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읍에서 4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린5번 국도를 따라 도리원으로 가다 중간쯤 오른 편 산자락 밑에 자리잡은 구미리에서 오봉종택을 만나게 된다. 오봉종택은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 187호로 지정되었는데, 오봉사당과 낙선당(樂善堂)이함께 오봉종택으로 일괄 지정되었으며 후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오봉종택(梧峰宗宅)은 살림집으로 1625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낙선당은오봉 아들 신홍망(申弘望 1600~1673)이 강학을 목적으로 1691년에 지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52년에 재건되었으며 1971년에 후손 신정기(申正其)에의해 중수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오봉사당은 종택과 낙선당 중간 약간 뒤쪽 높은 곳에 역시 남향으로자리잡고 있다. 오봉 선생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해마다 제향하고 있으며 신도비(神道碑)는 1976년에 세워졌다.
오봉(梧峰)은 신지제(申之弟 1562~1624)의 호이다.오봉 선생의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자는 순부(順夫)이다. 고려 말의충신이며 효자로 이름난 우(祐)의 후예로 아버지는 신몽득(申夢得)이며 봉양면 상리(上里, 현 현풍 1리)에서 태어났다.
31세 때 예안 현감으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쳐들어왔을때 몸을 피하지 않고 의병을 모아 싸웠지만 패배하였다. 그 후에도 안동부사로 재직 시 이에 굴하지 않고다시 의병들과 힘을 합쳐 용궁(龍宮)에서 적을 물리치기도하였다. 한번은 용궁에서 적 70여명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은공을 입은 죄수들에 의해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왜군에 의해 나라가 점점 초토화 되자 적을 물리치기 위해 청송 주왕산에 진을 치기도 하였으며, 김해(金垓) 대장과 함께팔공산성에서 활약했고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장군과도 적을물리치는데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오봉 선생은 임진란이란 미증유의 국난을 당하여 예안 현감으로서 책무를 다할 각오로 전투에 참여를 시작으로 용궁, 주왕산, 팔공산, 화왕산성등지를 전전하면서까지 오로지 국난극복에 매진하였다. 이는 임란 초에 지방 수령 등 관원들은 몸을 피하기에만바빴지만 오봉 선생은 수령으로서 임란 초부터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의병들과도 합세하여 임란이 끝날때까지 몸을 아끼고 않고 동분서주하였다.
임란 중에 서애 류성룡(柳成龍)의정책을 지지하면서 이순신(李純信)에 대한 면사첩(免死帖)을 내릴 것과 수군에 대한 과거시(科擧試)의 독자적인 인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백씨(伯氏)인 응암(應巖) 신지효(申之孝)는 왜군이 쳐들어오자 계모인 고창오씨(高敞吳氏)를 죽음으로써 어머니를 구하였다. 응암 선생은 孝의 본보기가 되며동생인 오봉 선생은 忠의 본보기가 된다고 하겠다.
오봉 선생은 의병장 김해(金垓) 장군이경주의진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자 그의 처자식을 맡아 보살펴주기도 하였다. 이는 작은 배려가 후일 큰은덕으로 전해짐으로서 이들 가문에서는 후손들에게 훈훈한 귀감이 되는 것이다.
1598년 임란이 끝난 후 여러 고을 판관 등을 지냈으며, 창원대도호부사(昌原大都護府使)로재직 중 그 당시 백성들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을 토벌한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후 여러 벼슬자리를 지내다가 57세에 퇴임 후 의병 유가족 돕기등 피폐해진 백성들의 구휼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지역의 인재 양성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10리나 되는 구미보(龜尾洑)를축성하여 주변의 땅을 옥답으로 만들었다. 당시 작은 마을에서 저수지 구미보(龜尾洑)를 축성하였다는 것은 아주신씨(鵝洲申氏) 문중에서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인조반정 초인 1623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으며 다음 해 63세로 생을 마감하였고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묘는 안평면 중률 2리에 정부인(貞夫人) 함안조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묘갈문은 풍산(豊山) 김응조(金應祖)가 지었다. 1669년에 건립된 오봉사당(梧峰祠堂)에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졌으며 장대서원(藏待書院)에송은 김광수, 회당 신원록, 경정 이민성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금산서원(錦山)에도 신체인(申體仁)과 함께 제향하고 있다.
선생의 전적(典籍)·고문서(古文書) 8종 5책 78매는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45호로 지정되어 현재 안동에 있는한국국한진흥원에 위탁 관리되고 있다. 주요 목록으로는 『영남동도회첩(嶺南同道會帖)』, 『장사목록(長沙目錄)』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재사종의(齋舍宗議)』 『구미보신장도목완의(龜尾洑新粧都目完議)』 『갑진걸물절왜사소(甲辰乞勿絶倭使疏)』 『오봉집(梧峰集)』 고문서로는 교첩지 등 49매, 유지 2매, 교서 1매, 시권 3매, 혼례간 2매, 녹패 3매, 준호구 22매 등이 있다.
오봉 신지제는 수령으로서 선정을 베풀었고 임란을 당하여서는 국난극복에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으며 백성들을 구휼하는데도소홀함이 없었고 많은 저서를 남긴 분으로 오래도록 추앙받을 것이다.
* 명화적(明火賊) : 조선 전기 때부터 나타났으며 특히 19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발생한 강도 집단(떼강도)를 말한다. 이들은 수십명씩 대오를 갖추었고 우두머리가 있으며 부유한 가정을 주로 공격하였다. 명화적이란 이름은 이들이 약탈할 때 횃불을 들고 침입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