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 진보(晉甫), 호는 나재(懶齋). 신준정(申俊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수(申壽)이며아버지는 신흘(申仡)이고,어버니는 순천 박씨(順天 朴氏)로 박윤(朴倫)의 딸이며, 부인은문소 김씨(聞韶 金氏)로 김굉(金浤)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신열도(申悅道)[1589~1659]는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되고, 1624년(인조2)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1625년에 박사(博士), 전적, 기사관을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는형들과 더불어 호란 당시 척화(斥和)를 강력하게 주장하며화의론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1628년 형조 좌랑(刑曹 佐郞)이되었으며, 동지사(冬至使)의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禮曹)·병조(兵曹)·호조(戶曹)의 좌랑(佐郞)을 두루지내고, 1630년 지제교(知製敎), 1636년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 병조 정랑(兵曹 正郞), 사간원정언(司諫院 正言)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병자호란때에도 화의론을 강력히 비난하며 동지들과 상소를 올려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했다. 이어 의병을 모집하는격문(檄文)을 초안하여 도내에 포고하고, 각 고을마다 의병을 모아 해서 부원수(海西 副元帥)의 진(陣)으로 보냈다.
이듬해 전란이 끝나자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1638년(인조 16) 울진 현령(蔚珍縣令)으로 나아가 민생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인조는 이를모두 받아들였다. 1645년 공조·병조의 정랑(正郞)에 제수고, 1647년장령(掌令)을 거쳐1649년 예천 군수(醴泉 郡守)로 나아갔다가 1652년(효종 3) 장령을지냈으며, 다시 능주 목사(綾州 牧使)를 지냈다.
1655년 사간(司諫), 성균관사성(成均館 司成), 종부시 정(宗簿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때부터 고향에서 두문불출하며 병환을 다스렸다.
학문과저술
문집으로는 『나재집(懶齋集)』 9권 4책이 있으며, 『선사지仙槎志』와 『문소지聞韶志』 등도 편찬하였다. 『문소지』는스승인 장현광의 권유로 편찬한 의성현의 읍지이다.
내용
3권1책. 목판본. 1674년(현종 15) 후손인 지연(之沇)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이순정(李純亭)의 서문과 권말에 송시열(宋時烈)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권1은 지문(誌文) 1편, 사제문 1편, 제문 1편, 만장 14수, 연보 1편, 권2는 부(賦) 1편, 기(記) 7편, 소(疏) 1편, 행장 1편, 묘지 1편, 신도비명 1편, 책문(策問) 3편, 합사상소(合司上疏) 1편, 권3은 시 142수, 찬(贊)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보방비변책(保邦備邊策)」은 임금이 변방 외적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정책을물어오자 이에 대한 계책을 밝힌 것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은 유능한장수를 양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어 북방 여진족에 대한 경계를 신중히 할 것과, 특히 일본을 철저히 경계하여 왜인의 이주가 60호 이상 초과되면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 일본 세력의 확대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귀신무격책(鬼神巫覡策)」에서는 귀신·무격등이 본래는 음양의 이치에 따라 백성들을 이롭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후세에 와서 허망한 사설(邪說)로 흐르게 되어 그 폐단이 심하다고 밝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가 안정되고 교화가 밝아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밖에 「합사상소」는 삼사를 대표하여 올린 것으로,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직언, 탄핵하여그를 축출한 글로 유명하다.
저자는 조천록(朝天錄), 선차지(仙槎誌), 문소지(聞韶誌), 배문록(拜門錄) 등의 저술과 약간의 유문을 남겼다. 본집은 가장초고(家藏草稿)를바탕으로 수집 편차하여 목판으로 간행하였으며, 서(序), 발(跋)이 없어 편찬경위와 간행 연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6세손 신치교(申致敎)가 가장(家狀)과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1587~1667)가 지은 묘지(墓誌)를 가지고 입재 정종로(立齋鄭宗魯)(1738~1816)에게 행장을 부탁하였는데, 행장말미에 정종로의 관직이 ‘지평(持平)’으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지평에 제수된 1796년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추정할 수 있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40-46),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811.98/신열도/나-판),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2753)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96년 이후에 간행된 초간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본 영인저본중 권6의 제35~36판은 상태가 불량하여 동일본인 연세대학교학술정보원장본으로 대체하였으며 권9의 제1판은 판차(板次)가 누락되어 있다.
본집은 9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권마다 목록(目錄)이 있다.
권1은 詩(123제(題))이다. 서장관(書狀官)으로 부경(赴京)할 때상사 송극인(上使 宋克訒)과 수창한 시 및 使行 중 각처에서 소회를 읊은 시가 가장 많으며, 장현광(張顯光), 야은 길재(冶隱吉再), 백ㆍ중형(伯ㆍ仲兄)등의 시에 차운한 시, 신지제(申之悌) 홍위(洪瑋) 등을 애도한만시, 금김영조(金榮祖) 신즙(申楫) 등에게 준 증시 등이 시체 구분 없이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권2는 교서(敎書)(2), 사제문(賜祭文)(2), 소(疏)(4), 계(啓)(9)이다. 강원 감사 박서(朴遾), 황해 감사 이만(李㬅)에게 내리는 교서와 한남군이필영(漢南君 李必榮), 형조 참판 이민환(李民寏)을 위한 사제문이 있다. 〈무인응지소(戊寅應旨疏)〉에서는결역(結役)의 편중과 군액(軍額)의 과다로 인한 울진현(蔚珍縣)의폐해를 진달하여 도움을 청하면서 ‘다난흥방(多難興邦)’을 역설하였고, 〈청물견신사잉자핵계(請勿遣信使仍自劾啓)〉에서는 강화 사신을 보내지 말 것을 주장한 정온(鄭蘊)을 옹호하고 간관(諫官)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체직을 청하였다.
권3은 〈조천시문견사건계(朝天時聞見事件啓)〉로, 서장관이 되어 1628년 7월 11일 사조(辭朝)하고 해로(海路)로 부경하여 1629년 윤4월 18일평양(平壤)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을 자세히 기록하여 왕에게보고한 것이다.
권4는 명(明)의 도독 모문룡(毛文龍), 등주(登州) 군문(軍門), 예부(禮部)에 올린 呈文(8)이다.
권5는 장현광, 심지원, 김세렴, 김광계, 김응조 등에게 보낸 書(30)이다. 장현광에게는 부모, 처, 장자의상례에 대한 문목 등 6편이 있고, 〈기제아(寄諸兒)〉는 1636년남한산성에서 척화를 주장하며 아들들에게 비장한 마음을 전한 것이다.
권6은 잡저(2), 서(3), 발(7), 상량문(4), 축문(12)이다. 잡저의 배문록(拜門錄)은장현광의 문하에서 40여 년간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기록하였고, 〈나재설(懶齋說)〉은 재명(齋名)을 ‘나(懶)’로 삼은 연유를 설명한 것이다. 황호(黃㦿), 신홍망(申弘望), 김광악(金光岳)을 위한 송서(送序)와 선차지(仙槎誌)(1640년)와 문소지(聞韶誌) (1656년)의 발, 장현광을 배향한 동락서원(東洛書院) 등의 상량문, 1621년 사행(使行) 중에 폭풍으로 사망한 유간, 박이서 등을 위로하는 제문 등이 있다.
권7은 제문(17), 묘표지(묘표지)(6)이다. 정구, 장현광, 신지제, 이민성, 최현등을 애도한 제문, 부모의 묘표, 중형 신달도와 종형 신지도의묘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