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선장(善章), 호는 남헌(楠軒). 신정모(申貞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신지현(申之炫)이고 아버지는 신석교(申奭敎)이며, 어머니는남양 홍씨(南陽 洪氏) 홍윤국(洪綸國)의 딸이다. 부인은전주 유씨(全州 柳氏) 유성문(柳星文)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면형(申冕瀅)[1832~1908]은 어렸을 때 총명하고 덕이 있었으며, 성장함에 따라 고을의 사림들이 명망 있음을 칭송하였으나, 과거에뜻을 버리고 중년에 오목(梧木)[현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오목리]으로 이주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민보군(民堡軍)을 이끌었다. 의성 지역은 1894년 8월농민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의성의 전직 관료와 유생들이 민보군을 결성하여 이에 항거하였다. 그는 이때 격문을 돌리고 향리의 장정들을 모아 민보군을 결성하여 농민군들로부터 의성군 춘산면 일대를 방어하였으며, 장기현(張鬐縣)에서 장정들을이끌고 온 정치익(鄭致益)과 합류하였다. 이후 전열을 갖추어, 영남 지역에서의 활동이 미약했던 농민군을 퇴각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1902년(광무 6)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말년에는 시세가 난국이라 하여 고향에서 은둔하였다.
[학문과 저술]
동학 농민 운동 때 농민군을진압하기 위한 활약을 기록한 『갑오 동고록(甲午 同苦錄)』을엮었다고 전해진다.
[묘소]
묘는 처음 사미동(思美洞) 구곡산(九曲山)에 있었으나, 뒤에 금곡동(金谷洞)[현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금곡리]으로 옮겼다.
[상훈과 추모]
1996년 「남헌공 묘갈명(楠軒公 墓碣銘)」이 작성되었는데, 이태능(李泰能)이 지었으며, 김창회(金昌會)가 썼다.
[참고문헌]
『조선 환여 승람(朝鮮 寰輿 勝覽)』
『의성의 전통』 (의성 문화원, 1982)
『의성 군지』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 1998)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 -민중의 함성 동학 농민 전쟁』(한길사, 2003)
『아주 신씨 대동보』 (아주 신씨 대종회, 2012)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의성.거창지역의 동학농민항쟁(조재원 (거창문화원연구사))
1. 동학농민혁명의전개
조선 후기 이래 사회경제의 발전으로 중세적 사회체제에 대한 광범한 개혁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양반 벌열 세력은 봉건 기강이 약화된 상황을 이용하여 매관매직, 중간포탈등 부정부패를 일삼고 민중수탈에 매달렸다. 이에 따라 세도정권기에는 봉건적 지배체제에 항거하는 광범한민란이 발생하였디. 그러나 이 시기 민란은 아직 민중의 사회정치의식 수준이 낮고 민중봉기에 혁명성을불어넣을 만큼 지도력을 갖춘 지도층이 형성되지 못하여 국지적이며 일회적인 군현 단위의 운동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개항이후민중은 자본제 상품의 침투와 미곡 유출, 곡가 상승 등으로 피해를 입었고 더욱이 정부의 재정 위기에따른 수탈 강화, 지주의 경영 강화 등으로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이에따라 민중의 사회적 불만과 위기의식은 팽배하였으며 민란 또한 빈발하였다. 그러나 아직 군현 단위의 투쟁형태를극복하기에 한계가 많았다.
이 시기 농민들이 군현 단위로 봉기한 것은 조선왕조의 성격 때문이었다. 조선은국가의 인적 기반인 농민과 물적 기반인 토지를 군현제를 매개로 지배하였다. 360여 개에 이르던 군현하나하나는 ‘국가 안의 국가’와도 같은 성격을 지니면서 지방수령이국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통치체제였다. 농민들과 그들의 삶에 직결되는 토지․조세와 생활공간은군현 단위로 짜여 있었다. 그러므로 농민층의 저항은 어떤 형태로든 군현 단위로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개항 이후 민중경제의 파탄이 계속되고 민족적 위기가 고양됨에 따라 몰락 유생 출신의 변혁지향적인 농촌 지식인집단이 성장하였다. 이들 변혁 지향세력은 당시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고 있었던 동학교단을 매개로결합되기 시작하였다. 동학사상은 비록 신비적이고 관념적인 형태이긴 하나 민중의 변혁에 대한 열망을 내포한것이었으며, 그리고 동학교단의 포접제 조직은 민란의 국지성을 극복하는데 기여하였다. 변혁지향세력과 농민대중이 결합함으로써 민중운동은 지도이념, 지도세력, 조직 그리고 대중적 기반을 갖추고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하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이와 같은 민중운동의 성장에 기초하여 일어난 운동이었다. 전후약 10개월에 걸쳐 전라도를 중심으로 거의 전국에 미쳤던 농민전쟁은 대략 4단계로 진행되었다. 1단계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를 도화선으로삼아 전봉준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군아를 습격하여 군수를 내쫓고 아전들을 징벌한 후 곡식을 풀어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10여 일간 군아를 점령했다가 일단 해산했다. 이 단계에서 농민봉기는종전의 민란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동학교단의 신원교조운동을 기반으로 조직적으로 발발한 것이고장기 지속적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다시 봉기하여 2단계로나아갔다.
2단계는 농민군이 전라도 무장에서 재봉기하여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진주성까지 점령한 단계이다. 이 시기에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했고 청, 일본이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전라도 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전주화약을 맺어 3단계로발전했다.
3단계에서는 전주화약에 따라 전라도53주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안을 실행한 단계이다.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의요강은 탐관오리․양반․토호 등의 탄압과경제적 수탈을 금지시키고 신분상의 모든 차별대우를 폐지하며 무명잡세 혁파, 친일분자 처벌, 고리채 무효화 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봉준은 일본군이 경복궁을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에 접하고 재봉기를 감행하였고 이리하여 4단계로나아갔다.
4단계에서는 전봉준이 재봉기하기 위해 삼례를 거점으로 농민군을 재조직한뒤 서울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이 봉기는 주로 일본의 침략에 항거한 봉기로서 1차 봉기와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은 1차 무장봉기에 가담하지 않은충청도, 강원도, 경기도,경상도 북부 지방에서도 수많은 농민군도 동참하였다는 것이다.
충청도의 경우 목천 ․ 천안권, 예산 ․ 홍성 ․ 서산 ․ 당진 ․ 태안권, 충주 ․ 단양 ․ 제천권, 부여 ․ 한산 ․ 서천권, 청주 ․ 옥천 ․ 보은 ․ 영동 ․ 논산권 등에서 활발하였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수원 ․ 광주 ․ 용인 ․ 안성 ․ 양평권이라든지, 이천 ․ 여주 ․ 장호원 등에서 항쟁이 이루어졌다. 일찍이 이 지역은 보은 취회에도활발한 참여를 보일 만큼 동학의 교세가 조직화되어 있었다.
강원도 지방은 1870년대부터 양구 ․ 인제 ․ 정선 ․ 영월 ․ 양양 등지를중심으로 동학이 널리 포교된 지역이다. 이 지방은 역시 제1차기포시의 동향은 미미하지만 제2차 기포 후의 항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중에서 동학농민군의 강릉부 점령과 홍천군 자작고개에서의 혈전은 유명하다.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은 일찍이 최제우 활동 당시 이 지방은 유배된 동학교인들에 의해 동학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포교는 1890년대에 접어들어서였다. 그래서 이 지역은 해주 등지를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의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2. 경상도지역의 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반봉건 반외세운동이었는데, 지역별로처한 조건에 따라 특징적인 면이 있다. 경상도 지역에서도 지역적 특수성을 띠고 농민혁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세기중반에는 전국적으로 봉건체제의 위기에 따라 농민항쟁이 빈발하였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왕성하게 운동이 전개되었던 지역은 단성과 진주를 중심으로 일어난임술민란(壬戌民亂)에서 보듯이 경상도 지역이었다. 그러나 1862년 임술민란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발생하였지만, 1894년 농민전쟁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개항이후사회변동과 관련해서 우선 주목할 것은 면직품의 수입과 곡물과 콩 등의 수출이었다. 그런데 개항 이후의수출품을 산지별로 보면, 쌀은 전라도 산이 70%이고, 경상도 산이 30%였고, 콩은경상도 산이 80%였고, 전라도 산이 20%였다. 곡물 유출은 곡가등귀,토지소유의 확대로, 소작경영의 강화 등으로 농민몰락을 가속케 하는 것이었는데, 전라도 지역에서는 쌀 수출과 관련한 사회적 갈등이 보다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경상도 지역에서는 콩 수출에 치중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개항의 충격이 약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상도의 동학세력은 전라도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한 이후 세규합에 들어갔는데 불과 한두 달 만에 상주 ․ 예천 ․ 선산 ․ 김산 ․ 성주 ․ 하동 ․ 진주 등지를지배하는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 지역 외에도 의성 ․ 풍기 ․ 안동 ․ 봉화 ․ 남해 ․ 사천 ․ 고성 등지에서도동학세력은 급속히 세를 확대하고 있었다.
농민들이폐정개혁과 신분해방의 기대로 앞다투어 동학에 입도하고 있던 시기에 일본은 청일전쟁을 감행하고 경상도 지역에서도 상주의 낙동과 함창의 태봉에 일본군병참기지를 설치하면서 일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민족적 위기의식은 더욱 고양되었다. 그런 가운데 9월이 되면서 삼례회합을 통해 남접 소속 전라도 농민군이재차 봉기하게 되고, 이 지역에서도 낙동과 태봉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었다.
3. 거창의농민혁명과 향촌사림의 대응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해에 열린 충청도 보은집회에 참가한 경상도 지역 동학도의 분포를 살펴보면 상주(尙州), 선산(善山), 성주(星州), 김산(金山), 진주(晉州), 하동(河洞)의 동학교도가참여하였다. 그 가운데 거창과 가까운 김산과 선산, 성주를비롯하여 인동, 지례 지역은 이미 1893년 이전부터 동학세력이정착된 지역이었다. 그리고 호남지역과는 달리 북접의 영향권에 있었던 영남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1894년 7월까지는 농민군의 기포 사실이 없었다. 그러나 1894년 5월 5일 주한 일본공사관의 『경상도내 동학당 경황 탐문보고서』에 의하면 「김산·지례·거창에서 4월 중순 동학농민군의 혐의로 대구로 잡혀온 20여 명 중 3명이 동학의 주문을 품안에 숨기고 있다.」 는 기록을 통해 이미 거창지역을 포함한 김산. 지례는 일본군으로부터요주의 지역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영남은 북접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남서부지역은 호남지역의 남접 농민군의 활동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동학군과 관군의 휴전이 성립된 후 6월 하순경 남원의 동학농민군이운봉을 거쳐 함양을 공략하고 이어 안의(安義)에 들어왔다. 1894년 12월 14일안의현감 조원식(趙元植)이 순영(巡營)에 올린 첩보에 의하면 동학도 수만명이 장수현(長水縣)을 불태우고 영봉(靈峰)을 거쳐 안의와 거창(居昌)으로향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순영에서 영관 최응규(崔應圭)로 하여금 포수 100명을 데리고 안의로 떠나도록 하였다. 매천 황현(黃玹)의「매천야록(梅泉野錄)」과「오하기문(梧下記文)」에 의하면 안의 현감 조원식은 동학농민군을 환영하여 융숭하게 대접한 후 취하여 잠든 때를 이용하여 섬멸하였다는기록이 나온다.
호남 동학군은 안의 공격 이후 경남으로 들어오려고 그 길목인 운봉을 몇 차례 공격했지만, 전 주서(注書) 박봉양(朴鳳陽)이 이끄는 민보군이 운봉을 수비하였기 때문에 모두 실패하여경남 서북부 지역에서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안의 공략 때 호남에서 넘어온 동학군은 안의에만들어간 것이 아니라 다른 읍에도 흩어져 들어가 활동하면서 서부경남지역 동학도들의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9월중순 구국항일 투쟁을 위해 동학교도들이 봉기할 때 서부경남 지역에서도 이와 연대하여 동학군의 움직임이 활발하였다.이렇게 되자 정부에서는 대구 판관 지석영(池錫永)을영남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낙동강 좌우지역의 동학교도를토벌케 하였고, 거창부사 정관섭(丁觀燮)으로 하여금 경상좌도 소모사를 겸해 거창·안의·함양(咸陽)·산청(山淸)·단성·삼가(三嘉)·합천(陜川)·지례·진주·하동·의령(宜寧)·남해의 12개 고을을 관할하게 하였다.
1894년 11월에는 진주를중심으로 한 서부 경남 지역의 동학 농민군이 곤양의 금오산과 하동의 고성산성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1개중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퇴하였다. 이 전투 이후 서부 경남 지역 동학 농민군은 크게 세력을잃었지만 지리산을 배경으로 끊임없는 저항을 이어갔으며, 다음해 을미의병으로 흡수되기도 했다.
1894년 12월 14일에는 동학농민군 수 만명이 거창으로 향한다는 첩보에 따라, 경상감사 조병호가 영관 최처규에게 남영병(南營兵) 100여 명을인솔하고 고령(19일)·합천(20일)·거창(21-23일)·고령(24일)을 순회하도록하였다.
1894년 일본군 대본영이 조선에 파병한 ‘동학당 토벌대’로 농민학살에 앞장섰던 일본군 후비보병 제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가 일본군의동학농민군 학살 실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메이지 27년(1894년) 일청교전 종군일지’에의하면 1894년 12월 일본군 보병 제18대대가 경상도로 진입하여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12월 16일에 경상도 상주목의 서기관 박용래를 체포해서 고문한 끝에 관직을 박탈한 뒤 추방했으며,18일 개령의 관리들 수십명을 동학교도라는 이유로 모두 총살했고, 19일 김천에서농민10명을 죽이고, 23일엔경남 거창의 촌락을 수색해 8명을체포해서 총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과 관군은 12월초 전라도 무주와 경상도 진주에서 거창으로 들어오려는 농민군을 막아냈으며, 일본군은 1895년 1월 상순 거창지역에서 농민군을 토벌하였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농민군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반전되자 양반지배층은 민보군을 결성해 농민군을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민보군의 활동은 농민군이 패산한 경내에 구질서를 회복하고 농민군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동학에 가담한 농민군을귀화하는 한편 접주 등의 농민군 지도자를 색출하여 처형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거창의 향촌사림 들은 거창읍 망덕산에 성을 쌓고, 동학농민군에대항하여 군대를 조직하고농민군을진압하였다. 여기에 앞장섰던 사람은 신세해(愼世海), 유영환(兪永煥), 이현규(李鉉奎), 이준학, 정찬건(鄭燦健), 하종호(河宗浩), 신계근(愼桂根), 정해석(鄭海錫), 신영선(愼榮善), 강달용(姜達用), 신면형(申冕瀅), 신달홍(愼撻弘), 이현두(李鉉斗) 등이었고, 그 밖의 인물로는 정기중(鄭基中), 김재로(金在魯)가 있다.
거창 가조 출신 김시후(金時 烋)의『갑오실기(甲午實記 )』 에 의하면 「1894년7월15일 거창에서는 동학농민군수십 명이 말을 타거나 도보로 이동하여 거창부관아에 진입하였다. 당시 거창부사 남정헌은 크게 겁을내며 제압할 바를 몰랐고, 아전 두 사람이 소문을 듣고는 곧바로 그 사람들을 통솔해 무기을 갖고 뛰어 들어가 16명을 죽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도망갈 무렵에, 부사 남정헌은 임기가다하여 귀환하게 되자 관아는 비워져 사람들의 심정이 더욱 위태로움에 떨었다고 한다.
이에, 향중(鄕中:유향소의 임원)이 일제히 모여 이준학(李埈學)으로 3면의 도통(都統)으로 삼아 먼저 부사에 도소를 설치하고, 아전으로 좌우부장으로 삼아 방어하는 방책을 마련하였다.
새로 부임한 거창부사 정관섭은 동학농민군이 길을 막아 도보로 간신히 관아에 도착하여 이준학으로 거창부의 도통수로삼고, 면마다 1명의 통수와 마을마다 1명의 통수를 세우고, 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하여 대비했고, 경내에서동학교도로 의심을 받는 사람을 조사하여 찾아냈다.
또대포를 잘 다루는 이를 뽑아 포수 100여백명을 선발하고, 백성들중에서도 포수 100여명을 선발하여 대오를 정비하여, 각고을에 명령을 내려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한 창의를 권하였고, 무주(戊州)와 지례에 관군과 민보군으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하여 농민군 10여명의목을 베웠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까지 추적된 거창지역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는 가조면 석강리 출신의 이익수(李殷宇 1856~1894)로 알려져 있다. 이익수는 일찍이 안의에 사는 처족의인척에게 동학을 전도받아 포교활동을 하였고, 가조와 가북을 중심으로 거창 각처에서 운집한 수백명의 농민군을지휘하여 거창으로 넘어와 관군과 전투를 치렀으나 무기의 부족과 훈련의 미비로 전과도 거두지 못하고패전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이익수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농민군이 체포되어 1894년 10월 16일 거창 영천에서 공개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농민군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입은 피해는 매우 컸다. 농민군의재산은 모두 관리의 재산이 되고 가옥은 모두 불탔으며 기타 부녀자 강탈, 능욕 등은 차마 기록할 수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피해는 전라도, 충청도와 함께 거창, 안의, 함양, 산청 등지에서매우 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