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부(順夫), 호는오봉(梧峰). 고려 충신 효자 신우의 후예이고, 구미파조(龜尾派祖) 신광귀(申光貴)의 후손이다. 아버지는신몽득(申夢得)이고, 부인은함안 조씨(咸安 趙氏)이다.아들은 신홍망(申弘望)이고, 형제로는 신지효(申之孝), 신지신(申之信), 신지의(申之義), 신지행(申之行), 신지경(申之敬), 신지훈(申之訓) 등이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신지제(申之悌)[1562~1624]는학봉 김성일과 유일재 김언기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89년(선조 22) 증광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정언, 좌랑, 문학, 부사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였다. 예안 현감 때에는 죄수를 석방하여 농사에 전념토록 하였다. 임진왜란때는 열읍이 붕괴하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나라는 초토화되었다. 이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경상북도 예안, 안동 겸관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구휼에 전념하였다. 의병 모집을 위해 단기(單騎)로안동 용궁 방면으로 다니다가 왜병 70여 명에게 포위되었으나 과거 훈방된 죄수가 은공을 갚아 목숨을건진 일이 있었다. 예안, 안동 겸관으로 있을 때 구휼한백성이 수천에 이르렀다.
다시 예안에 가서 의병장 김해(金垓)와 약속하여 피차 나라일로 목숨을 잃을 때에는 처자를 의탁하기로 하였다. 뒤에김해는 경주 진중으로 출발하였고, 뒤에 순국하였다. 그 때선생의 백씨가 왜군의 칼에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쳤으며, 혈서로 중씨에게 “국가에 몸을 바쳤으니 나라 일에 전력하라.” 하였다. 그 길로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에 진을 쳤으나 1596년 4월 순찰 종사관의 명을 받아 순찰 임무를 띠고 팔공산에 이르러 열읍의 수령에게 전쟁에 나아가 “일사종시 동난사(一死終始 同難事).”하도록 했다. 다시 함양 화왕산성에서 망우당 곽재우와 동맹 창의하고 국가에 충성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통제사 종사관, 삼영 종사관 등을역임하였으며, 왜군이 물러난 후에는 여러 고을의 판관 등을 지냈다. 창원부사 재직 시에는 명(明) 화적 정대립(鄭大立) 등을 잡은 공로로 교서를 받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였으며, 인조 때는 승지(承旨)를역임하였다. 선무호성훈(宣武扈聖勳) 1등에 올랐다. 퇴관 후 권귀(權貴)를 탐하지 않고 낙향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0리나 되는 구미보를축성하여 주변 땅을 옥답으로 만들었다. 인조반정 후 인조의 엄소(嚴召)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과저술
신지제의 전적·고문서의 수량은 8종 5책 78매이다. 원래 오봉 종택이 있는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251에 보관하였다가, 보존을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한국 국학 진흥원에 위탁 관리하고 있다.
목록을 살펴보면, 필사 원본으로는『영남동도회첩(嶺南同道會帖)』, 『장사목록(長沙目錄)』[효종 3년 도승지 이시모의 탄핵 사건으로 평안도 벽당에 유배 갔을때 일기], 『조선 팔도 지도(朝鮮 八道 地圖)』[17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재사종의(齋舍宗議)』[기제(忌祭), 묘제(墓祭), 묘위토(墓位土)에 관한 완의(完議)], 『구미보신장도목 완의(龜尾洑 新粧都目 完議)』[신지제가 축보(築洑)한구미보에 관한 내력과 완의, 구미보 몽리호(蒙利戶)의 답수(畓數)와 경작자명단, 수세액 등 기재, 시기는 17~19세기], 『갑진걸물절왜사소(甲辰乞勿絶倭使疏)』, 『오봉집(梧峰集)』 4책 등이 있다. 고문서로는신지제 부자의 교첩지 등 49매, 유지 2매, 교서 1매, 시권 3매, 혼례간 2매, 녹패 3매, 준호구 22매 등이 있다.
내용
7권4책. 목판본. 1740년(영조 16) 현손 진구(震龜)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이광정(李光庭)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진구의 후지,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권1∼5는 시 617수, 권6은 기(記) 2편, 서(序) 2편, 권7은 차(箚) 1편, 교(敎) 3편, 제문 8편, 묘지 2편, 서(書) 6편, 습유(拾遺)에 시 9수, 제문 1편, 부록으로 행장·묘갈명·제문·만사·장대서원묘우상량문(藏待書院廟宇上樑文)·상향축문(常享祝文) 등으로구성되어 있다.시는 창원부사로 있을 적에 지은 것을 모은 「회산잡영(檜山雜咏)」 상·중·하, 은거하여 있을 적에 지은 「구당만록(龜堂漫錄)」, 선성부사로 있을 적에 지은 「유청량산록(游淸凉山錄)」 등으로 편집되어 있다.차자의「헌부차자(憲府箚子)」는 그가 사헌부에 재직 당시 왕에게선정을 바라는 내용이다. 「교선무공신이광악서(敎宣武功臣李光岳書)」「교호성공신고희서(敎扈聖功臣高熙書)」「교오련서(敎吳連書)」 등은 임진왜란 당시에 왕이 이들 공신에게 내린 교서로서, 임진왜란 연구의 참고자료가 된다.서(書) 가운데 「여혹인서(與或人書)」는 병마의 폐단이 농가에 극심하므로, 이의 시정을 촉구하는 서한이다. 저자의 행장은 이민환(李民寏)이, 묘갈명은 이광정이 썼다.
묘소
전주 판관 재임 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676년(숙종 2년) 이조 참판 증직이 내렸으며, 뒤에 사림의 공의가 준발하여 장대 서원을창건하고, 송은 김수광, 회당 신원록, 경정 이민성과 함께 장대 서원에 봉향되었다.
오봉 종택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87호이며, 전적·고문서는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45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