로는 어계집 이 있다.
연보 |361
○ 이단異端에 대하여 논한 대책문으로 1등에 뽑혔다. 당시 서애西厓 류 선생25)이 감독관으로 있었는데,26) 어떤 이가 “이번 시험에 장원한 사람은 그 문장이 어떠하기에 이토록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까?”라고 묻자, 류 선생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면 아마 문장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5월에 무공랑務功郞 사섬시 직장에 제수되었다.
❙ 말미를 청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어버이를 뵙고 유일재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였다.
❙ 11월에 선무랑宣務郞에 승진하여 조정으로 돌아갔다.
18년 경인년(1590) 선생 29세
❙ 4월에 승훈랑承訓郞에 제수되었다.
❙ 5월에 승의랑承議郞에 제수되었다.
❙ 말미를 청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어버이를 뵈었다.
19년 신묘년(1591) 선생 30세
❙ 2월에 성균관 전적에 승진하였다.
❙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 6월에 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제수되었다.
○ 선생은 연로한 어버이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고향에 가까운 고을에 부임하기를 원하였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27) 선생이 안타까워하며 “이제 막 벼슬길에 나왔는데 어찌 그리 서둘러 외직으로 나가려 하는가? 조정에서 자네를 병조의 낭관으로 천거하려고 논의 중인 데 어찌하여 조금 기다려보지 않는가?”라고 하니, 선생이 “벼슬길이 트이고 막히는 것은 운수에 달려 있고, 무엇보다 고을이 고향집과 가까워서 찾아뵙고 살피기에 편합니다.”라고 답하였다.
25) 서애(西厓) 류 선생:서애는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호이다. 자는 이현(而見),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1566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권지부정자•이조 정랑•도승지•경상도 관찰사•예조 판서•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서애집 • 징비록 등이 있다.
26) 당시……있었는데:류성룡은 1588년 12월 대제학에 임명된 뒤 이때까지도 그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 시험을 주관하고 감독한 것으로 보인다.( 선조실록 권22, 권23)
27) 김성일(金誠一, 1538∼1593):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1568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권지부정자•예문관 검열•사간원 정언•이조 정랑•동부승지•경상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학봉집 이 있다.
362|오봉선생문집 2
❙ 7월에 예안현에 부임하였다.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선생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 선생은 뒤늦게 태어나 도산의 문하에서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늘28) 한스럽게 여겼다. 고을에 부임한 뒤로 매달 서원에 들러 사당에 참배하고 선생의 유적을 둘러보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흥의 뜻을 붙이고, 당시 퇴계 선생 문하에서 직접 배운 원로로서 예컨대 월천月川 조목趙穆29) 공,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30) 공,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31) 공,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32) 공과 서로 왕래하고 교유하며 경전의 뜻을 강론하였다. 임진왜란으로 군사를 징발하고 민생을 돌보느라 한시가 급박한 중에도 왕래를 멈추지 않았다.
❙ 8월에 고향으로 돌아와 어버이를 문안하고 유일재 선생의 묘소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 11월에 봉직랑奉直郞에 제수되었다.
○ 이때 강도 10여 명이 관아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절도사가 본관 수령에게 형살刑殺의 권한을 위임하니, 강도들이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여 벌벌 떨었다. 선생이 풀어 주라고 명 하고는 “너희들은 본래 선량한 백성인데 생계가 어려워 스스로 불의에 빠진 것이다. 이제 내가 너희들을 살려 주면 너희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라고 타이르니, 강도들이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백 번 절하고는 돌아가 농사짓기를 원하였다. 선생이 이들을 모두 놓아주니, 이로부터 고을 경내에 범죄가 없어졌다.
28) 늘:대본에 이 부분의 원문이 ‘상(嘗)’으로 되어 있는데, 「오봉선생문집 서문[梧峯先生文集序]」에 의거하여 ‘상(常)’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29) 조목(趙穆, 1524∼1606):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1552년 생원
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왔으나 사양하였다. 일생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저서로는 월천집 이 있다.
30) 김부륜(金富倫, 1531∼1598):자는 돈서(惇敍), 호는 설월당(雪月堂),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55
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전생서 참봉•내섬시 주부•동복 현감•봉화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설월당집 이 있다.
31) 이덕홍(李德弘, 1541∼1596):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 본관은 영천이다. 집경전 참봉•창
릉 참봉•현릉 참봉•사옹원 직장•영춘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영주 오계서원(汚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재집 • 주역질의(周易質疑) • 사서질의(四書質疑) 등이 있다.
32) 금난수(琴蘭秀, 1530∼1604):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1561년
생원시에 합격한 뒤 1579년 유일로 제릉 참봉•집경전 참봉•장흥고 봉사•장례원 사평•봉화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성재집 이 있다.
연보 |363
20년 임진년(1592) 선생 31세
❙ 4월에 집에 돌아가 어버이를 문안하고 수연壽宴을 베풀었다.
❙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급히 달려 관아로 돌아갔다.
○ 선생은 집에서 왜구의 변란을 듣고서 아우들에게 어버이를 모시고 난리를 피해 고을 동쪽 공곡孔谷33)에 숨게 하였다. 선생이 급히 예안으로 돌아가는데, 길을 나서려 할 때 갑자기 예안의 백성이라고 하는 건장한 병사 수십 명이 나타나 “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라고 하였고, 임소에 도착한 뒤에도 병사들이 늘 따라다니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선생이 괴이하게 여겨 물어 보니, 바로 지난번에 풀어 주었던 강도 무리들이 목숨 바쳐 은덕에 보답하고 싶어서 한 일이었다.
❙ 왜적이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적이 내륙까지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관아로 돌아갔다.
❙ 5월에 안동 부사를 겸하여 두 고을의 군대를 거느리고 왜적을 공격하였다.
○ 당시 안동에는 수령이 없었다. 이에 백암柏巖 김륵金玏34) 공이 본도의 안집사安集使로서임금에게 아뢰어 선생에게 안동 부사를 겸하여 안동과 예안의 군대를 거느리고 의성義城아래의 왜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 안집사가 포계褒啓35)를 올렸다.
○ 안집사가 아뢰기를 “나라가 위험에 빠진 지금 인재를 얻는 것이 시급합니다. 예안은 현감 신지제가 다른 고을들이 무너진 가운데서도 우뚝이 지켜서 고을의 일이 조금도 무너지지 않게 하였으니, 그 충성과 절의를 표창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33) 공곡(孔谷):의성군 사곡면(舍谷面) 공정리(孔亭里)에 있는 골짜기로, 임진왜란 당시 피난민들이 산속 깊숙한 이곳에 숨어들면서 마을이 생겼다.
34) 김륵(金玏, 1540∼1616):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柏巖),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1576년 문과
에 급제한 뒤 예조 좌랑•사헌부 지평•안동 부사•호조 참판•한성부 좌윤•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영주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민절(敏節)이다. 저서로는 백암집 이 있다.
35) 포계(褒啓):관찰사나 어사가 고을 수령의 선정을 칭찬하고 장려하고자 임금에게 아뢰는 일을 말한다.
364|오봉선생문집 2
❙ 다시 설월당공雪月堂公(김부륜)에게 답장을 써서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 3일에 쓴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왜구 소식은 지난번 알려 드린 것 밖에 달리 전할 말이 없습니다. 양사兩使(감사와 병사)가 지시하는 일이 잠잠하여 전혀 들을 수 없으니, 이는 분명 여러 고을이 텅 비고 도로가 막혀서 그런 것입니다. 얼핏 듣기에 도성의 백성이 모두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고 대낮에도 성문이 닫혀 있어서 나무꾼과 목동이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저 왜적은 교활하기 그지없으니 만약 적이 아직 경주慶州에 있다면 도리어 동해와 서해 두 바닷길을 따라서 망측한 변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5일에 쓴 편지는 대략 이와 같다.
“왜적이 이미 조령과 죽령을 넘었고 충주진忠州鎭도 패했다 하니, 이 말은 서울에서 내려온 안동 사람이 전해 준 것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한 지역을 보존한다 한들 끝내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적이 만약 서울을 침범했다면 관찰사와 절도사가 마땅히 군대를거느리고 급히 달려가야 하는데 조정에서 아무런 전달이 없으니, 나랏일이 마침내 어떤지경이 되겠습니까. 적이 기왕에 우리 고을을 침범하지 않았으니, 백성에게 편안히 농사짓도록 권면하여 굶주리는 일이 없게 하고, 또 군대와 말을 훈련시켜 의병장이 모집할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 군대를 거느리고 용궁龍宮36) 지역으로 달려가서 적의 길목을 막았다.
○ 선생은 왜적이 용궁에서 서울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서 두 고을의 군대와 백성을 모아서적의 길목을 막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용궁 지역에 들어섰을 때 규합한 병사들이 적의기세가 몹시 대단한 것을 바라보고는 모두 놀라 흩어져 도망쳤다. 선생이 홀로 말을 타고 서 있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하마터면 벗어나지 못할 뻔했는데, 문득 어디선가 건장한 병사 70여 명이 왜적의 진영으로 불쑥 뛰어 들어와 선생을 호위하여 빠져나왔다. 당시함께 포위를 당한 관아의 하인 아이 하나가 선생의 말 뒤꽁무니를 부여잡고 있어서 앞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병사들이 칼을 뽑아 내리치는 바람에 곧장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관아로 돌아온 뒤에야 선생은 이들이 전에 풀어 주었던 강도 무리임을 알고서 “너희들의 뜻은 참으로 가상하나 도리어 사람을 해쳤다. 이전의 과오를 고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병사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피해를 입은 것은 작고 지켜 낸것은 큽니다.”라고 하고서 하직하고 떠났다. 선생은 늘 관아의 하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여워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36) 용궁(龍宮):예천군 용궁면을 말한다.
연보 |365
❙ 왜적이 안동에서 본 고을을 침범하러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다시 모의하여 군사를 모집하였다.
○ 당시 월천月川 조목趙穆 공이 선생에게 답한 시에
파도처럼 굽이치는 말 얼마나 씩씩한가 波瀾起伏詞何壯
간담에 서린 충정은 귀신들도 슬퍼하네 肝膽精忠鬼亦悲
예로부터 잔악한 무리들 결국 섬멸했으니 自古强梁終殄滅
지금의 계책 참으로 웅혼하고 기특하네 只今籌策儘雄奇
라고 하고, 그 아래에 직접 주를 달아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였다고 하였기에 웅혼하고 기특하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백형伯兄37)의 부고를 들었다.
○ 백형이 선생보다 겨우 한 살이 많았지만 선생은 아버지처럼 섬겼다. 이때 이르러 백형이난리를 피해 맷골[鷹洞]38)의 바위 동굴 속에 숨었다가 왜적의 칼날에 살해되었는데, 숨이끊어지려 할 때 윗도리에 혈서를 써서 선생에게 부쳐 나라에 목숨 바칠 것을 권면하였다. 선생은 관직에 매인 몸이어서 곧바로 달려가 곡하지 못한 것이 평생 통한으로 남아골수에 사무쳤고, 평소에 말이 이에 미칠 때마다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 7월에 설월당공에게 답서를 보내 흩어진 백성을 일깨워 모을 것을 청하였다.
37) 백형(伯兄):신지제의 형 신지효(申之孝, 1561∼1592)를 가리킨다.
38) 맷골[鷹洞]:지금의 의성군 봉양면 천동(길천2리)을 가리킨다.
366|오봉선생문집 2
○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병마절도사의 행차가 마침 내일로 예정되어 있어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아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백성이 모두 달아나 꼭꼭 숨어 버렸으니 모집에 응할 기약이 전혀 없습니다. 고작 두어 명의 군관을 거느리고 간다면 경내에서 누가 일을 시키고 호령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거사할 때 도로에서 행군하는 것과 매복을 설치하고 지휘하는 등의 일은 고을 사람들만 믿고 할 수 있습니다. 난리를 피해 숨은 백성이 혹 나타나면 의리로써 깨우치고, 노복 중에 건장한 이에게도 모집에 응하여 나오라고 타이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21년 계사년(1593) 선생 32세
❙ 봄에 야성野城39)에서 손오한孫聱漢40)【이름은 기양起陽, 자는 경징景徵이다.】을 만나 시를 지어 회포를 기술하였다.
○ 시가 별집 에 실려 있다.
❙ 5월에 학봉鶴峯 선생의 부고를 듣고 곡하였다.
○ 김 선생은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뒤 4월 그믐에 진주晉州에서 세상을 떠났다.
❙ 김근시재金近始齋41)【이름은 해垓, 자는 달원達遠이다.】의 죽음에 곡하였다.
○ 김공은 선생과 같은 해에 급제하여 교분이 매우 깊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공이 의병장이되었는데, 선생이 그와 함께 이야기 나누다가 말이 나랏일에 미치자 “우리들이 마음을합쳐 나라 위해 목숨 바쳐야 합니다. 만약 불행한 일이 생기면 처자식을 부탁합니다.”라고 개탄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김공이 경주慶州 진중에서 병사하자, 선생이 슬픔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 흉년이 들어서 김공의 가족들이 굶주려 죽을 지경이었는데, 선생이 힘닿는 대로 도와 그의 어린 자식들을 거두어 관아 안에 두고서 부인夫人으로 하여금 직접 빗질하고 씻기며 먹이고 길러서 온전히 살 수 있게 하였다.
39) 야성(野城):영덕군(盈德郡)의 옛 이름이다.
40) 손오한(孫聱漢):오한은 손기양(孫起陽, 1559∼1617)의 호이다. 자는 경징(景徵), 다른 호는 송간
(松磵), 본관은 밀양이다. 1588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학유•성현도 찰방•신녕 현감•울주 판관•창원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밀양 칠탄서원(七灘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오한집 이 있다.
41) 김근시재(金近始齋):근시재는 김해(金垓, 1555∼1593)의 호이다. 자는 달원(達遠), 본관은 광산(光
山)이다. 1589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사직서 참봉•승문원 정자•예문관 검열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경주(慶州)에서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근시재집 이 있다.
연보 |367
○ 애도한 시가 있다.
❙ 겨울에 관찰사에게 글을 올려 정책의 잘잘못을 네 조목으로 논하였다.
○ 그 내용은 “첫째, 포상이 분명하지 못함. 둘째, 군율이 공정하지 못함. 셋째, 비장裨將이불필요하게 많음. 넷째, 군비 확충을 늦추어선 안 됨.”이라는 것이었다.
○ 글이 별집 에 실려 있다.
❙ 12월에 학봉鶴峯 선생의 장례에 참석하였다.
○ 학봉 선생의 운구가 진주晉州에서 안동 가수내[佳樹川]42)로 돌아와 장례 치를 때 선생이 직접 가서 제사를 올렸다. 제문이 있다.
○ 살펴보건대, 선생은 제문에서 스스로 “못난 불초 소자가 문하에 드나든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고, 「유청량산록遊淸涼山錄」43)에서 또 스스로 “학봉 어른은 내가 스승으로 섬기던 분인데 이제 고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44) 공이선생에게 올린 제문에 “일찍부터 학봉 어른에게 인정받고, 오로지 퇴계의 가르침 본받았네.[夙見知於鶴老 專步趨於陶谷]”라고 하였다. 대개 선생이 일찍이 김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며 배웠는데 처음 가르침을 청한 날을 상고할 수 없기 때문에 부음을 듣고 장례에 참석한 연월만 위와 같이 기록하였다.
○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 병란 중에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즐비하자, 선생이 마음을 다해 구제하여 날마다 한 말의 곡식을 주며 “인정이란 많은 것을 보면 쉽게 쓰기 마련이니 다급할 때에 돕는 것만못하다.”라고 하였다. 덕분에 고을 백성이 구렁텅이에 뒹구는 일을 면하게 되었다. 이에 원근에서 떠돌며 빌어먹는 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선생이 “모두 다 같은 백성이니 차마 피차를 구분하지 못하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아울러 구제하여 목숨을 보존한 이가 수천여 명이었다.
42) 가수내[佳樹川]:안동시 와룡면 서지리(西枝里)에 있는 마을이다.
43) 「유청량산록(遊淸涼山錄)」:예안 현감으로 있던 신지제가 1594년 9월에 김강(金堈)•금난수(琴蘭秀)
등과 함께 청량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기행문으로, 오봉집 권7에 실려 있다.
44) 조형도(趙亨道, 1567∼1637):자는 대이(大而)•경달(景達),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함안(咸安)이
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겸 비국랑•경산 현령•보성 군수•경주 영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동계집 이 있다.
368|오봉선생문집 2
22년 갑오년(1594) 선생 33세
❙ 1월에 통선랑通善郞 예조 정랑 겸 예안 현감에 제수되었다.
○ 순찰사가 선생이 임소를 떠나지 않고 잘 지킨다고 논계論啓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내렸다.
❙ 9월에 청량산에 가서 거점으로 삼을 만큼 험준한 형세인지를 살폈다.
○ 지난겨울에 선생이 관찰사에게 글을 올려 “먼저 험준한 곳으로서 예컨대 소백산小白山, 청량산淸涼山, 주왕산周王山, 팔공산八公山 등을 찾아서 그 형세를 살피고 무기를 준비한 다음 각 진에서 나누어 지키며 서로 돕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법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45) 공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선생에게 청량산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 고산孤山46)에 들러 성성재惺惺齋 금공琴公(금난수琴蘭秀)을 방문하고 그길로 동행 하였다.
○ 「유청량산록遊淸涼山錄」이 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금난수 어른이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물길 따라 거슬러 오르다가 퇴계 선생이 직접 쓴 짧은 시47)가 바위 절벽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감상하였는데, 필적이 마치 어제 쓴 것처럼 선명하였다. 금난수 어른이 귀중한 서첩 두 개를 꺼내어 내게 보여 주었는데, 이는 퇴계 선생이 평소에 주고받은 편지와 지은 글을 모아서 소중히 보관한 것이었다. 금난수 어른과 함께 걸어서 청량산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어서 다시 고산孤山으로 돌아와 묵었다. 한밤중에 정사精舍48)에 들어가 서책을 꺼내어 읽어 보았다. 이튿날 금난수 어른이 배 위에서 나를 배웅하였다. 대개 중국의 명산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산이 있는지 묻는다면 형산衡山과 여산廬山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는 남헌南軒과 회암晦菴 두 선생이 산을 두루 유람하여 진면목을 드러내 밝혔기 때문이다.49) 우리나라의 명산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산이 있는지 묻는다면 청량산淸涼山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는 퇴계 선생이 왕래하며 유람한 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천 개 바위와 만 개 골짜기에 아직도 선생이 지팡이 짚고 다닌 자취가 남아 있다. 열두 봉우리를 바라보니, 우뚝하여 미칠 수 없는 것이 있고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크고 웅장하여 기대었다 돌아올 만한 것이 있고 단정하고 엄숙하여 우러러 공경할 만한 것이 있다. 내가 청량산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산 자체를 사랑해서일 뿐만이 아니다.
아! 내가 동방에서 뒤늦게 태어났으니, 돌이켜보면 이제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벌써 30년이 지났다. 어리석고 모자란 내가 갈팡질팡 헤매니 누구를 의지하랴. 세상살이 아득하기만 하고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는데 사숙私淑하고 싶은 마음마저 그르치고 말았다. 청량산에서 와서 내 마음에 느끼는 바가 없겠는가.……”
23년 을미년(1595) 선생 34세
❙ 4월에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다.
45) 홍이상(洪履祥, 1549∼1615):자는 군서(君瑞)•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 본관은 풍산(豐山)이
다. 1579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 좌랑•태복시 정•대사간•좌승지•형조 참판•청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고양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당집 이 있다.
46) 고산(孤山):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佳松里)로, 당시 지명은 일동(日洞)인데 고산 아래에 있어 ‘고산’이라 하였다.
47) 퇴계……시:이황이 금난수를 위하여 지어 준 칠언절구 「고산의 바위 절벽에 쓰다[書孤山石壁]」인 듯하다. 퇴계집 권2에 보인다.
48) 정사(精舍):금난수(琴蘭秀)가 1564년에 도산면 가송리 고산 아래에 지은 ‘일동정사(日東精舍)’로, 지금은 고산정(孤山亭)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49) 이는……때문이다:형산(衡山)과 여산(廬山)이 훌륭한 인물을 만나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남헌(南軒)은 장식(張栻, 1133∼1180)의 호이고 회암(晦菴)은 주희(朱熹, 1130∼1200)의 호이다. 형산은 중국의 남악(南嶽)으로 1167년에 장식과 주희가 이 산을 유람하고 지은 남악창수집(南嶽唱酬集) 과 「남악유산후기(南嶽遊山後記)」가 전하고, 여산은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산으로 1179년 주희가 남강군 지사(南康軍知事)로 부임한 뒤 주변에 있는 선현들의 유적지를 찾아 사당을 짓고 서원을 중건한 사실이 있다.
370|오봉선생문집 2
24년 병신년(1596) 선생 35세
❙ 2월에 조봉대부에 제수되었다.
❙ 3월에 유일재惟一齋 선생의 묘소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 이때 유일재 선생의 부인夫人이 살아 있었는데, 선생이 동문들과 묘소에 제사 지내고 나서 부인에게 헌수獻壽하였다.
○ 이때 왜적이 다시 침범하자, 관찰사 이용순李用淳52)이 먼저 산성에 들어가 그길로 각고을의 수령을 독려하였으니, 나가서 싸우다가 들어와 지키려는 계획이었다. 선생이 함께 들어가 의성 현령 여대로呂大老53), 의흥 현감 이대기李大期54), 경산 현령 조형도趙亨道, 경주 부윤 박의장朴毅長, 신녕 현감 손기양孫起陽, 청송 부사 박유인朴惟仁55), 하양 현감 문관도文貫道56), 울산 군수 김태허金太虛57), 영천 군수 홍계남洪季男58), 방어사 권응수權應銖59) 등 여러 사람과 한마음으로 목숨 바쳐 지키며 난리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였다. 이 사실이 손공孫公이 지은 「공산지公山誌」60)에 실려 있다.
❙ 예안현禮安縣을 지나다가 설월당공雪月堂公(김부륜)에게 시를 부쳐서 사례하였다.
○ 이때 선생이 종사관으로서 예안을 지나는데 설월당공이 간절히 만나 보기를 요구하였지만 바빠서 찾아갈 수 없어서 시를 부쳐 사례하였다.
❙ 조대소헌趙大笑軒61)【이름은 종도宗道, 자는 백유伯由이다.】과 함양군咸陽郡 경내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50) 이원익(李元翼, 1547∼1634):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이다. 1569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동부승지•안주 목사•이조 판서•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오리집
등이 있다.
51) 팔공산성(八公山城):대구광역시 북부 팔공산에 있는 성이다.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의 공격을 막기 위해 처음 쌓았고, 정유재란 때 적을 방비하기 위해 개축하였다.
53) 여대로(呂大老, 1552∼1619):자는 위수(渭叟)•성우(聖遇), 호는 감호(鑑湖),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1583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박사•형조 좌랑•사헌부 지평•합천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감호집 이 있다.
54) 이대기(李大期, 1551∼1628):자는 임중(任重), 호는 설학(雪壑),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장원서 별
제•황산도 찰방•형조 정랑•함양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초계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설학집 이 있다.
55) 박유인(朴惟仁, 1545∼?):자는 응부(應夫),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572년 무과에 급제한 뒤 청송 부사•훈련원 정 등을 역임하였다.
56) 문관도(文貫道, 1550∼1605):자는 중기(重器), 호는 기헌(羇軒),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1583년
무과에 급제한 뒤 칠포 만호•하양 현감•경주 통판•경상도 순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57) 김태허(金太虛, 1555∼1620):자는 여보(汝寶), 호는 박연정(博淵亭),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1580
년 무과에 급제한 뒤 옥포 만호(玉浦萬戶)•밀양 부사•울산 군수•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58) 홍계남(洪季男, 1564∼1597):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경기도 조방장•수원 판관•영천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병이 들어 요절하였다. 판돈녕부사에 추증되었다.
59) 권응수(權應銖, 1546∼1608):자는 중평(仲平), 호는 백운재(白雲齋), 본관은 안동이다. 1583년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부봉사•경상좌도 병마절도사•도총부 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60) 「공산지(公山誌)」:손기양(孫起陽, 1559∼1617)이 1597년에 팔공산성(八公山城)에 대해 기록한 것
으로, 정유재란을 대비하여 산성을 개축한 사실에서부터 적의 침입으로 무너지는 과정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한집(聱漢集) 권4 「잡저」에 보인다.
61) 조대소헌(趙大笑軒):대소헌은 조종도(趙宗道, 1527∼1597)의 호이다. 자는 백유(伯由),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1558년 소과에 합격한 뒤 안기도 찰방•상서원 직장•양지 현감•단성 현감•함양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규합하여 적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함안 덕암서원(德巖書院)과 안의(安義) 황암서원(黃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저서로는 대소헌집 이 있다.
372|오봉선생문집 2
○ 선생이 일찍이 스스로 그때 일을 기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은 기백이 넘치고 지조가 굳세어 자호를 ‘대소大笑’라고 하였다. 난리가 일어났을 때 공은 함양 군수로 있었다. 내가 이때 순찰사의 보좌관으로서 고을 경내를 지나는데 공이 술을 가지고 마중 나왔다. 모인 자리에서 말이 나랏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였고, 이어서 시를 지어 읊기를 ‘공동산 밖에서 편안히 사는 것도 즐겁지만, 장순과 허원처럼 성 안에서 죽는 것도 영광일세.62)[崆峒山外生猶樂 巡遠城中死亦榮]’라고 하였다. 몇 개월이 되지 않아 왜적이 황석산성黃石山城63)을 함락했을 때 공이 곽준郭䞭64)과 함께 전사하였다.”
❙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달려가 망우忘憂 곽재우郭再祐65) 공과 동맹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 곽공이 석문산성石門山城66)에서 화왕산성으로 옮겨와 지키며 다시 의병을 일으켰을 때선생이 달려갔고, 마침내 창의록倡義錄 67)에 이름이 수록되었다.
62) 공동산(崆峒山)……영광일세:은거하여 사는 것도 좋지만 나라에 목숨 바치는 것도 의미 있다는 말이다. 공동산은 중국 황제(黃帝) 때의 은자 광성자(廣成子)가 있던 곳이고( 莊子 「在宥」),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당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 회양(睢陽)의 성을 지키다가 전사한 두 충신이다.( 唐書 卷192 「張巡傳」)
63) 황석산성(黃石山城):함양군 서하면 봉전리(鳳田里)에 있는 산성으로, 삼국 시대에 처음 지어졌고 고려와 조선 초기에도 수축한 바가 있다. 영남과 호남을 잇는 길목에 있어서 중요시되었다.
64) 곽준(郭䞭, 1551∼1597):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자여도 찰방을 지냈고, 정유재란 때 안음 현감으로서 황석산성을 지키던 중에 아들 곽이상(郭履常)•곽이후(郭履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안의(安義) 황암서원(黃巖書院)과 현풍 예연서원(禮淵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저서로는 존재실기 가 있다.
65) 곽재우(郭再祐, 1552∼1617):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忘憂),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성주 목사•
진주 목사•한성부 우윤•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남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598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성을 지켰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저서로는 망우집 이 있다.
66) 석문산성(石門山城):경상좌도 방어사로 있던 곽재우가 정유재란을 대비하여 쌓은 성으로, 현풍(玄風)에 있다.
67) 창의록(倡義錄) :곽재우의 후손 곽원갑(郭元甲)이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의 사적과 인물을 기록한 책으로, 임진왜란(1592) 때 모집에 응한 사람의 명단을 기록한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과 정유재란(1597) 때 화왕산성 방어에 공을 세운 이의 명단을 기록한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 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보 |373
26년 무술년(1598) 선생 37세
❙ 3월에 백씨伯氏가 성리대전性理大全 에서 가려 쓴 책 뒤에 발문을 썼다.
○ 발문이 별집 에 실려 있다.
❙ 가을에 성성재惺惺齋 금공琴公이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68)을 베껴서 보내 왔다.
○ 고경중마방 은 퇴계 선생이 편찬한 것으로, 고금의 잠명箴銘이 실려 있다. 선생이 일찍이 금공에게 이것을 1통 베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데, 이때에 이르러 베껴서 보냈다. 금공이 책 끝에 특별히 “만력 무술년 가을에 신오봉申梧峯을 위하여 고산孤山의 정사精舍에서 쓰다.”라고 썼다.
27년 기해년(1599) 선생 38세
28년 경자년(1600) 선생 39세
❙ 2월에 중훈대부에 제수되고 전라도 도사에 제수되었다.
○ 호남에서 지은 글이 여러 편 있다.
❙ 5월에 아들 홍망弘望69)이 태어났다.
○ 이전에 선생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꿈에 신령이 아이를 안고 나타나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후손에게 경사가 있다. 그대에게 기이한 아이를 보내 줄 것이니, ‘망望’ 자를넣어서 이름을 지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68)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이황(李滉)이 고금의 문헌 중에서 심신 수양에 관련된 명(銘)•잠(箴)•찬(贊) 77수를 모아 엮은 책이다. 책 제목은 주희(朱熹)의 시 「임희지를 전송하다[送林熙之]」 가운데 “낡은 거울 갈고 닦음은 옛사람의 좋은 방법, 보는 눈 밝아지면 저 해와 광명 다투리.[古鏡重磨要古方 眼明偏與日爭光]”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69) 신홍망(申弘望, 1600∼1673):자는 망구(望久), 호는 고송(孤松), 본관은 아주이다. 1639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풍기 군수•강원도 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고송집 이 있다.
374|오봉선생문집 2
29년 신축년(1601) 선생 40세
❙ 정월에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 2월에 중직대부에 오르고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 선생은 한 번도 권세가의 집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어떤 이가 “아무 재상이 군의 풍모를 사랑하여 만나 보기를 무척 원합니다. 어찌하여 한번 찾아가지 않습니까?”라고 권하였는데, 선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훗날 그가 또 와서 “군과 같은 재능과 명망으로 낮은 관직에 머물러 있으니, 재상이 한사코 군을 만나 보려고 하는 것은 그 뜻이 크게 쓰려는 데에 있습니다. 뜻을 굽혀 한번 나아간들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웃으며 “곤궁과 영달은 천명에 달려 있습니다. 초야의 빈한한 선비가 어찌 권세가에 청탁을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7월에 영남 출신 인사들과 장악원掌樂院에서 동도회同道會를 설립하였다.
○ 이름을 기록한 책70)이 있다. 회원이 모두 27명이고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71) 상공이 시를 짓고 아울러 서문을 썼다.
❙ 8월에 전주부 판관에 제수되었다.
○ 관청의 일이 몹시 번다했지만 선생은 마음을 다해 모두 이치에 맞게 처결하였고, 강자를억누르고 약자를 도와주어서 위엄과 은혜가 함께 행해졌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세워 기렸다.
30년 임인년(1602) 선생 41세
❙ 3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 통훈대부에 제수되고 체찰사 종사관이 되었다.
70) 이름을 기록한 책: 영남동도회제명첩(嶺南同道會題名帖) 을 가리킨다. 1601년 7월에 이호민(李好閔)을 비롯한 영남 출신 관료 26명이 모임을 가진 다음 회원 총 27명의 관직과 이름•출신지 등을 기록하였다.( 睡足堂先生實紀 「嶺南同道會帖跋」)
71) 이호민(李好閔, 1553∼1634):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본관은 연안
(延安)이다. 158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병조 좌랑•좌승지•예조 판서•홍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는 오봉집 이 있다.
연보 |375
❙ 전라도 암행어사에 차출되었다.
○ 관리의 폐단을 없애고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었으며 실적에 대해 공정하게 평가했고 지방 토호들을 봐주지 않으니 고을 수령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7월에 실록교정청 낭청에 선발되었다.
31년 계묘년(1603) 선생 42세
❙ 8월에 경상도 군무안핵사에 차출되었다.
32년 갑진년(1604) 선생 43세
❙ 5월에 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 지제교에 제수되었다.
❙ 성상의 명에 따라 이광악李光岳72)과 고희高曦73)【모두 임란공신壬亂功臣이다.】에게 내릴 교서를 지어 올렸다. 호성 선무 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33년 을사년(1605) 선생 44세
❙ 5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시강원 문학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 사헌부에서 동료들과 계회를 열었다.
○ 사헌부 동료와 약속하여 계회契會를 가진 뒤 이름을 나열하고 실제 광경을 그려 10첩 작은 병풍을 만들고 저마다 1틀씩 나누어 가졌다.
❙ 왕명에 응하여 사헌부 차자箚子를 작성하였다.
○ 이때 풍수風水의 재해가 있어서 성상이 의견을 널리 구하였다. 차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72) 이광악(李光岳, 1557∼1608):자는 진지(鎭之),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158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곤양 군수•전라도 병마절도사•훈련원 도정 등을 역임하였다.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73) 고희(高曦, 1560∼1615):본관은 제주이다. 158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군기시 주부•부령 부사(富寧府使)•풍천 부사(豐川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한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으로 영성군(瀛城君)에 봉해졌다. 부안 효충사(效忠祠)에 제향되었다.
376|오봉선생문집 2
“신들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요사이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자리에 드러나는 이변들과 강과 바다와 나무와 돌과 짐승에게 나타나는 변괴는 모두 성상의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늘이 우리 백성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경서가 속이는 것이고,74) 사람의 일은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면 하늘이 속이는 것입니다. 신들이 만일 자리에 앉아서 봉록을 타 먹으려 생각하고 성상의 귀를 거스르는 충언을 꺼려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늘을 속이는 것입니다. 신들의말이 온당하지 않으면 마땅히 함부로 말한 죄를 받을 것이니, 진실로 전하의 작록을 헛되이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나라의 근본이 위태롭고 온 나라가 피폐하며 기강이 날로 해이해지고 정령이갈수록 문란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선대 열성조께서 물려준 은택에 힘입어 유지되고 있을 뿐이지, 조정이 잘 다스려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정한 도리가 모두 사라지고 사사로운 욕심이 마구 난무하여 하나같이 서로 배척하는 것을 일삼고 나랏일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한쪽 사람이 등용될 때마다 한쪽 사람이 물러났으니, 지금까지 몇사람이 등용되고 몇 사람이 물러났습니까. 경박한 신출내기들이 여론을 맡아서 묘당廟堂을 뒤흔들고 대성臺省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밝은 성상께서는 가려진 바가있어서 살피지 못하고 조정의 신료들은 하는 대로 내버려 둔 채 금하지 못하며, 음양을 고르게 다스려야 할 사람75)이 천지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도록 돕는 일에 무관심하며 간언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공정하게 시비를 가려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쪽변경에 근심거리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북쪽 변방에 다급한 경보가 잇달아 이르렀습니다. 오늘의 변고는 하늘이 내린 재앙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를 변화시켜 만회할 방법은 큰 근본을 세우고 큰 강령을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고, 그 밖의 세세한 일은 힘쓸 것도 없습니다.
74) 하늘이……것이고: 서경 「태서 중(泰誓中)」에 “하늘은 우리 백성의 눈을 통해 본다.[天視自我民視]”라고 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75) 음양을……사람:재상(宰相)을 말한다. 서경 「주서(周書)•주관(周官)」에 “태사와 태부와 태보 이
삼공은 치국의 도를 강구하여 나라를 경영하며 음양의 기운을 고르게 다스린다.[立太師 太傳 太保玆惟三公 論道經邦 燮理陰陽]”라고 하였다.
연보 |377
전하께서는 보위에 오른 이후로 격치성정格致誠正76)의 학문과 참찬위육參贊位育77)의 공부를 오래도록 익히고 편안하게 행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두 사람의 어진 재상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힘을 썼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신들은 전하께서 인재를 쓰고 버릴 즈음에 그저 비위나 맞추며 임금을 섬기는 자를 어질게 여기시는지, 아니면 사직을 편안하게 안정시키는 이를 어질게 여기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한편은 그 말이 달콤하여 받아들이기 쉽고 다른 한편은 그 행동이 직설적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인재를 쓰고 버리는 것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나라의 존망과 직결되니 더욱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만일 아랫사람에게 사사로움이 없기를 바란다면 먼저 ‘사사로움[私]’이라는 한 글자를 없애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요사이 벼슬을 내리는 날마다 궁 밖의사람들이 성인의 조정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손가락질해대고, 심지어 하인들까지도 모두 아무는 아무와 인연이 있다느니 아무가 아무에게 빌붙었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임명장이 내려오기도 전에 벌써 누구라는 말이 떠도니, 작은 벼슬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큰 벼슬도 이런 폐단을 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에 넘치는 일을 바라고 벼슬과 상을 함부로 행사한 탓에 불만에 쌓인 민심이 거리마다 가득합니다. 신들은 이러한 조치가 성상의 치세에 큰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게다가 왕실이 끼치는 폐단은 지금 세상에서 말하기 어려운 고질이 되어서 경연에서 측근 신하들이 이 일을 언급할 때면 번번이 견책을 받고 귀양을 갑니다.
아! 대궐문 밖에 원성이 들끓는데 재상과 측근 신하들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니, 전하께서는 어디에서 왕자의 허물을 듣고서 올바른 가르침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시는데 신하들이 곧이곧대로 그 허물을 들추어내려 한다면 불경죄에 가깝습니다. 신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왕자가 불의에 빠진것을 보고서도 전하 앞에서는 따르는 척하다가 집으로 물러나서는 몰래 비방한다면
76) 격치성정(格致誠正):사물의 도리를 파고들어 지식을 명확히 한다는 의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뜻을
정성스럽게 품고 마음을 바르게 가진다는 의미의 성의정심(誠意正心)을 합친 말로, 대학 에 보인다.
77) 참찬위육(參贊位育):천지가 제자리를 잡아 안정되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지는 일을 도와 천지와 함
께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중용 1장과 22장에 나오는 말이다.
378|오봉선생문집 2
그것이 임금을 공경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고수瞽瞍가 사람을 죽이면 법관은 법대로 집행할 뿐입니다.78) 법을 집행하는 관리는 임금의 아들이라도 처벌하기를 청해도 되는데, 하물며 신하들이 하인을 처벌하기를 청하는 경우이겠으며, 하물며 궁방의 종도 아니면서 가칭한 자이겠습니까. 당시 간사한 하인 한둘을 법률에 비추어 처벌하는 것이 나라의 체통에 있어서 무슨 큰 흠이 되기에 조정의 대신과 측근 신하들이 서로번갈아 청하는데도 받아들여지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입는 것입니까. 다만 구실을 붙여 주고 악행의 빌미를 제공할 뿐입니다.
여우와 쥐가 성곽과 사당에 빌붙어 사는 것79)처럼 사방에 가득 퍼져 남의 노비를빼앗고 남의 전답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이에 배반을 모의하는 하인들이 다투어 귀의하여 도리어 제 주인에게 창을 겨누고, 부역에서 도망친 백성이 다투어 붙좇아서 관아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들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갖은 방법으로 숨기고 속이기 때문에 고을 수령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관찰사도 손쓸 수가 없습니다.
지방 관아의 아전으로서 세금을 맡아 거두는 이가 속임을 당하기도 하고 시장의상인으로서 은전銀錢을 가진 이가 도리어 화를 입기도 하며, 게다가 마치 관청에서 하는 것처럼 옥사를 제멋대로 처결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의 원성이 차마 들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결코 왕실에서 자세히 알 수 없으니, 결국 모든원성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신들은 몹시 애통하게 여깁니다. 더구나 성스러운 조정에 경사가 넘쳐 왕족이 번창하게 되면 앞으로 이러한 잘못을 답습하는 폐단이 많아져 이루 다 바로 잡을 수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8) 고수(瞽瞍)가……뿐입니다:임금의 가족이라 해도 법 앞에서는 평등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수는 순(舜)임금의 아버지로, 천자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죄를 범했을 경우 법관인 고요(皐陶)는 어찌해야 하느냐는 도응(桃應)의 질문에 맹자가 “법대로 집행할 뿐이다.[執之而已矣]”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孟子 「盡心上」)
79) 여우와……것:소인배가 국가 권력의 비호 아래 이익을 챙기고 농간을 부리는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사곤(謝鯤)이 왕돈(王敦)에게 “유외(劉隗)는 참으로 화를 불러올 자이긴 하지만, 성벽에 숨어 사는 여우나 사당에 기어든 쥐와 같습니다.[隗誠始禍 城狐社鼠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성벽에 사는 여우를 잡으려고 여우 굴을 뒤지려다 성곽을 무너뜨릴까 염려되고 사당에 사는 쥐를 잡으려고 연기를 피우려다 사당을 태울까 두렵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晉書 「謝鯤傳」)
연보 |379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우선 인색한 마음이 움트는 것을 없애고 공변된 도를 선뜻 내보여서 광명하고 정대한 다스림이 중도를 세우고 표준을 세우는 마음에서 나오게 하소서. 그런 다음에야 공변된 도를 넓힐 수 있고 사사로운 정을 막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임진년 난리를 피하는 길에 군신 상하가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마음이 어떠하였습니까. 만약 항상 그러한 마음을 보존해 왔더라면 하늘은 예전에 벌써마음을 바꾸어 재앙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깊숙한 궁궐 안에서 거처하면서 피난길에 겪은 고난을 지금도 잊지 않으시며, 조정에 있는 신하들 중에서 전하의 근심을 잘 헤아리는 이가 있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재난이 많을수록 나라가 흥한다.’80)라고 하였고, 또 ‘망할까 염려하는 것이 보존하는 길이다.’81)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소서.”
이때 박승종朴承宗82)이 대사헌으로 있었는데 차자의 내용 중에 당시 권신이 싫어할 말이 있다하여 도중에 가로막고 아뢰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사직서를 바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 9월에 약포藥圃 정 상공鄭相公83)의 죽음에 곡하였다.
○ 만시가 있다.
❙ 좌승지공左承旨公84)을 모시고 송오松塢 이진李軫85)과 남계南溪 이보李輔86) 두 공과 함께 휴암鵂巖【의성義城 도리원桃李院에 있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82) 박승종(朴承宗, 1562∼1623):자는 효백(孝伯), 호는 퇴우당(退憂堂), 본관은 밀양이다. 1586년 문과
에 급제한 뒤 예문관 봉교•홍문관 부제학•병조 판서•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숙민(肅愍)이다.
83) 약포(藥圃) 정 상공(鄭相公):약포는 정탁(鄭琢, 1526∼1605)의 호이다. 자는 자정(子精), 또 다른
호는 백곡(栢谷), 본관은 청주이다. 1558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 정언•대사성•강원도 관찰사•이조 판서•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저서로는 약포집 이 있다.
84) 좌승지공(左承旨公):신지제의 아버지 신몽득(申夢得)이다. 좌승지는 추증된 관직이다.
85) 이진(李軫, 1536∼1610):자는 군임(君任), 호는 송오(松塢),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이보(李輔)의
형이다. 진보 현감과 정읍 현감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송오집 가 있다.
86) 이보(李輔, 1545∼1608):자는 경임(景任),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이진(李軫)의
아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인동 현감•당진 현감•군자감 판관•거창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남계실기 가 있다.
380|오봉선생문집 2
○ 두 공은 군위軍威에 살았는데, 좌승지공과 우의가 몹시 두터웠다. 이때 이르러 계회를 맺기 위해 모이기로 약속하여 선생이 모시고 갔다.
34년 병오년(1606) 선생 45세
❙ 4월에 충무위 부사용에 제수되었다.
❙ 7월에 통제사 종사관에 제수되었다.
○ 통제영은 각 분야의 장인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도 선생은 성품이 검소하여 행장이 해어지도록 새로 만든 적이 없었다.
○ 이때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87) 공이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통제사의 종사관으로 임명한 것은 어진 이를 대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곳에 머무르며 혼자만 애쓰시니 습한 바닷가 고을에서 지내는 탄식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총명하고 영특하여 무리 중에서 뛰어난 분을 늘 우러러 보았습니다. 벼슬하는 틈틈이 공부하라는 뜻으로 감히 존형에게 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5년 정미년(1607) 선생 46세
❙ 3월에 강계부江界府 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좌승지공(신몽득申夢得)이 병이 들어서 부임하지 않았다.
❙ 4월에 좌승지공의 상을 당하였다.
❙ 남계南溪 이공李公(이보李輔)이 조문하러 왔다.
❙ 5월에 서애西厓 선생의 부고를 들었다.
❙ 6월에 분황전焚黃奠88)을 행하였다.
○ 선생이 공신功臣이 된 것89)으로 인하여 선친에게 좌승지를 추증하고 어머니 박씨朴氏와 계모 오씨吳氏에게 숙부인淑夫人을 추증하였다.
87) 서사원(徐思遠, 1550∼1615):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낙재(樂齋)•고시자(顧諟子), 본
관은 달성(達城)이다. 선공감 감역•청안 현감 등을 지냈다. 대구 이강서원(伊江書院)과 청안(淸安)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재집 이 있다.
88) 분황전(焚黃奠):관직을 추증하는 교지의 부본(副本)을 그 당사자의 무덤 앞에 가서 고하고 태우는
의식을 말한다.
연보 |381
❙ 7월에 좌승지공을 비안현比安縣 동쪽 화장동花藏洞90)에 장사 지내고 3년 동안 여막살이를 하였다.
36년 무신년(1608) 선생 47세
❙ 2월에 선조宣祖가 승하하였다.
○ 선생이 여막에서 나와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37년 【광해군 원년】 기유년(1609) 선생 48세
❙ 2월에 오봉五峯 이 상공李相公(이호민李好閔)이 여막에 조문하러 왔다.
❙ 3월에 손오한孫聱漢(손기양孫起陽)이 여막에 조문하러 왔다.
❙ 6월에 삼년상을 마쳤다.
❙ 7월에 경암敬菴 노경임盧景任91)이 찾아왔다.
❙ 8월에 비로소 여막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 남계南溪 이공李公(이보李輔)이 죽어 집에 가서 곡하였다.
○ 제문이 있다.
❙ 12월에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혼조昏朝(광해군)의 정사가 어지러워 선생은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다.
38년 경술년(1610) 선생 49세
❙ 3월에 충청도 도사에 제수되었다.
○ 길을 떠나려 할 때 창석蒼石 이준李埈92) 공이 증별시를 지어
지금 대각에 후진들이 많지만 臺閣卽今多後進
조정에 누가 다시 선생을 알랴 朝廷誰復記先生
외로운 배 또 호남으로 향하는데 孤帆又向湖中去
앞강에 비바람 일어 물결이 거세네 風雨前江浪未平 라고 하였다.
89) 선생이……것:1605년 4월 16일에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봉된 것을 말한다.
90) 화장동(花藏洞):의성군 비안면 화신리(花新里)에 있는 마을이다.
91) 노경임(盧景任, 1569∼1620):자는 홍중(弘仲), 호는 경암(敬菴), 본관은 안강(安康)이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사헌부 지평•예조 정랑•성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경암집 이 있다.
382|오봉선생문집 2
○ 선생이 용인龍仁 객사에 도착하여 지은 시에
방초 핀 영남 떠나 서울 가는 길에 芳草東南西去路
백발이 성성한 마흔 아홉 살 늙은이 白頭四十九回秋
양주의 눈물 흘리며93) 가슴 아파하니 傷心一灑楊朱淚
혼이 꿈속에서 고향 언덕을 노니리라 魂夢應知落某丘
라고 하였다. 선생은 혼란한 시세를 안타까워하여 벼슬에 오래 머무를 뜻이 없었기 때문에 시의 뜻이 이와 같았다.
❙ 홍서담洪西潭94)【이름은 위瑋, 자는 위부偉夫이다.】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다.
○ 시가 본집에 실려 있다.
❙ 5월에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 7월에 서울로 부임하는 정매창鄭梅牕95)【이름은 사신士信, 자는 자부子孚이다.】을 전송하였다.
○ 증별시가 있다.
❙ 8월에 함경도 북평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92) 이준(李埈, 1560∼1635):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1591년 문과
에 급제한 뒤 교서관 정자•단양 군수•철원 부사•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창석집 이 있다.
93) 양주(楊朱)의 눈물 흘리며:갈림길에 서서 고민하는 상황을 말한다. 양주는 전국 시대 사람으로 두 갈래로 나뉘는 길에 당도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淮南子 「說林訓」)
94) 홍서담(洪西潭):서담은 홍위(洪瑋, 1559∼1624)의 호이다. 자는 위부(偉夫), 본관은 남양(南陽)이
다. 160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 지평•예조 좌랑•세자시강원 사서•병조 정랑•예천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서담집 이 있다.
95) 정매창(鄭梅牕):매창은 정사신(鄭士信, 1558∼1619)의 호이다. 자는 자부(子孚), 본관은 청주이다.
1582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권지부정자•성균관 전적•사복시 정•장례원 판결사•밀양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매창집 이 있다.
연보 |383
39년 신해년(1611) 선생 50세
❙ 10월에 전라도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0년 임자년(1612) 선생 51세
41년 계축년(1613) 선생 52세
❙ 8월에 창원 부사에 제수되었다.
❙ 9월에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애써 부임하였다.
○ 선생은 충청도 도사를 그만두고 돌아온 뒤로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어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렸지만 한 번도 부임한 적이 없었고 이때에도 사은숙배할 뜻이 없었다. 하지만오 부인吳夫人이 간절히 재촉하는 통에 마지못해 애써 일어나 관직에 부임하였다.
○ 선생이 사은숙배하고 서울 집에 물러나 있을 때 권세가가 “부임하러 가면 치하治下에 노비 하나가 송사하러 갈 것이니, 저를 봐서 잘 처리해 주길 바랍니다.”라며 청탁하였는데, 선생이 “공정한 마음으로 밝게 들으면 시비가 저절로 분별되니, 부당한 이치로 나에게 청탁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청탁한 이가 얼굴을 붉히면서 나갔고 마침내 송사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 남포南浦에서 뱃놀이하다가 월영대月影臺96)에 올라가서 놀았다.
○ 「월영대기月影臺記」97)가 있다.
❙ 10월에 고향으로 돌아와 성묘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임소로 왔다.
42년 갑인년(1614) 선생 53세
❙ 답청일踏靑日98)에 조간송趙澗松99)【이름은 임도任道, 자는 덕용德勇이다.】과 월영대에 서 노닐었다.
96) 월영대(月影臺):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에 있는 누대로,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만년에 소요 하였다고 한다.
97) 「월영대기(月影臺記)」:신지제가 누대의 고사를 이용하여 아들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오봉집 권6에 실려 있다.
384|오봉선생문집 2
○ 수창시가 있다.
❙ 성부용당成芙蓉堂100)【이름은 안의安義, 자는 정보精甫이다.】이 찾아와 며칠을 머물렀다.
○ 수창시가 있다.
❙ 4월에 손오한孫聱漢과 공명정空明亭 아래에서 배를 띄우고 강을 거슬러 올라 창암滄巖 강기슭에 있는 망우당 곽공의 정자101)【정자는 영산靈山에 있는데 곽공이 거주하는 곳이다.】를 방문하였다.
○ 전후로 지은 수창시가 있다.
❙ 학교를 건립하였다.
○ 본 고을이 병란을 겪은 뒤로 학교가 퇴락하였는데 선생이 마침내 봉록을 털어 학교를 짓고 유학을 진작시켰다.
❙ 5월에 오봉五峯 이 상공李相公의 시에 화답하였다.
○ 시가 본집에 실려 있다.
❙ 8월에 식년시 감시監試를 관장했다.
❙ 9월에 무과 도회시都會試102)를 관장했다.
98) 답청일(踏靑日):음력 3월 3일 삼짇날로, 들판에 나가 꽃구경하며 새로 돋은 풀을 밟으며 봄나들 이를 즐기는 날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99) 조간송(趙澗松):간송은 조임도(趙任道, 1585∼1664)의 호이다. 자는 덕용(德勇), 본관은 함안(咸
安)이다. 1615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간송
집 이 있다.
100) 성부용당(成芙蓉堂):부용당은 성안의(成安義, 1561∼1629)의 호이다. 자는 정보(精甫), 본관은 창
녕(昌寧)이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봉상시 참봉•영해 부사•상의원 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부용당집 이 있다.
101) 창암(滄巖)……정자:1602년에 곽재우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망우정(忘憂亭)으로, 현재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友江里) 창암에 있다.
102) 도회시(都會試):매년 6월에 관찰사가 도내(道內) 학생을 대상으로 치렀던 시험으로, 시험 성적이 우수한 사람에게는 소과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연보 |385
43년 을묘년(1615) 선생 54세
❙ 4월에 어머니를 위해 수연을 베풀었다.
❙ 8월에 고향으로 돌아와 성묘하였다.
44년 병진년(1616) 선생 55세
❙ 정월에 학교에 유생들을 모아 강학하였다.
❙ 2월에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 이때 변경에 경보가 있어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올 수 없었으므로 어머니를 먼저 모시고 돌려보낼 때 선생이 칠곡漆谷까지 배웅하였다.
❙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 공과 함께 마포馬浦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 수창시가 있다.
❙ 4월에 이자암李紫巖103)【이름은 민환民寏, 자는 이장而壯이다.】과 전남계全南溪104)【이름은 이성以性, 자는 성지性之이다.】가 찾아왔다.
❙ 11월에 백암柏巖 김공金公(김륵金玏)의 죽음에 곡하였다.
○ 만시가 있다.
45년 정사년(1617) 선생 56세
❙ 5월에 손오한孫聱漢의 죽음에 곡하였다.
○ 만시와 제문이 있다.
❙ 2월에 고향으로 돌아와 어버이를 문안하였다. 이윽고 이경정李敬亭105)【이름은
103) 이자암(李紫巖):자암은 이민환(李民寏, 1573∼1649)의 호이다. 자는 이장(而壯), 본관은 영천이다.
딸이 신지제의 아들 신홍망(申弘望)과 결혼하였다. 1600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병조 좌랑•홍
원 현감•호조 참의•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저서로는 자암집 이 있다.
104) 전남계(全南溪):남계는 전이성(全以性, 1578∼1646)의 호이다. 자는 성지(性之), 다른 호는 운계
(雲溪), 본관은 용궁(龍宮)이다. 1606년 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 좌랑•예조 좌랑•성균관 사예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운계집 이 있다.
105) 이경정(李敬亭):경정은 이민성(李民宬, 1570∼1629)의 호이다. 자는 관보(寬甫), 본관은 영천이다.
1597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권지부정자•봉상시 직장•병조 정랑•종부시 정•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경정집 이 있다.
민성民宬, 자는 관보寬甫이다.】과 이자암李紫巖(이민환李民寏)과 함께 빙계동氷溪洞106) 입구에 모여서 술자리를 베풀고 시를 지었다.
○ 시가 본집에 실려 있다.
❙ 3월에 해정海亭107)을 중수하였다.
○ 정자는 창원에 있는데 한강寒岡 정구鄭逑108) 선생이 일찍이 머물렀던 곳이다. 고을의 선비들이 새로 지을 것을 청하자 선생이 봉급을 털어서 공역을 도왔다. 중수를 기념한 시가 있다.
○ 정 선생이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 “바닷가에 예전부터 나의 정자가 있는데, 이제 들으니 고을의 후생들이 새로 지어 강학할 계획이라고 하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유념하여 살펴 줄 것이라 믿네.……”라고 하였다.
❙ 4월에 망우당 곽재우 공의 죽음에 곡하였다.
○ 만시가 있다.
❙ 5월에 품계가 올라 통정대부가 되었다.
○ 사나운 도적 정대립鄭大立이 무리 수천 명을 모아 바다와 섬에 출몰하면서 고을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약탈하여 조정에서 골칫거리로 여겼다. 선생이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두목을 모조리 잡아들이자 남은 무리도 와해되어서 바닷가 여러 고을이 편안해졌다. 이 일이 알려져 품계가 오른 것이다. 교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오직 너는 굳셈으로 부드러움을 보완하고, 충분히 배우고 나서 정사에 임하였다.옛날 사헌부에서 총마驄馬 탈 때엔 기풍이 늠름하였고, 이름난 고을에 부임해서는 유능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106) 빙계동(氷溪洞):지금의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를 가리킨다.
107) 해정(海亭):1604년에 정구(鄭逑)가 지은 관해정(觀海亭)으로, 창원시 마산합포구 교방동 서원골에 있다.
108) 정구(鄭逑, 1543∼1620):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江), 본관은 청주이다. 창녕 현감•공조 정
랑•안동 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한강집 등이 있다.
연보 |387
○ 이때 정인홍이 합천陜川에 있으면서 멀리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선생은 6년 동안 근방의 고을 수령으로 있으면서 한 번도 그 집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정인홍은 선생이 자기를 붙좇지 않는 것을 알았지만 오히려 미워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말을 지어내어 “고을 수령이 궁에 납부할 무명 40필을 사사로이 썼습니다.”라며 정인홍에게 알렸는데, 정인홍이 “내가 그의 정사를 들었는데, 결코 그럴 리가 없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이를 듣고 향당鄕堂에 고을 백성을 모아 무명의 수효를 조사하게 하되 물건의 유무만을 살피고 말을 지어낸 자를 문책하지 않았다. 선생이 체직되어 돌아갈 때에 그 사람이 길가에서 전별하고 뒤늦게 감사 인사하고 갔다.
❙ 이석담李石潭109)【이름은 윤우潤雨, 자는 무백茂伯이다.】과 함께 한강寒岡 선생을 모시고 해정海亭을 유람하였다.
○ 이공李公이 불러 주는 운자로 시를 주고받았다.
❙ 황해월黃海月110)【이름은 여일汝一, 자는 회원會元이다.】을 위해 증별시를 지었다.
○ 황공이 동래 부사의 임기가 차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 시가 본집에 실려 있다.
46년 무오년(1618) 선생 57세
❙ 「회산잡영檜山雜詠」의 서문을 지었다.
○ 선생은 어머니의 뜻에 이끌려 마지못해 고을에 부임하였는데 공무 여가에 지루하고 무료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가고픈 생각과 계절의 변화에 느꺼운 마음이 있어서 이따금 시구로 나타냈다. 이를 1책으로 묶어서 「회산잡영」이라 하고 직접 서문을 지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몇 말 쌀 때문에 얽매이니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므로 소리 내어 읊은 나머지 끓어오르는 감회를 부치는가 하면 심심한 번민을 달래기도 하면서 이것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 한다.……”
109) 이석담(李石潭):석담은 이윤우(李潤雨, 1569∼1634)의 호이다. 자는 무백(茂伯), 본관은 광주(廣
州)이다. 1606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수성도 찰방•사간원 정언•공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칠곡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담집 이 있다.
110) 황해월(黃海月):해월은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의 호이다. 자는 회원(會元), 본관은 평해(平
海)이다. 158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사헌부 장령•장악원 정•창원 부사•공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평해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월집 이 있다.
388|오봉선생문집 2
❙ 2월에 망우당의 빈소에 가서 곡하였다.
○ 제문이 있다.
❙ 3월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 돌아올 때 행장에는 서적 몇 상자가 있을 뿐이었다.
❙ 7월에 구미촌龜尾村111)에 자리 잡고 살았다.
○ 선생은 하천下川 오동산梧桐山112) 북쪽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자호를 ‘오봉梧峯’이라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구수龜水 북쪽에 새 거처를 마련하여 또 호를 ‘구로龜老’라고 하였다.
대숲 속 초가집에서 산수에 흥취를 부쳐 노래하고 시를 읊으며 근심을 달랬다. 일찍이 시를 지어
새로 널찍하게 터 잡은 구미 별장 新卜龜庄一畒寬
앞엔 푸른 시냇물 뒤엔 푸른 산 있네 平臨碧澗背蒼巒
힘써 밭 갈면 주린 배 채울 수 있고 力耕且足供飢飽
집은 작아도 추위와 더위 견딜 만하네 小構聊堪度暑寒
대와 매화 심어서 오랜 정분 간직하고 移竹兼梅存宿契
갈매기 해오라기 불러 즐거움 나누네 喚鷗和鷺託同歡
이로부터 할 일 없이 노년을 보내니 從今老矣無餘事
세상사 험난하단 말 믿을 게 없네 不信人間道路難
라고 하였다.
111) 구미촌(龜尾村):지금의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龜尾里)로, 신지제가 정착한 이래 아주 신씨가 세거하고 있으며 현재 오봉종택(梧峯宗宅)이 있다.
112) 오동산(梧桐山):의성군 금성면 초전리(草田里)와 봉양면 풍리리(豐里里)에 걸쳐져 있는 산으로, 해발 313m이다.
연보 |389
47년 기미년(1619) 선생 58세
❙ 모월에 좌승지공의 묘를 안평安平의 교동橋洞113)【의성현 서쪽 석탑리石塔里에 있다.】으로 이장하였다.
○ 모친 박 부인朴夫人과 합장하였다.
48년 경신년(1620) 선생 59세
❙ 정월에 한강 선생의 부고를 듣고 곡하였다.
○ 만시가 있다.
❙ 10월에 김운천金雲川114)【이름은 용涌, 자는 도원道源이다.】의 죽음에 곡하였다.
○ 애도한 시가 있다.
희종熹宗115) 천계天啓 원년 신유년(1621) 선생 60세
❙ 2월에 공곡孔谷을 지나다가 감회를 읊은 시가 있다.
○ 좌승지공左承旨公(신몽득申夢得)이 일찍이 난리를 피해 이 골짜기로 숨은 적이 있기 때문에 선생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회포를 기술한 것이다.
❙ 3월에 최인재崔訒齋116)【이름은 현晛, 자는 계승季昇이다.】와 구지산龜智山117)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13) 안평(安平)의 교동(橋洞):의성군 안평면 석탑리(石塔里)를 가리킨다.
114) 김운천(金雲川):운천은 김용(金涌, 1557∼1620)의 호이다. 자는 도원(道源), 본관은 의성(義城)이
다. 1590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권지부정자•성균관 사성•병조 참의•여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운천집 이 있다.
115) 희종(熹宗):명나라 15대 임금의 주유교(朱由校)의 묘호로, 연호는 천계(天啓)이고 재위 기간은 1621∼1628년이다.
116) 최인재(崔訒齋):인재는 최현(崔睍, 1563∼1640)의 호이다. 자는 계승(季昇), 본관은 전주이다. 임
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건원릉 참봉이 되고, 1606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형조 참의•실록청 겸춘추•좌부승지•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간(定簡)이다. 저서로는 인재집 이 있다.
117) 구지산(龜智山):의성군 금성면 구련리(龜漣里)와 봉양면 삼산리(三山里)에 걸쳐 있는 산으로, 구지산(龜止山) 또는 구지봉(龜旨峯)으로도 불린다.
390|오봉선생문집 2
○ 선생은 최공과 평소 교분이 깊었는데, 이때 서로 만나서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시 두 편이 있다.
○ 일전에 어떤 조정 관료가 선생에게 “아무개 재상이 그대의 재주와 도량을 칭찬하며 간절히 만나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선생이 꾸짖으며 “나와 그대가 모두 빈한한 선비로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어찌 또 출세하는 데 급급하겠습니까. 그대도 신중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그 사람이 화를 입고 멀리 유배를 갔다. 선생이 최공과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느낀 바가 있어 지은 시에
안타깝게 남쪽 고을로 유배 간 나그네여 可惜南州淪謫客
어쩌다 무리 잃고 깊은 구덩이에 빠졌나 失群何事落深坑 라고 하였다.
2년 임술년(1622) 선생 61세
❙ 2월에 후금後金이 중국 강역을 무너뜨렸다는 소식을 듣고서 「번민을 떨치다[撥㦖]」, 「울분을 달래다[遣憤]」, 「요양가遼陽歌」 등의 시를 지었다.
○ 시가 원집에 실려 있다.
❙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118)의 죽음에 곡하였다.
3년 【인조대왕 원년】 계해년(1623) 선생 62세
❙ 2월에 천동재사泉洞齋舍119)에서 우거하였다.
○ 재사는 천동泉洞의 선영 아래에 있으며 집과는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선생은 천동 골짜기가 조금 깊숙하여 병든 몸을 요양하기에 편리하다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이곳에서 잠시 우거하였다. 재사 앞에 오래된 작은 연못이 있는데, 선생이 정비하여 연꽃을 심고 그 사이에서 노래 부르고 시 읊으며 세상의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118) 김윤안(金允安, 1562∼1620):자는 이정(而靜), 호는 동리(東籬), 본관은 순천이다. 류성룡의 문인
이다. 160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재감 직장•대구 부사를 역임하였다. 안동 화천서원(花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리집 이 있다.
119) 천동재사(泉洞齋舍):의성군 봉양면 길천리(吉泉里)에 있는 아주 신씨의 재사이다.
연보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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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에 인조가 즉위하였다.
❙ 연경燕京으로 사신 가는 이경정李敬亭(이민성李民宬)을 전송하였다.
○ 이때 이공이 조천사朝天使로서 찾아와 하룻밤 묵었는데, 선생이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 7월에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 선생이 높은 덕망과 훤한 풍모로 세상의 추중을 받았고, 조정에서는 정승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반정 초기에 특별한 은총을 입고 임명되자 친구들이 모두 벼슬에 나가기를 권하였는데, 선생은 겨우 비안현比安縣에 이르러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훗날 경정敬亭 이공李公이 선생에게 올리는 제문에 “왕명 출납의 탁월한 재주를 장차 새 조정에서 시험하려 했는데 공은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오봉五峯 이공李公의 만시에 “은대에 임명하는 왕의 부름 사양했네.120)[銀臺新命辭嚴召]”라고 하였으며,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121) 공이 올린 제문에 “출처의 도리가 올발라서, 의리와 천명을 편안히 여겼네.[出處之正 惟安義命]”라고 하였고, 동계東溪 조공趙公(조형도趙亨道)이 쓴 제문에 “깊은 뜻 엿볼 수 없음을 알겠으니, 사직 상소 하나 올리고 지레 돌아왔네.”라고 하였다.
❙ 10월 모부인이 병이 들자 천동泉洞에서 달려가 모셨다.
○ 이때 오부인吳夫人이 하천下川에 있는 막내아들 지경之敬122)의 집에 있었다.
❙ 12월에 어머니 약시중을 들다가 지병이 더쳐서 들것에 실려 구미촌 본가로 돌아왔다.
○ 선생이 평소 풍비風痺123)를 앓고 있었는데 수개월 동안 탕약을 지어 올리다가 오랜 지병이 더쳐서 점점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자제들이 물러가 쉴 것을 청하였으나 선생은 듣지 않다가 기진맥진하여 인사불성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 왔다. 선생은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도 오히려 어머니가 무엇을 드셨는지 자주 물었다.
120) 은대(銀臺)에……사양했네:1623년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 7월에 신지제를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
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은대는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을 가리킨다.
121) 김득연(金得硏, 1555∼1637):자는 여정(汝精), 호는 갈봉(葛峯),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언기
(金彦璣)의 아들로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佳野里)에서 태어났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저서로는 갈봉집 이 있다.
122) 신지경(申之敬, 1595∼1660):자는 직부(直夫), 본관은 아주이다. 신지제의 이복동생이다.
392|오봉선생문집 2
❙ 그믐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 이때 선생이 이미 병이 위독하여 의식이 없었다. 시험 삼아 사탕을 입안에 넣으니 더 삼키지 못하고 다만 목구멍에서 가느다란 소리로 “이것을 어머님께 드렸느냐?”라는 말만 들릴 뿐이었다.
4년 갑자년(1624) 선생 63세
❙ 정월 8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 선생은 비록 숨이 끊어질 듯한 가운데서도 늘 어머님 병환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숨을 거두고 나서야 말았다.
❙ 3월 17일에 의성현義城縣 서북쪽 우곡방羽谷坊 율곡栗谷 해향亥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 선생은 평생 큰 신념을 굳게 지켜서 혼조昏朝(광해군)의 어지러운 시대에는 여러 차례 임명장이 내려오는데도 부임하지 않았지만 폐주廢主(광해군)가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눈물을 철철 흘렸다. 새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사양할 때에는 다만 짤막한 상소를 올려 병으로 사직하되 그 말이 침착하고 완곡하여 기미와 자취를 전혀 엿볼 수 없었다. 수립한 뜻이 우뚝하고 덕과 재능을 두루 겸비한 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겠는가. 훗날 인물을 평가하는 사람은 이를 몰라서는 안 된다.
【인조대왕 24년】 병술년(1646)
❙ 가선대부 이조 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세자 좌부빈객을 증직하였다.
123) 풍비(風痺):찬바람이나 습기가 몸에 침투하여 생기는 병으로 팔다리와 몸이 마비되고 쑤시는 등의 증상이 있다.
연보 |393
【현종대왕 10년】 기유년(1669)
❙ 8월에 사림이 장대서당藏待書堂124) 오른편에 사당을 세웠다.
○ 서당은 신례동新禮洞 서쪽에 있는데, 선생이 일찍이 이곳에 집을 짓고 강학하였다. 여헌旅軒장 선생張先生125)이 그 이름을 ‘장대藏待’라고 하니, 이는 ‘덕을 쌓고 때를 기다린다.[藏修以待]’126)는 뜻을 따온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온 고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선생의 덕과 의리를 숭배할 곳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서당 오른편에다 땅을 마련하여 사당을 지었는데, 고을 수령과 도내의 선비가 모두 이에 응하여 함께하였다.
○ 관찰사 이관징李觀徵127) 공이 사당의 이름을 ‘경현사景賢祠’라고 써 보내고, 부제학 이당규李堂揆128) 공이 상량문上梁文을 지었다.
【13년】 임자년(1672)
❙ 위판을 봉안하였다.
○ 경정敬亭 이공李公(이민성李民宬)을 함께 제향하였다.
○ 익찬 이유장李惟樟129) 공이 상향 축문을 지었다.
124) 장대서당(藏待書堂):1610년 신지제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강당으로,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에 있다. 1669년에 사당인 경현사(景賢祠)를 지어 신지제를 봉향하고, 1672년에 이민성(李民宬)의 위판을 추가로 봉안했다.
125)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여헌은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호이다. 자는 덕회(德晦), 본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 역학도설(易學圖說) 등이 있다.
126) 덕을……기다린다[藏修以待]: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군자는 재능을 몸에 품은 채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君子 藏器於身 待時而動]”라고 하였다. 원문의 장수(藏修)는 예기 「학기(學記)」에 “군자는 배움에 있어 마음에 간직하고 반복해 익히며 물러나 쉬고 노닐며 즐긴다.[君子之於學也藏焉 修焉 息焉 遊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27) 이관징(李觀徵, 1618∼1695):자는 국빈(國賓), 호는 근옹(芹翁)•근곡(芹谷), 본관은 연안(延安)이
다. 1653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 장령•전라도 도사•대사성•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저서로는 근곡집 이 있다.
128) 이당규(李堂揆, 1625∼1684):자는 기중(基仲), 호는 퇴촌(退村), 본관은 전주이다. 1668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의성 현령•홍문관 수찬•이조 정랑•동부승지•대사간•함경도 관찰자•이조 참판 등을 역임
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394|오봉선생문집 2
【숙종대왕 28년】 임오년(1702)
❙ 4월에 사당을 승격하여 서원으로 삼았다.
【32년】 병술년(1706)
❙ 7월에 묘소 앞에 비석을 세웠다.
○ 대사간 김응조金應祖130) 공이 비명을 짓고, 박사 남도익南圖翼131) 공이 글씨를 썼다.
129) 이유장(李惟樟, 1625∼1701):자는 하경(夏卿), 호는 고산(孤山),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1660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강학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고산집 이 있다.
130) 김응조(金應祖, 1587∼1667):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1623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병조 정랑•사헌부 장령•좌승지•공조 참의•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학사집 이 있다.
131) 남도익(南圖翼, 1662∼1719):자는 운거(雲擧),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690년 문과에 급제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