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계순(繼舜). 호는 구암(矩庵). 생부는 신명호(申命祜), 모친은 김정진(金精進)의 딸 안동 김씨(安東 金氏), 계부는 신인협(申寅協), 계모는 이관발(李觀發)의 딸 영천 이씨(永川 李氏), 조부는 신면목(申冕穆), 증조부는 신만교(申萬敎)이다.
생애및활동
신상하(申相夏)[1839~1906]는 1839년(헌종 5) 5월 7일 경상도 의성현 팔지리(八旨里)[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할아버지 신면구(申冕九)[생부 신명호의 부친]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5세 때 고문(古文)과 경전(經傳)을 두루 익혔다고 한다. 1853년(철종 4) 할아버지 신면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장성하면 유치명(柳致明) 문하에서 공부하라는 유언을 신상하에게 남겼다.
23세가 되자 신상하는 유언대로 유치명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 문하에서 당대의 명유 이돈우(李敦禹), 김도화(金道和)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1864년(고종 1)에는 봉두산(鳳頭山)[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일대] 남쪽에 강학을 위한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이후 신상하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1891년(고종 28)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이헌영(李永)은 『향약절목(鄕約節目)』을 편찬한 뒤, 도내 각 고을에 배포하며 향약 시행을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의성 지역에서도 향약 시행을 위한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신상하가 향약장(鄕約長)을 맡았으며, 향교와 구호 서당(龜湖書堂)[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 위치]에서는 직접 강학(講學)을 하였다. 1893년(고종 30) 인근 군위현(軍威縣)으로 이주하였다가, 1895년(고종 32)에는 풍기군(豊基郡)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1906년(광무 10) 3월 22일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용
5권 2책. 목활자본. 1955년 아들 성환(成煥)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준형(李濬衡)의 서문과 권말에 홍치유(洪治裕)의 발문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권1∼3에 시 41수, 상언(上言) 2편, 서(書) 8편, 잡저 4편, 지(識) 7편, 명 3편, 상량문 1편, 축문 4편, 권4•5에 제문 19편, 뇌사(誄辭) 2편, 행록 4편, 부록으로 만사 10수, 제문 4편, 유사 1편, 행장 1편, 묘갈명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청아하고 품격이 높다. 「자지가(紫芝歌)」는 지치의 향기가 다른 풀보다 뛰어남을 칭찬하고, 사람도 지치처럼 남보다 탁월해야 한다는 내용을 옛 가사의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원조우음(元朝偶吟)」은 세월이 자꾸만 가는데 뜻한 바는 이루지 못하여 안타까운 심중을 읊은 것이다.
서 가운데 「상정재선생(上定齋先生)」은 스승인 유치명(柳致明)에게 학문하는 방법과 요령을 물은 것이며, 별지의 문목(問目)은 『중용』과 『대학』에 대해 의심나는 것을 질의한 것이다.
「용학강의(庸學講義)」는 구호서당(龜湖書堂)에서 강의한 내용을 적은 것으로, 성리학을 비롯하여 계구(戒懼)•근독(謹獨)•혈구(絜矩)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사문일수록(師門日受錄)」은 1861년(철종 12) 5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간 유치명과 학문에 대해 문답한 것을 구체적으로 적은 것이다.
「향약절목후(鄕約節目後)」는 1891년(고종 28)에 경상도관찰사인 이헌영이 풍속을 순화시키기 위해 『향약절목』 1책을 각 시군에 나누어주고 향약을 시행하도록 권장했는데, 그것을 시행하면서 느낀 소감을 쓴 것으로, 향약의 발생 과정과 유래, 시행의 효과 등을 설명하였다.
신상하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계순(繼舜). 호는 구암(矩庵). 생부는 신명호(申命祜), 모친은 김정진(金精進)의 딸 안동 김씨(安東 金氏), 계부는 신인협(申寅協), 계모는 이관발(李觀發)의 딸 영천 이씨(永川 李氏), 조부는 신면목(申冕穆), 증조부는 신만교(申萬敎)이다. 신상하(申相夏)[1839~1906]는 1839년(헌종 5) 5월 7일 경상도 의성현 팔지리(八旨里)[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할아버지 신면구(申冕九)[생부 신명호의 부친]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5세 때 고문(古文)과 경전(經傳)을 두루 익혔다고 한다. 1853년(철종 4) 할아버지 신면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장성하면 유치명(柳致明) 문하에서 공부하라는 유언을 신상하에게 남겼다. 23세가 되자 신상하는 유언대로 유치명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 문하에서 당대의 명유 이돈우(李敦禹), 김도화(金道和)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1864년(고종 1)에는 봉두산(鳳頭山)[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일대] 남쪽에 강학을 위한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이후 신상하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1891년(고종 28)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이헌영(李O永)은 『향약절목(鄕約節目)』을 편찬한 뒤, 도내 각 고을에 배포하며 향약 시행을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의성 지역에서도 향약 시행을 위한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신상하가 향약장(鄕約長)을 맡았으며, 향교와 구호 서당(龜湖書堂)[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 위치]에서는 직접 강학(講學)을 하였다. 1893년(고종 30) 인근 군위현(軍威縣)으로 이주하였다가, 1895년(고종 32)에는 풍기군(豊基郡)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1906년(광무 10) 3월 22일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저술
문집으로는 4권 2책의 『구암집(矩庵集)』이 전하는데, 1955년 아들 신성환(申成煥)이 간행한 것이다. 『구암집』에 수록되어 있는 「사문일수록(師門日受錄)」은 1861년(철종 12) 5월 7일부터, 18일까지 스승 유치명과 학문에 대해 문답한 것을 기록한 것이며, 「향약절목후(鄕約節目後)」는 1891년(고종 28) 의성에서 향약을 시행할 때 그 의의와 유래 등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 「용학강의(庸學講義)」는 구호 서당에서 강학할 때 여러 문생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것으로, 이러한 글들은 성리학에 대한 신상하의 학문적 수준을 가늠케 해준다. 한편, 『구암집』에 수록된 아들 신성환의 유사(遺事)에 따르면, 신상하가 7대조 신우석(申禹錫)[1638~1695]부터 자신 대까지, 선조들의 행록(行錄)과 만뢰(挽誄)를 모아 『단구세적(丹邱世蹟)』 2책을 편찬했다고 한다.
묘소
『구암집』의 행장과 유사에는 팔지(八旨)[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 묘소가 자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