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홍망(申弘望)[1600~1673]은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급제한 뒤, 강릉참봉(康陵 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9년(인조 17) 별시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1645년 승문원 주서(承文院 注書)가되었으나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였다. 1646년 전적(典籍)․병조 좌랑(兵曹佐郞)․정언(正言),1647년(인조 25) 예조 좌랑(禮曹 佐郞)․전주 판관(全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1652년(효종 3)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이때 도승지이시매(李時楳)가 자못 패만(悖慢)한 것을 지평 이온발(李溫發)이상주(上奏)하다가 탄핵을 당하였다. 이 때이시매는 자기의 밝음을 선현을 이끌어서 증명하려 하였다. 신홍망은 이를 듣고 직접 그 소(疏)를 보니 실로 모욕적이어서 이를 단독으로 왕에게 진달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당론을 타파하고자 하는 마당에 호당(護黨)한다 하여 탄핵을 받고 벽동(碧潼)으로유배되었다가 두달 뒤 풀려났다.
1656년 울산 부사(蔚山 府使), 1659년에는풍기 군수(豊基 郡守)로 나아갈 때 수령들이 잇달아 관청에서죽으며 흉흉한 소문이 일자, “내가 그 자리에 나가지 않고서는 요망스러운 말을 없앨 수 없다”라고 말하며부임하였다 한다. 수령이 된 뒤에는 교육을 장려하는 데 힘썼으며 가난한 선비를 도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664년(현종 5) 강원도도사(江原道 都事), 사예(司藝)를 두루 지냈다 이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거의 나아가지 않았다.말년에는 주로 고향인 의성의 거처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 본 영인저본(本 影印底本)은 국립중앙도서관장본(國立中央圖書館藏本 )(도서번호(圖書番號):한46-가1722)으로서반엽(半葉)은 10行 18자(字)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18.8×15.0(cm)이다.
○ 본 영인저본(本 影印底本)은 부록상(附錄上)의 제(第 )3판(板)은 낙장(落張)이므로 동일본(同一本)인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도서번호(圖書番號 ):811.98/신홍망)으로 보충(補充)하였다.
17세기 학자 신홍망(申弘望 )(1600-1673)의 시문집이다.
신홍망(申弘望)의 자는 망구(望久)‚ 호는 고송(孤松)‚ 본관은 아주(鵝洲)‚ 승지신지제(承旨 申之悌)의 아들이다. 1627년(인조 5) 진사시에합격하고‚ 1639년(인조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지평·정언·풍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52년(효종 3) 사헌부지평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도승지 이시매(李時楳)의 행동에 대한 시비(是非)를 가리는 과정에서‚ 당론(黨論)의 타파에 힘쓰지 못할망정 오히려 호당(護黨)한다는 탄핵을 받고 벽동(碧潼)으로유배되었다가 두 달 뒤에 풀려났다. 1659년(효종 10) 풍기군수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풍기군에서는 부임하는 사람마다 연달아 관청에서 죽는 변고가 일어났다. 따라서 관료들 사이에서 풍기군수로의 부임을 꺼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신홍망(申弘望)은 전혀개의치 않고 부임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교육에 힘썼다
≪고송집(孤松集)≫은본집 3권에 부록 상하(上下)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1에는시(詩) 108수(회산봉한식(檜山逢寒食) 외)‚ 권2에는 시(詩)132수(부소명도한강문체즉회정(赴召命到漢江聞遞卽回程) 외)‚ 권3에는 소(疏) 2편(진정걸성소(陳情乞省疏) 외)‚ 제문(祭文) 7편(제여헌장선생문(祭旅軒張先生文) 외)‚ 부록상권에는 통훈대부행사간원정언고송신선생 행장(이광정 찬(通訓大夫行司諫院正言孤松申先生行狀(李光庭 撰)))‚ 묘지명(墓誌銘) 1편(권상일 찬(權相一))‚ 부록 하권에는 시(詩) 4수(송완산반자부임소-금응조 작(送完山半刺赴任所-金應祖 作) 외)‚ 제문(祭文) 2편(유원지(柳元之) 외)‚ 만사(輓詞) 10편(유원지(柳元之) 외)‚ 명(銘) 1편(낙선당명(樂善堂銘))‚ 문집후지(신진구지(文集後識(申震龜 識)))등이 수록되어 있다.신홍망(申弘望)의 증손 신진구(申震龜)가지은 발문(跋文)에 따르면‚이고산(李孤山)선생이 신진구(申震龜)에게 증조부의 유고를 연몰(煙歿)시키지 말 것을 충고하여‚ 유고 가운데 전할만한 것을 초선(抄選)해 두고 이선생(李先生)으로부터 서문을 받아 간행하려 했다. 그러나 이선생(李先生)이 갑자기 운명하여 문집 간행이 연기되고‚ 유고는 40여 년 동안 그대로 방치되었다. 노년에 이른 신진구(申震龜)는문집을 간행하지 못한 채 죽게 될 것을 염려하여 간행을 재추진하였는데‚ 증조부(曾祖父)의 유고를 들고 이광정(李光庭)을 찾아가서 와류(訛謬)된부분을 수정받고 서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해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고송집(孤松集 )≫ 2책을 간행하였다. 문집에는 간행시기를 ‘기미년(己未年)’ 혹은 ‘상지십오년(上之十五年)’ 등으로 표기하고 있어 어느 王代에 간행한 것인지 불분명하나‚ 신홍망(申弘望)의 사망(1673년) 이후 기미(己未)년으로왕의 재위기간이 15년에 해당하는 시기는 1739년(영조 15) 뿐이다. 따라서 ≪고송집(孤松集 )≫은 1739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