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아주(鵝洲). 자는경해(景楷),호는이치재(二恥齋). 신채(申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대석(申大錫)이고, 아버지는신덕일(申德溢)이며, 어머니는이성구(李星耈)의 딸 예안 이씨(禮安 李氏)이고, 부인은안이순(安履順)의 딸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숙부인신덕순(申德洵)에게 출계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신정모(申正模)[1691~1742]는 어려서는 중부(仲父)인 신덕호(申德浩)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장성해서는이만부(李萬敷)에게 수학하였다.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20년에 부정자, 1725년(영조 1)에 지평(持平)·정언(正言)·사옹원 주부(司饔院 主簿) 등에 임명되고,1727년 병조 좌랑·강원 도사·병조 정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다가, 거창부사에 임명되자 부임하였다.
1728년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이를막지 못하여군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 뒤 암행어사 이흡(李潝)이전과를 재조사, 보고하는 과정에서 그 죄상을 과장하여, 1735년다시 흥양(興陽)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충청도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적소에서 죽었다. 1864년(고종 1) 복관되었다.
학문과저술
신정모는 귀양지에서 항상 나라와 부모에게 충효(忠孝)를 다하지 못한 점을 부끄러워하며, 그 호를 스스로이치재(二恥齋)라 하였다. 문집으로는 6권 3책의 『이치재집(二恥齋集)』이 전하는데, 이 문집은 1899년(광무 3) 후손신상헌(申相憲)과 신돈식(申敦植)이 편집·간행한 것이다. 저서로는10권 3책의 『소행록(素行錄)』이 전해진다.
내용
저자의 유문은 아들 신방렬(申邦烈)과 신광렬(申光烈)이 가장(家藏) 초고를바탕으로 수습하여, 전긍재(戰兢齋) 김서일(金瑞一)에게 교정(校正)과 장문(狀文)을 의뢰하였으나 그 대신 저자의 행력에 대한 변호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後敍를 받고, 문집의 초고본(草稿本)을만들어 두었다.
그 후1864년에 저자가 복권되자 증손 신면벽(申冕璧)(1803~1868)이긍암 이돈우(肯庵 李敦禹)에게 저자의 行狀을 받고, 가장된 초고본을 재정리하여 편집하였다.
1887년에 문집을 영간(營刊)하자는 의논이 일어나면서 저자의 5대손 신상헌(申相憲)(1842~1911)이김도화(金道和)와 함께 교정하고, 1898년에 장석룡(張錫龍)이지은 저자의 묘갈명 등을 새로이 부록에 추가하여 이듬해인 1899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때 재정적 한계로 시문의 일부만을 편간(編刊)하였으며, 저자가 유배지에서 편찬한 「소행록(素行錄)」은 간행하지 못하였다. 《초간본》이 본은 현재 강경훈씨(姜景勳氏),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581), 규장각(古3428-457), 장서각(K4-6411)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소행록」은 6대손 신세환(申世煥), 신계환(申啓煥), 신기환(申紀煥) 형제가 10권 3책으로 騰寫(騰寫)하고, 7대손 申基勳(申基勳)이부록을 추가하여 1980년에 석판(石版)으로 간행하였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2506-文40-8), 고려대학교중앙도서관(치암C1-A249)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5대손 신상헌(申相憲)이 1899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으로 강경훈(姜景勳) 소장본이다. 본영인저본 중 권2의 제9~48판은 판차가 ‘一~四十’으로 오기(誤記)되어있다.
본집은 6권 3책이다. 권수에는 1898년에 지은 김도화(金道和)의서(序)와 목록(目錄)이 수록되어 있다.
권1은 부(賦)(2), 사(辭)(3), 시(詩)(82제(題))이다. 부(賦)와 사(辭)는 1724년에 지은〈농은와사기정신상사(聾隱窩辭寄呈申上舍)〉를 제외하면 모두유배 중에 지은 것들이다. 이 중 〈음애사(陰厓辭)〉는 1741년 가섭산(迦葉山)을 유람할 때 난초사(蘭草寺)의남쪽에서 이자(李耔)가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은거할 때 노닐던 곳을 발견하고 느낀 점을 노래한글이다. 권2의 전반부까지 수록된 시는 저자가 17세 때 지은 〈丁亥春讀書 ……〉를 시작으로 유배지에서 졸하기 전에지은 〈病中口號古詩一章〉까지 詩體 구분 없이 저작 연도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유배 이후에 지은 시들이많은 수를 차지하며, 벗들과 여러 지역을 유람하며 지은 유산시와 모친과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시가 자주보인다. 그 가운데 〈白雲精舍雜詠〉은 유배 생활의 답답함을 잊기 위하여 자주 방문하던 八影山의 백운정사와주위의 풍경들을 노래한 연작시로서, 칠언절구 20수와 오언절구 14수로 되어 있으며 창작의 배경을 서술하고 있는 長文의 詩序가 있어 1733년당시 저자의 심적 정황을 엿볼 수 있다.
권2는 詩(31), 書(20)이다. 書는 李萬敷, 李栽, 李, 權相一, 李光庭, 柳升鉉, 申弼貞, 李重煥, 鄭之鏶, 河瑞龍에게 보낸 것이다. 그중 〈與密菴李丈〉의 別紙는 이재에게 「朱書講錄刊補」와「近思錄」에 대하여 의문 나는 점을 조목별로 정리하여 질문한 것이다. 〈答密菴李丈〉은 戒懼가 動靜을겸하는가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권3은 書(8), 雜著(7), 序(3), 記(7), 跋(3), 箴銘(7), 說(7), 辨(1), 上樑文(1)이다. 書는 李景翼, 洪重寅, 洪重徵, 吳尙遠, 金瑞一, 南耈, 李眞望, 申德涵, 伯兄申彦模에게 보낸 것이다. 雜著에는 戊申亂 당시에 慶尙監營에 보고하기 위하여 지은 〈賊變時報營草〉와 의금부에서심문을 받을 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지은 〈陳情文〉이 포함되어 있다. 〈悔堂先生年譜跋〉은 1748년 6대조 申元祿의 문집을 校正하고 연보를 지은 내력을 기록한글이다. 〈二恥齋銘〉은 저자가 자신에게 나라를 배반하여 忠을 어기고 부모와 떨어져 孝를 훼손하게 된두 가지의 부끄러운 과오가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하여 유배소의 小齋를 ‘二恥齋’로 명명하고 그 경위를 기록한 글이다. 〈游楊尹諸公不著伊川行狀辨〉은程頤의 문하에 여러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행장이 지어지지 않고 그 대신 후대에 주자에 의해 연보가 만들어진 이유에 대하여 논한 글이다.
권4는 祭文(7), 哀辭(3), 誄文(1), 遺狀(7), 墓碣銘(1)이다. 제문은 安季皐, 鄭之, 申德浩, 伯從叔, 모친 宣城李氏, 부인順興安氏와 東萊鄭氏에 대한 것이다. 애사는 從兄 申重模, 李猶龍, 李子達을 위해 지은 것이다. 뇌문은 李栽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 유장은 조부 申文錫, 伯祖 申禹錫과 아버지 형제들의 행장과 두 부인에대한 行略이다. 묘갈명은 李東美에 대한 것이다.
권5~6은 附錄이다. 권5는저자의 백형 신언모가 작성한 연보, 아들 申邦烈이 지은 言行拾錄, 金星慶, 許昶 등이 지은 挽詞 29편, 許寶, 李萬甲 등이 지은 제문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6은 許逷, 許澈 등이 지은 제문 8편, 李敦禹가 1864년에지은 행장, 張錫龍이 1898년에 지은 墓碣銘, 1864년에 복관이 되어 종후손 申錫祜와 이돈우가 지은 告由文 2편, 金瑞一이 1766년에 지은 文集後敍, 5대손 申相憲이 1898년에 지은 跋과 종후손 申相夏가 지은 文集告成文이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