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아주(鵝洲). 자는자장(子長),호는회병(晦屛). 신숙범(申叔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분구(申賁龜), 아버지는신도만(申道萬)이고, 어머니는의성김씨(義城金氏)김민행(金敏行)의딸이며 부인은 풍산 유씨(豊山 柳氏) 유후원(柳後元)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신체인(申體仁)[1731~1812]은 3~4세때 이웃집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면 말도 없이 그 집에 가서, 글 읽는 소리를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어려서화장산(華藏山)[경상북도의성군비안면일대]의초당에서 공부하였고, 장성해서는김낙행(金樂行), 임필대(任必大),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30세 무렵에는 유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의술·병가·산수(算數)·복서(卜筮) 등 여러학문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1761년(영조 37) 향해(鄕解)에 응시해서 장원하는 등 학문적 명성이 있었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1782년(정조 6) 금산(錦山)[구미리]에 금연 정사(錦淵 精舍)[현금산서원(錦山書院)]가 완성되자 그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786년에는빙계서원(氷溪書院)의 교석(敎席)을 주도하며 통강례(通講禮)를행하고자, 주자(朱子)의월삭회약(月朔會約)을 모방해 의절까지 정해 놓았으나 실시하지못하였다.
1788년 눈병으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자, 존양(存養) 공부에 열중하였다. 1807년(순조 7) 경술과문장이 모범이 된다하여 의성 현령(義城 縣令)이 천거하였고, 경상도 관찰사가 연이어신체인의 학행을 조정에 계청하였다.
梧峯申之悌와 孤松 申弘望의 후손으로 벼슬은 하지 않은 채 산림에서 李象靖, 金樂行의 문인으로 활동하였는데文才와 學德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자의 저서로는 시문 외에 聖賢들의 ‘敬’에 대한 요지를 편차한 「崇敬錄」 2책이 남아 있다.
저자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族子인 申鼎周(1764~1827)가지은 遺事(申鼎周 著, 陶窩集 卷4), 그리고 이를 가지고 저자의 아들 申瀷辰(1779~1834)이所菴 李秉遠(1774~1840)에게 부탁하여 1834년에받은 행장 뿐이지만, 이를 통해 볼 때 이들에 의해 저자의 유적과 유문이 수습 정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의 편찬 간행에 대해서는 序跋文이나 다른 기록이 없어 문집의 정확한 간행 연도를 알 수가 없다
학문과저술
이상정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280여 명의 인사들과 호문학단(湖門學團)을 구성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호문학단 중에서도 그는 학문이 뛰어나호문육군자(湖文六君子)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의 문집으로는 12권 6책의『회병집(晦屛集)』이 전하는데, 19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회병집』 권6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은 천주교를 비판한 글로, 당시 천주교에 대한 영남 유림의 인식을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경(敬)’의 요체에 대해 설명한 4권 2책의『숭경록(崇敬錄)』을 저술하였으며, 정만양(鄭萬陽), 정규양(鄭葵陽)형제의 어록인 『훈지양선생어록(塤篪兩先生語錄)』도 산교(刪校)하였다. 한편, 『아주 신씨 참판공 파보』에는 『징성록(徵省錄)』을 저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조선 시대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 1731~1812)의 문집이다. 본집(本集)은 목판(木板)으로 판각된 후, 시문(詩文)의 일부(一部)와 부록문자(附錄文字)를활자(活字)로 보각(補刻)하여 인행(印行)한 초간본(初刊本)으로 간행경위(刊行經緯)는 분명(分明)하지 않다. 본집(本集)은 12권 6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卷首)에 서문(序文)은 없고 목록(目錄)이있다. 권6은 잡저(雜著)이다.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은 안정복(安鼎福), 이헌경(李獻慶), 조술도(趙述道) 3인의 천주교(天主敎) 변척(辨斥) 글을 읽고 그 글에 실려 있던 ‘천학종지도(天學宗旨圖)’가사욕(私慾)을 내세웠으므로 천주학(天主學)이 이단(異端)임을 증명(證明)하고, 세 사람의 설(說)을보완(補完)하기 위해1791년에 쓴 것이고, <중하상부재이면변(中何嘗不在裏面辨)>은 남헌(南軒) 장식(張栻)이 주장한 ‘이발지후중하상부재이면(已發之後中何嘗不在裏面)’설을 펴는 선배들의 행태를 지적하고 주자(朱子)의 정론(正論)을 들어 후학(後學)을경계한 것이다. 권12는 부록(附錄)이다. 이병원(李秉遠)이 1834년에지은 행장(行狀)이 실려 있다.
권1은 詩(186題)이다. 시는 시체(詩體) 구분없이 저작 연도별로 편차되어 있으며, 1750년부터 1811년까지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장문의 병설(幷說), 병서(幷序), 후식(後識) 등을 붙여 시의 이해를 돕고 있으며, 자형 조진도(姊兄 趙進道)의 형제들과종유하며 수창한 시 및 장편시가 여러 편 있다. 백종형신중인, 임필대, 홍호길(申重仁, 任必大, 洪虎吉)등에대한 41제의 만시가 포함되어 있는데 백종형 신중인에대해서는 11수의연작으로 지어 깊은 슬픔을 표현하였다. 이가운데 〈송김씨매술회육십운(送金氏妹述懷六十韻)〉은 김백능 (金百能)의처가 된 누이동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읊은 것이고, 〈경송재(敬松齋)〉는부친이 귀호(龜湖)에지은 소재(小齋)에 대해 읊은 것이고, 〈귀와시(龜窩詩)〉는단계(丹溪)에 있는 재종질 신정매(申鼎梅)의 소옥 (小屋)에 권계(勸戒)의말을 붙이고 3수를 읊은 것이다. 〈금산육영(錦山六詠)〉, 〈금연십영(錦淵十詠)〉, 〈금리사영(錦里四詠)〉, 〈평금이영(平錦二詠)〉, 〈회병이영(晦屛二詠)〉 등은 금산에 지은 금연정사와 주변의 풍광을 읊은 것이다. 〈병중문이림형승희심약술(病中聞利林形勝喜甚略述)〉부터〈총술(總述)〉까지 6수는 1788년에안질로 고생할 때, 영남 제일의 동천 ‘안의삼동(洞天 ‘安義三洞’)’의절경을전해 듣고 지은 것이다.
권2~5는 書(161)이다. 전체분량중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며, 대상 인물별로 묶어 연도순으로 편차하였는데 대체로 사우, 문인, 친척(師友, 門人, 親戚) 순으로 되어 있다. 권2는스승 이상정, 김낙행, 임필대(李象靖, 金樂行, 任必大) 및 채제공, 이병모, 이홍원, 유풍, 이의태, 이명천, 유성림, 신광익(蔡濟恭, 李秉模, 李弘源, 柳灃, 李宜泰, 李命天, 柳聖霖, 申光翼) 등에게 쓴 것이다. 이가운데 이상정에게 1764년에 보낸 것은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의 교정에 참여하는 선생을 따라 가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쓴 것이고,1781년에 쓴 것은 ‘경겸중화도(敬兼中和圖)’에대한 의혹을 질정한 것이다. 신광익에게는 별지로 ‘조주방제개부개’, ‘서자소생모제주칭위(‘祧主旁題改不改’, ‘庶子所生母題主稱謂’)’ 등 상례, 제례(喪禮, 祭禮)의 예의(禮疑)에 답한 것들이다. 권3은권정린(權正鄰), 종장 신용기(申龍起), 종형 신관모, 강필면, 조의양, 조운도, 이종수, 김종덕ㆍ김종경(申觀模, 姜必勉, 趙宜陽, 趙運道, 李宗洙, 金宗德ㆍ金宗敬) 형제 등에게 쓴 것이다. 이 가운데 이종수에게 1786년에 쓴 편지는 「주서강록간보」의 간역(刊役)이 마무리되었지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여 추개(追改)할 곳이 있음을 알린것이다. 김종덕ㆍ김종경형제에게 쓴 편지가 많은 편으로 이들과의 학문적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가 있는데 ‘치곡(致曲)’,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를 논한 장문의 편지 등이 있다. 권4는 유장원, 이사정, 황계희, 조진도, 조술도, 이덕중, 김도행, 김종도, 김숭묵, 유태춘, 정이인, 이만운, 임보, 이경록, 김시전, 임완, 도상욱, 강세문, 이우, 김홍, 이완(柳長源, 李師靖, 黃啓熙, 趙進道, 趙述道, 李德中, 金道行, 金宗道, 金崇默, 柳泰春, 鄭履寅, 李萬運, 任輔, 李經祿, 金始全, 任輐, 都尙郁, 姜世文, 李㙖, 金㙆, 李埦)등에게 보낸 것이다. 이 가운데 1781년 이덕중에게쓴 편지는 별지를 붙여 문장 (文章)은 道義를 준칙으로 삼아 실용적이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이우에게는 1806년에 장헌세자 (莊獻世子)의 변무를 위한 상소를 올리는 데 앞장섰다가 완도의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된 것을 위로하며 쓴 것이있다. 이완에게는 1783년에 이상정의 문집에 대한 교정사항을적어 보낸 것이 있다. 권5는 김종발, 안정덕, 신광효, 신택명, 김면유, 유상경, 조우원, 김종준, 권득인, 장태은, 김양건, 정태섭, 이동발(金宗發, 安鼎德, 申光孝, 申宅明, 金勉儒, 柳象經, 趙友愿, 金宗駿, 權得仁, 張泰殷, 金良鍵, 鄭台攝, 李東發), 종인신면조ㆍ신면주(申冕朝ㆍ申冕周) 형제, 송국병,조성부, 박재순, 김취려, 조거신ㆍ조거양(宋國秉,趙星復, 朴在淳, 金就礪, 趙居信ㆍ趙居讓) 형제, 이경ㆍ이상(李坰ㆍ李垧)형제, 김종하(金宗夏), 재종숙 신도일(申道一), 족제 신입인(申立仁), 재종질신정매(申鼎梅), 종질 신정옥ㆍ신정오ㆍ신정응(申鼎沃ㆍ申鼎五ㆍ申鼎凝), 족질 신정주 (申鼎周), 아들 신정진(申鼎辰)과 신정휘(申鼎輝) 등에게쓴 것이다. 이 가운데 1808년 정태섭에게 쓴 것은 정만양(鄭萬陽)과 정규양(鄭葵陽) 형제의 「훈지양선생어록(塤篪兩先生語錄)」을 산교(刪校)한 뒤에보낸 것이다. 족질 신정주에게는 별지로 喪服 등에 대해 답한 것이 있다. 〈기진아별지(寄辰兒別紙 〉는1775년 아들 신정진이 지은 잡저를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일일이 제시한 것이다.
권6은 잡저(雜著)(10)이다. 이가운데 〈종손조응자사(宗孫祖應字詞 )〉는 종손에게 자를 ‘유승(幼承)’이라 지어주고 그 의미를 서술한 것이고, 〈창명집구도(牕銘集句圖)〉는 1785년 금연정사(錦淵精舍)에서지낼 때 詩에서 집구(集句)하는 방식대로 전현(前賢)들의 잠찬명언(箴贊名言)에서뽑은 16구를 도식하고 설명한 것이고,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은안정복, 이헌경, 조술도(安鼎福, 李獻慶, 趙述道)3인의천주교 변척(辨斥) 글을 읽고 그 글에 실려 있던 ‘천학종지도’가 사욕(私慾)을 내세웠으므로 천주학이 이단임을 증명하고, 세 사람의 설을보완하기위해 1791년에 쓴 것이고, 〈중하상불재이면변(中何嘗不在裏面辨 )〉은남헌 장식(南軒張栻) 이 주장한 ‘이발지후 중하상불재이면(已發之後 中何嘗不在裏面)’설을 펴는 선배들의행태를 지적하고 朱子의정론을 들어 후학을 경계한 것이고, 〈부졸삼년내위모복설(父卒三年內爲母服說)〉은 「의례(儀禮)」와「통전(通典)」에근거해 해석한 선유들의 주장을 싣고 뒤에저자의 견해를 덧붙여 변설한 것이다. 〈채각헌동잠설의의(蔡覺軒動箴說疑義)〉는중국의 채모(蔡模)가해석한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 중 ‘동잠(動箴)’에 대한 의문점을적은 것이다.〈서증유학사사현(書贈柳學士士鉉)〉은 유태좌(柳台佐)의 과거 급제를 축하하며 지어 준 4언시 형식의 잠언(箴言)이다. 〈유게빙계원벽문(留揭氷溪院壁文)〉은빙계서원에 있을 때 동신단(洞神壇)에서해마다 벌이는 巫樂의행위를 금한다는 내용을 써서 부친 것이다. 〈독서류록(讀書謬錄〉은 독서하는 중에 「大學」, 「家禮」, 「心經」, 「孟子」등 경서 및 전현들의 글에서 발견한 오류를 지적하고 저자의 의견을 첨부한 것이다.
권7은 序(9), 記(12)이다. 서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일을 기록한 유유헌 남급(由由軒南礏)의 「난리일기(亂離日記)」, 종백형신중인(申重仁)의 「귀동일고(龜洞逸稿)」, 현감 서명민(徐命敏)이장대서원(藏待書院)에서 강회(講會)를 연 후 지은 詩와 論에 대한 後序, 재종질 신정매(申鼎梅)의〈귀원증별첩(龜園贈別帖 )〉과 「龜窩遺稿」, 孫有慶의 字 ‘積汝’에대한 것, 편저인「崇敬錄」 등에 대한 것이다. 기는 三守軒, 樂素齋, 龍岡草廬, 李師靖의新樂堂, 李述靖의四友堂, 洪天休의 金鎞軒, 錦山의形勝을 기록한 것, 금산에 세운 錦淵精舍, 棣華堂, 白石亭, 申光翼의嵩南精舍, 三一齋重修 등에 대한 것이다.
권8은 識跋(12), 箴銘(4), 上樑文(4), 哀誄(6), 祝文(2)이다. 지발은 達山 張補之의 實蹟에 대한 것, 李輔의 「南溪實紀」, 「杏堂稿」, 「戊申日錄」, 6대조申之悌의「梧峯集」 別集, 선조 申之孝의 「鷹巖血書拾錄」, 洪彦博의「陽坡實紀」, 「龜巖實紀」 등에 대한 것이다. 상량문은 先廟의移建, 錦淵精舍, 梧溪里社 廟宇, 西山精舍에대한 것이다. 애뢰는 李學靖, 趙錫愚, 崔恒鎭, 都吉模, 姜必勉, 金宗燮에 대한 것이다. 축문은梧溪里社 奉安文과 常享祝文, 早谷의 世德祠 奉安文과 상향축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