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아주(鵝洲). 자는석형(錫亨).호는자족재(自足齋).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역임한 신견(申堅), 어머니는 신효성(申孝誠)의 딸인 평산 신씨(平山申氏), 할아버지는 신사도(申師道),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역임한신심(申伈), 부인은병자호란때 순절한 김경(金鏡)의 딸 의인(宜人) 안동김씨(安東 金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신봉석(申鳳錫)[1631~1704]은 1631년(인조 9)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남다른 덕과 총명을 보여주어,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 전한다. 7세때신봉석이 ‘학서(學書)’를 청하였는데, 몸이 유약하다며 부친이 허락하지 않았다. 13세 때에는 부친이 통발 속의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자, 신봉석은 단지 잉어 한 마리만 가지고 왔다. 부친이 그 까닭을 꾸짖어 묻자신봉석은 “차마 모두 잡아오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일화가 있다. 특히신봉석은 효성이 지극했다고 전해지는데, 부친의 병환 때에는 얼음을 깨어 물고기를 잡아오고 상분(嘗糞)하며 간병하였다. 또한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했는데, 모친이 20리 밖에 떨어져 계셨기에 매일 곡을 하면서도가서 살피기를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몸가짐도 단정하여 의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 없었다고하며, 부모 제사 때가 아니면 함부로 돼지와 닭을 도살하지 않았다.
신봉석은 부친의 계(階)로 인해 선교랑(宣敎郞)에통적(通籍)되었으며, 일찍이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1655년(효종 6) 어느 날 성균관의 모든 유생이 삼청동(三淸洞)에 놀러 갔지만, 오직신봉석과 호남의 한 유생만이 성균관을 지키고 공부하고있었다. 이때효종이 불시에 성균관에 내시를 보내어 두 유생에게친히 시제를 내려 글을 짓게 하니, 둘 중 장원은신봉석이 차지하였다.이에효종은신봉석에게 집을 내리려 했지만, 대간(臺諫)들의 반대로종이·붓·먹만 상으로 내렸다. 1657년(효종 8) 한성시(漢城試)에는급제하였으나, 성시(省試)에는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낙향하여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으며,스스로 ‘자족재(自足齋)’라는 호를 짓고 편액(扁額) 한 뒤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고향에 있으면서도 국사에 대해서는 매우 강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677년(숙종 5) 「진오폐소(陳五弊疏)」를 올렸는데, 이는 당시의 폐단을5개조로 나누어 지적한 것으로, 그 첫째가 세금 징수의 폐단, 둘째가 군역의 폐단, 셋째가 가난한 백성이 더 가난해지는 폐단, 넷째가 영남의 인재를 쓰지 않는 폐단, 다섯째가 인재 등용의 폐단이다. 이어신봉석은 「의청영남행경대동소(擬請嶺南行京大同䟽)」라는 상소를 올려, 대동법(大同法)의 영남지역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후 거처를 지금의의성군의성읍용연리로 옮겼으며,초택(草澤)에서 머물다 1704년(숙종 30) 세상을떠났다.
학문과저술
신봉석의 문집으로는3권 1책의 『자족재유집(自足齋遺集)』이 전한다. 이 책은신봉석의 8세손신용섭(申龍燮)이 편찬하였으며, 1921년경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권2에신봉석이 올렸던 두 편의 상소문인 「진오폐소」와 「의청영남행경대동소」, 그리고 「자족설(自足說)」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신봉석은 「자족설」에서 “자족의 도는 높은 데 있는것이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마음에 있으니그것을 취하여도 금하는 것이 없고, 그것을 써도 다하지 않는다.”라며자족의 의미와 자신의 신념을 풀이해 놓았다.
내용
조선 후기의 학자 신봉석(申鳳錫)의 시문집. 3권 1책. 목판본. 1919년 9대손 용섭(龍燮)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홍승목(洪承穆)·오명근(吳明根)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후손 입인(立仁)·용섭·형식(亨植)·도(燾)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120수, 권2에 소(疏) 2편, 서(書)·제문 각 1편, 권3에 부록으로 행록·행장·묘갈명·서가장후(書家狀後)·자족재기(自足齋記)·서자족설후(書自足說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는 유려한 운치로 실사적인 묘사시가 대부분이다. 자연을 자신의 은거생활에 결부시켜읊은 〈한거즉사 閒居卽事〉·〈유거만영 幽居謾詠〉·〈술회 述懷〉·〈서회 書懷〉·〈우음 偶吟〉, 계절을따라 시경을 노래한 〈입춘 立春〉·〈동풍 東風〉·〈희우 喜雨〉·〈추흥 秋興〉·〈중양 重陽〉·〈백설 白雪〉·〈제야 除夜〉, 학문과 교육을 소재로 한 〈학문 學問〉·〈유두일시아조 流頭日示兒曹〉·〈시아배삼수 示兒輩三首〉, 선비의 기개를 보인 〈상국 霜菊〉·〈자경 自警〉, 병자호란으로 인하여비분강개한 우국충정을 나타낸 〈비분음이수 悲憤吟二首〉·〈우탄 偶歎〉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소의 〈진오폐소 陳五弊疏〉는 1677년(숙종 3)에 올린 소로, 부렴(賦斂)·군역(軍役) 궁민익곤(窮民益困)영남편고(嶺南偏苦)용인편중(用人偏重) 등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다섯 가지 폐단을 지적하여 개혁을 단행할 것을 진달하고 있다.
또, 〈의청영남행경대동소 擬請嶺南行京大同疏〉는 당시 영남의 조세(租稅)와 부역이 다른 도에 비하여 과중함을 일일이 설명하고, 그 시정책을 촉구한 내용이다.
서의 〈답용궁수조면서 答龍宮倅趙沔書〉는 용궁 현감이 정치적인 자문을 구해 오자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내용이다. 조선 후기의 정치적·사회적인 정세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등에 있다.
묘소
『자족재집(自足齋集)』 묘갈명에는 현의 서쪽에 위치한 의곡(蟻谷)에 묘소가 자리한다고 하였는데, 현재의경상북도의성군안평면신안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