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성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이 13일 열린 제1차 훈민정음 기념 사업 토론회에서 기조발표를 하고 있다.
[중부매일 이지효 기자] 프랑스 파리에는 에펠탑, 미국에는 자유의 여신상, 한국에는? 훈민정음 탑!.
우리의 한글이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시점에서 세계 문자중에서 가장 우수한 훈민정음을 기념하는 '훈민정음 탑'을 한글창제 완성에 기틀을 마련한 청주 초정행궁에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충북지회(지회장 김동연)는 13일 우민아트센터 교육실에서 제1차 훈민정음 기념 사업 토론회를 개최했다.
박재성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은 '훈민정음 탑 건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한 발표를 통해 "훈민정음은 세계의 모든 문자중에 유일하게 창제자와 창제연도는 물론 창제원리를 알 수 있는 독창성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음에도 이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없다"며 "경천·애민 사상을 바탕으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효용성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를 확산시켜 나가는 시발점으로 삼기 위해서라도 자발적인 참여로 훈민정음 탑을 건립해야 한다"고 당위성을 강조했다.
박 이사장은 이를 위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각해야 할 것 ▷훈민정음의 창제 정신을 담야아 할 것 ▷천년을 내다보는 문화재적 가치를 담아야 할 것 ▷국내외 관광객이 꼭 가보고 싶은 명물이 되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세종대왕 혹은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있는 역사성 있는 곳이 우선 선정대상이 돼야 하고, 항공, 철도, 도로 등 교통의 편의성과 접근이 쉬운 곳, 건립 예정지의 행정기관과 주민이 혼연일체가 돼 추진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방웅 전 충북대 총장은 "청주 초정에 훈민정음 탑이 건립돼 세계에서 찾는 한국의 상징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회 회장은 "명예교수회 회장단들도 훈민정음 탑 1호가 청주 초정에 세워질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겠다"고 덧붙였다.
나기전 전 청주시장이 13일 열린 제1차 훈민정음기념 사업 토론회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나기정 전 청주시장은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을 기리고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한글을 상징한 탑이 적극 추진되도록 힘써달라"고 당부했다.
세종대왕이 두 번에 걸친 행행(行幸) 역사가 있는 청주 초정약수터에 세계적인 '훈민정음탑'을 조형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미 이 제안에 앞장 선 나기정 전 청주시장이 수 만평의 부지를 기증하고 신방웅 전 충북대 총장 이융조 전 충북대교수 등 원로 재청 학계 문화계 인사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초정에서 한글창제 과업이 마무리 되어 반포되었다는 훈민정음 역사는 학계의 굳어진 학설이 되고 있다. 세종은 안질 치료를 목적으로 초정 행궁에 와서 2개월여 있었다. 일국의 왕이 지방 행궁에서 이렇게 많은 날을 지냈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 기간 동안 초정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왜 세종은 이렇게 많은 날짜를 초정행궁에서 떠나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훗날 세조는 초정을 찾는 길에 특별히 속리산 복천암에 들려 부왕을 도와 한글창제에 조력한 신미대사를 만난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은 이런 해답을 숨겨 놓았다.
초정에서 훈민정음 창제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기록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문이다. 최만리는 반대상소에서 '이번 청주 초수리 거둥 때 (…)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꼭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닌데 어찌 이것을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옥체 조섭을 번거롭게 만드시나이까?'라고 했다. 바로 이 상소문 안에 세종의 초정행궁 체재의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다.
세종은 한양 정궁으로 신미대사를 불러올리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중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중이 궁을 출입한다고 성토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총신들을 시켜 안질치료에 효험이 있다는 초정행행의 명분을 얻으려고 묘안을 짰다.
처음에는 지방을 행차하면 백성들이 괴롭다고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임금 편인 비서실장도승지가 충청도는 풍년이 들어 강행해야 한다고 주청하자 못이기는 척 허락했다. 세종의 초정 나들이는 바로 한글 창제를 마무리하기 위한 일대 비밀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한양에서부터 초정리까지의 거리는 280리. 세종대왕은 한양~죽산~진천~초정의 노선을 5일에 걸쳐 당도했다. 어가는 단출하였으며 첫 날은 100여리나 나갔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흘 째 되는 날(3월 1일)에는 속도가 상당히 떨어졌다. 숙영지인 충청도 진천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다(3박). 나흘째 되는 3월 2일 세종 일행은 다시 60여 리를 더 내려가 드디어 초정에 도착했다. 왕 왕비 세자는 물론 수행한 신료들도 모두 고단해 바로 취침에 들어갔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세종의 초정행차 역사는 이같이 힘든 노정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인 신미대사에게 승려로서는 전무후무한 시호를 내리라고 유언한다. 혜각존자(慧覺尊者) 앞에 '나라와 세상을 이롭게 하였다'는 우국이세(祐國利世)란 칭호를 붙이라고 한 것이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 문종은 부왕의 유명을 실천했다.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라는 불서 말미에는 1438년 세종 20년 명(明) 정통(正統) 3년 천불사(天佛寺)에서 정음으로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는 한글창제 반포 5년 전의 일이다. 이 불서를 보아도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한 주역은 신미대사가 분명한 것이다. 이 불서의 진위에 관한 논란도 있지만 보다 연구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글은 이제 세계 언어학자들로 부터 가장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글을 문자로 쓰는 나라가 늘고 있다. 한글창제가 마무리 된 초정에 '훈민정음 탑'이 세워져 세계인들이 많이 찾는 미래를 기대해 본다. 이 대업이 이 시대 우리들이 해야 할 '국격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